[2]
창고 안은 컴컴했다. 천장에 여러 개의 불이 들어와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커다란 창고를 밝히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아마 새벽시장이 열릴 때까지는 그렇게 있어야 할 것 같았다.
얼과 면도날은 창고의 중앙에 서서 손님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두 사람이 신경을 곤두세우며 주위를 살피는데 창고 문이 열리더니 자가용이 한 대 들어왔다. 정각 9시였다.
차는 두 사람의 20여 미터 앞쪽에 멈췄다. 동시에 헤드라이터가 꺼지고 차 문도 열렸다. 차에서는 세 명이 내렸는데 그 중 한 명이 앞으로 나섰다. 어두워서 얼굴은 잘 보이지 않지만 다부진 몸매에 걸음걸이가 날렵한 것이 무술 고수가 분명했다. 특이하게도 그는 콧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일기장은 가지고 왔느냐?"
그는 주도권을 잡으려는 듯 말을 먼저 꺼냈다. 하지만 면도날도 만만찮았다.
"후후후, 매너가 꽝이로구먼. 상대방을 알려면 자신부터 소개해야 하는 거 아닌가?"
김 노인의 안전부터 확인하자는 말이었다. 이것으로 일단 면도날이 기선을 제압했다.
콧수염은 눈을 한 번 흘기더니 차를 향해서 손짓을 했다. 그러자 차의 뒷문이 열리며 두 명이 더 내렸다. 한 명은 콧수염의 부하였고, 다른 한 명은 김 노인이었다. 김 노인은 축 늘어져서 부축을 받고서야 간신히 몸을 움직였다. 상태가 좋진 않았지만 우려했던 것보다 나쁘진 않았다. 두 사람은 콧수염의 바로 옆에서 멈췄다.
"이제 일기장을 볼 차례인가?"
콧수염은 기다렸다는 듯이 반격을 시도했다. 얼은 봉투에서 일기장을 꺼내 면도날에 건넸고, 면도날은 그것을 들어서 확인시켜 주었다. 하지만 실내가 너무 어두워서 진위 여부를 확인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믿지?"
콧수염은 약간 꺼려하는 눈치였다. 면도날이 그걸 놓칠 리가 없었다.
"그건 네 자유다."
"후후후! 자신감이 대단하군. 좋다. 그럼 서로 교환을 하자. 내 부하가 영감을 데리고 중앙으로 갈 거다."
중간 지점에서 교환을 하자는 뜻이었다.
"좋다."
얼이 고개를 끄덕이자 면도날이 직접 앞으로 나섰다.
"그 자리에 서라. 이제 일기장을 던져라. 그러면 영감을 놓아주마."
면도날이 중간지점에 도착하자 콧수염이 소리쳤다. 하지만 면도날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었다.
"웃기는 소리 마라. 그 분을 먼저 보내라. 그럼 일기장을 던지마."
서로가 극도의 신경전을 벌였다. 하지만 콧수염이 순순이 응했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중간 지점에 도착해 있던 부하가 김 노인을 바닥에 눕혔다. 김 노인의 정신력은 대단했다. 기력이 쇠해 손끝도 움직일 수 없는데도 눈빛만은 살아 있었다. 불빛에 비친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번졌다.
"이제 던져라!"
콧수염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혹시나 면도날이 딴 마음을 먹을까봐 긴장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후후후! 생각보다 소심하시군. 자, 받아라!"
면도날은 일기장을 뒤로 던지는 시늉을 하다가 콧수염을 향해 던졌다.
"휘리리리릭......!"
일기장은 힘껏 천장으로 날아오르더니 콧수염과 부하의 중간 지점으로 떨어졌다. 그 사이 면도날은 김 노인을 데리고 뒤로 물러났다. 그의 동작이 일기장이 떨어지는 것보다 훨씬 더 빨랐다.
"이엽!"
콧수염도 즉시 몸을 날려서 공중에서 일기장을 낚아챘다. 그 사이 면도날은 뒤쪽으로 물러나서 김 노인을 편안한 곳에 눕혔다.
"할아버지!"
얼은 김 노인의 두 손을 꼭 잡았다.
"어... 얼이로구나."
김 노인은 겨우 말을 했다. 하지만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의 눈에서는 '면목이 없구나. 할애비가 되어서 손주들을 위험에 빠뜨리고'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앞으로는 저희들이 잘 모시겠습니다."
"허허허허...! 쿨록! 쿨록!"
그는 웃다가 그만 가래가 목에 걸려 기침을 해댔다. 가래 속에는 피가 묻어 나왔다. 아마도 고문을 당하면서 가슴에 심한 충격을 받은 모양이다.
"지금은 무엇보다 안정이 필요합니다. 호흡을 하시고 마음을 가라앉히세요. ... 뭐라고요?"
김 노인은 기침이 그치자 뭐라고 중얼거렸다. 너무 작아서 알아듣기가 힘들었지만 얼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침? 침 말입니까? 예! 가지고 왔습니다."
김 노인은 침을 찾았다. 얼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평소 자신이 사용하던 침통을 가져왔다.
"예에? 저는 못합니다."
아마 김노인이 그에게 침을 놓으라고 한 모양이다. 얼은 그 동안 햇살나눔터를 드나들면서 김 노인에게 침술을 익혔다. 배운 지는 일 년이 넘었지만 일 주일에 한 두 번 해본 거라 아직 초보수준에 불과했다. 오히려 침술은 그보다 아라와 우석이 더 뛰어났다. 하지만 지금은 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뿐이었다.
"얼아, 시간이 없다. 놈이 일기를 모두 살피기 전에 끝내야 한다."
상황이 다급해지자 면도날이 재촉하고 나섰다. 그도 얼이 침술을 펼친다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의 분위기가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김 노인이 기력을 회복하지 않으면 빠져나가기가 힘든 상황이었다.
숫자는 많지 않지만 상대는 모두가 고수들이었다. 특히 콧수염의 공중으로 뛰어오르는 동작은 주먹패들과는 수준이 달랐다. 정식으로 무술을 배운 사람이 아니고서는 그런 동작이 나올 수가 없었다.
"알겠습니다. 해보겠습니다."
얼은 결심이 섰는지 침통을 열었다. 통 속에는 크고 작은 침이 수백 개나 들어있었다. 그는 그 중에서 손가락 길이만한 것을 다섯 개 꺼내더니 입술을 물었다.
"으음!"
아직 놓지도 않았는데 뒤에 서 있는 면도날의 입에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런데 정작 김 노인은 담담하게 누워있었다.
침이 가장 먼저 꽂힌 곳은 정수리였다. 헌데 침이 막 머리 속으로 들어가는 순간 문제가 생겼다. 갑자기 김 노인의 표정이 굳어졌다. 아마도 가래가 목에 걸린 모양이다. 만약 기침을 하다가 침이 신경을 건드리면 환자가 잘못될 수도 있다.
"우욱!"
김 노인의 정신력은 놀라웠다. 그는 기침이 나오려 하자 입술을 깨물어 진정시켰다. 입술에서 흘러내린 피가 목을 타고 내려가 기도를 뚫은 것이다. 정수리에 이어 양쪽 어깨와 다리에 각각 하나씩 모두 네 개의 침이 꽂혔다.
고작 다섯 개의 침을 꽂았을 뿐인데도 얼의 머리에서는 식은땀이 비오듯이 흘러내렸다. 그는 사우나에 들어가도 땀 한 방울 안 흘리는 체질이었다.
"휴우! 잠시 후면 깨어나실 거야."
그는 소매로 식은땀을 닦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느 새 김 노인은 편안하게 잠들어 있었다. 아마 침들은 혈도를 벗어나지 않고 제자리를 찾은 모양이다. 이 정도면 이제 얼도 초보수준은 면할 수 있을 것이다.
"얼아, 준비해라. 놈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얼이 김노인의 상처를 살피는데 뒤에서 면도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는 다소 긴장되어 있었다.
약속대로라면 콧수염은 지금쯤 차를 타고 밖으로 향하고 있어야 했다. 헌데 가기는커녕 그는 부하들을 데리고 두 사람을 향해서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처음부터 일기장과 관계없이 김 노인을 해칠 계획이었다.
"할아버지는 네가 맡아라."
이번에는 얼이 앞으로 나섰다.
"좀 쉬는 게 좋지 않겠냐?"
얼은 침을 놓느라고 기력을 너무 소비했다. 면도날은 그게 마음에 걸려 만류했다.
"괜찮다. 그리고 상황이 안 좋아도 깨어나실 때까지 할아버지를 건드리면 안 된다."
그는 혹시 면도날이 나설까봐 먼저 움직였다.
"후후후!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였어. 하긴 납치나 일삼는 놈의 말을 믿은 내가 바보지."
김 노인이 깨어나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얼은 심리전을 펼치며 시간을 끌었다. 정상대로라면 김 노인은 5분 후면 깨어나겠지만 초보가 시술한 거라 자신할 수가 없었다.
"그런 말장난은 내게 안 통한다. 빨리 해치워라!"
콧수염도 만만찮았다. 그는 얼이 시간 끄는 것을 눈치를 채고는 곧바로 공격 명령을 내렸다.
"우웃!"
곧바로 콧수염의 왼발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처음부터 얼은 뒤로 밀렸다. 조금만 늦었어도 정통으로 맞았을 것이다. 콧수염의 공격법은 특이했다. 보통은 부하들을 먼저 내세우고 두목은 뒤에 나서기 마련인데 그는 부하들과 같이 움직였다.
부하들은 바람잡이 역할을 했다. 그들이 먼저 공격해서 상대에게 허점이 생기면 그것을 콧수염이 집중 공격하는 방식이었다. 계속 밀리자 얼은 몸을 구르면서 뒤로 물러났다. 일단 여유를 가지고 공격할 방법을 찾기 위해서였다. 콧수염도 생각이 비슷했다. 그래서 공격을 고삐를 늦추었다. 그것이 실수였다. 예상과는 달리 얼은 곧바로 공격을 했고, 그는 당황한 나머지 미처 방어를 못했다.
"퍼벅!"
둔탁한 소리에 이어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얼은 앞을 막아서는 부하의 얼굴을 오른발로 찬 다음 회전하면서 왼발로 콧수염의 목을 강타했다. 목이 워낙 중요한 급소인데다 정통으로 맞아서인지 콧수염은 쓰러져 움직이지도 못했다.
두목이 당하자 부하들은 우왕좌왕했다. 얼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한 명은 주먹에, 다른 한 명은 돌려차기에 맞아서 나가 떨어졌다. 순식간에 네 명이 모두 제압 당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자 시작에 불과했다.
"삐이익!"
정신을 차린 콧수염은 주머니에서 호각을 꺼내 불었다. 그러자 사방에서 이십여 명의 청년들이 몰려나왔다. 그들은 모두 길쭉한 금속물체를 들고 있었다. 그것은 각목이 아니라 쇠파이프였다. 콧수염은 미리 부하들을 숨겨놓았던 것이다. 이것으로 그는 처음부터 김 노인을 내 줄 생각이 없었다는 것이 확인된 셈이다.
"속전속결이다! 할아버지를 업어라!"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 사이 김 노인이 정신을 차렸다는 점이다. 얼은 소리를 지르면서 청년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언뜻 보기에는 무모한 행동처럼 보였다. 아무리 무술 실력이 뛰어난 사람이라도 이십여 명의 쇠파이프를 든 청년들과 정면으로 부딪히는 것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다.
"미친 놈, 지가 무슨 이소룡이라도 되는 줄 아는 모양이지?"
뒤에서 구경하던 콧수염도 비웃었다. 그는 얼의 행동이 단순히 면도날과 김 노인을 피신시키기 위한 고육책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곧 자신이 잘못 생각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저건 또 뭐지?"
잠시 방심한 사이에 얼의 허리춤에서 날카로운 물체들이 날아왔다. 콧수염과 그의 부하들은 주위가 어두워서 물체의 크기나 거리를 정확하게 구분하지 못했다.
"우욱!"
뒤에서 구경하던 콧수염이 신음소리를 내며 주저앉았다. 어느 새 그의 오른쪽 어깨에도 불펜 크기만한 물체가 꽂혀 있었다. 물체의 정체는 '은총이'였다. 얼은 이것을 믿고 몸을 날렸던 것이다. 그래도 콧수염은 양호한 편이었다. 그의 옆에 쓰러져 있는 부하는 은총이가 가슴에 꽂혀 있었다. 오른쪽으로 1㎝만 움직였어도 심장에 정통으로 꽂혔을 것이다.
"뒤로 물러나라! 어서!"
콧수염이 상황판단을 하고 후퇴 명령을 내린 것은 일곱 명이나 쓰러진 뒤였다. 이렇게 되자 콧수염의 부하들은 겁을 먹고 함부로 덤벼들지 못했다. 콧수염도 어깨에 꽂힌 은총이를 빼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상처는 심하지 않았지만 피가 계속 흘러내려 신경이 쓰였다.
"우욱! 죽일 놈, 감히 내 몸에 상처를 입히다니. 절대로 살려보내서는 안 된다. 공격하라!"
피는 보는 순간 그는 이성을 잃어 버렸다.
"멍청하게 서서 뭐 하는 거야! 물러나는 놈은 내 손에 죽을 줄 알아라. 어서 공격해! 어서!"
그는 흐르는 피를 막을 생각도 하지 않고 부하들을 독려했다. 주춤거리던 부하들은 그의 기세에 눌려 조금씩 앞으로 전진했다. 요란한 소리가 울린 것은 바로 그 때였다. 콧수염이 들어온 반대편 문 쪽에서 경찰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창고 안이 밀폐된 공간이라 더 크게 울렸다.
"경찰이다!"
청년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뒤로 물러났다. 아마 그들에겐 사이렌 소리가 구원의 나팔소리였을 것이다. 하지만 콧수염의 입장은 달랐다.
"제기랄! 하필이면 이 때 올게 뭐람. 철수한다. 네 놈들은 오늘 운 좋은 줄 알아라. 이 원수는 다음 번엔 반드시 갚아주마."
그는 어깨에 난 상처를 가리키며 발길을 돌렸다. 그나마 그는 일기장을 건진 것을 위안으로 삼았다. 그의 말을 끝으로 그들은 마치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잠시 후 창고 안에는 세 사람만 남게 되었다. 헌데 어찌된 일인지 한참을 지나도 경찰은 오지 않았다. 혹시 콧수염 일당을 쫓아간 것일까? 그래도 이상했다. 아무리 범인들을 쫓더라도 최소한의 인원은 남아서 현장을 조사하는 게 경찰의 기본 수칙이 아닐까? 이유는 곧바로 드러났다.
"이제 우리도 가자."
더 이상 사이렌 소리가 들리지 않자 얼과 면도날도 창고를 나섰다.
"아라와 석이는 어디에 있느냐? 괜찮은지 모르겠구나."
김 노인의 목소리가 면도날의 등뒤에서 들려왔다. 그는 침 덕분에 기운을 차려 말까지 하게 되었다.
"놈들을 쫓아갔습니다. 곧 만나게 될 겁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렇다. 모든 것이 놈들의 본거지를 알아내기 위한 얼의 작전이었다. 아라와 우석에게 가짜 사이렌 소리를 내게 해서 콧수염 일당을 도망치게 한 다음 그들을 뒤쫓으려는 것이다.
물론 김 노인의 기억을 더듬으면 본거지를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자면 시간이 많이 소비될 것이다.
"내가 그 아이들까지 위험에 빠뜨렸구나."
김 노인은 자기 때문에 손주들이 다칠까봐 걱정하는 눈치였다. 이들의 정체를 모르는 그로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희들은 할아버지의 손자, 손녀들입니다. 아까 얼이도 말했지만 앞으로는 저희들이 할아버지를 모실 겁니다."
면도날은 말을 하면서 두 손으로 김 노인의 허리를 꼭 쥐었다.
"허허허! 이 늙은이가 뒤늦게 손주 복이 터졌구나."
"얼아!"
문 앞에 도착하자 면도날이 얼을 불렀다. 얼은 대답은 하지 않고 고개만 돌렸다.
"일기장을 빼앗겼으니 이제 어떻게 하지? 훈장만으로 놈들을 골탕먹일 수 있을까?"
아마 이번에는 진짜를 넘긴 모양이다. 그게 사실이라면 이들은 중요한 무기를 하나 잃은 셈이었다.
"걱정하지 마라. 우리에겐 할아버지가 계시잖아."
얼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왠지 마음이 무거웠다.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일기장도 당시의 기록이 아니라 최근에 김 노인이 적은 것이기 때문에 확실한 증거가 되기는 어렵다. 그건 훈장도 마찬가지였다.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상태에서 훈장만 있으면 증거 능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조국일보에서 조작했다며 반격을 할 수도 있다.
그쪽에서 두려워하는 것은 이런 일이 언론에 거론되는 것 자체였다. 진위 여부를 떠나 일단 소문이 나면 자신들에게는 이로울 게 없다. 자칫 소문이 커져서 친일과 친독재에 대한 논쟁이 재현되면 신문의 정통성에 커다란 상처를 입게 될 것이다. 그것은 당장 판매 부수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그들이 겁내는 것은 바로 그 점이었다.
"얘야, 날 좀 내려주겠느냐?"
두 사람의 얘기를 듣고 있던 김 노인이 엉뚱한 주문을 했다. 지금은 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할아버지! 어디 편찮으세요?"
면도날은 혹시 김 노인의 상태가 좋지 않은가 해서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아니다. 내 몸은 걱정하지 마라. 난 적어도 십 년은 더 살 수 있다. 그래, 여기다 잠시 내려다오."
그는 불안한 표정으로 창고밖에 있는 길다란 평상에 김 노인을 내려놓았다. 평상은 상인들이 잠시 휴식을 취하는 곳으로 낡고 지저분했지만 크기와 높이가 사람이 눕거나 앉아서 쉬기에 적당했다.
"얼아, 내 왼쪽 신발을 좀 벗겨다오. 그래, 잘했다. 냄새는 좀 나겠지만 깔창을 빼 보아라. 무엇이 보이지 않느냐?"
얼은 그가 시키는 대로 신발 바닥을 살펴보았다.
"이거 말입니까?"
얼의 손바닥 위에는 새끼손가락 만한 열쇠가 놓여 있었다. 신발 안쪽의 바닥에는 열쇠가 들어갈 만한 크기의 홈이 파여 있고, 그 속에 열쇠가 숨겨져 있었다.
"그래. 이제부터는 네가 가지고 있거라."
얼과 면도날은 영문을 몰라 서로 멍하니 쳐다보기만 했다.
"궁금한 모양이구나. 그것만 있으면 이윤수 일가를 몰락시킬 수가 있을 게다."
"예에?"
"이 걸로 어떻게 말입니까?"
"껄껄껄! 물론 열쇠로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지. 지금부터 내가 하는 얘기를 잘 들어라. 나는 이윤수의 친일행각을 확인하기 위해서 수십 년 동안 노력해왔다. 총독부 자료를 확인하는 것은 물론이고 일본에도 여러 번 다녀왔다. 그러던 중 재작년에 결정적인 단서를 찾았다."
"이윤수가 배신을 했다는 증거입니까?"
"그래. 당시 총독부가 이윤수의 배신과 조선해방그룹의 해체 과정을 상세하게 적은 보고서와 그 공로로 이윤수에게 훈장을 수여했다는 기록이다."
"그게 정말입니까?"
"하하하! 그러면 놈들을 몰락시키는 것은 시간 문제겠네요."
증거 때문에 고민하던 얼과 면도날은 이제 한시름 놓게 되었다.
"그렇다고 자만해선 안 된다. 놈들은 이 나라의 모든 권력 기관에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섣부르게 덤볐다간 당하는 것은 우리가 될지도 모른다. 내가 이 꼴이 된 것도 그 때문이다."
김 노인은 이번 일을 통해서 다시 한번 더 언론의 힘을 깨달았다. 그는 보훈처에 국가유공자 신청 서류를 내고 채 4시간도 지나지 않아서 납치를 당했다. 설사 검찰이나 정보기관도 일처리를 그렇게 빨리 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 정도로 언론은 막강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저도 명심하겠습니다. 헌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 데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면도날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물론이고 말고. 내 취미가 사람들과 얘기를 하는 게 아니더냐? 그래, 뭐가 그렇게 궁금하냐?"
"......."
막상 허락이 떨어지자 면도날은 주춤거렸다.
"뭐해! 할아버지가 기다리시잖아."
그는 얼의 재촉을 받고서야 겨우 입을 열었다.
"실은 할아버지께서 혼자서 오랫동안 사시는 게 궁금해서......."
"허허허허! 고작 그 질문을 하려고 그렇게 뜸을 들였더냐? 그러니까 그게 언제 적 얘기냐 하면......."
면도날의 걱정과는 달리 김 노인은 자신의 과거사를 쉽게 털어놓았다. 그의 얘기를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그에게는 어린 시절부터 결혼을 약속한 여자가 있었다. 두 사람은 동갑내기로 그녀는 조선해방그룹을 결성했던 최기봉의 딸이었다. 그녀 역시 조선해방그룹 결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당시 김 노인은 상해 임시정부에서 일을 했고, 그녀는 상해 임시정부와 조선해방그룹 간의 연락 업무를 맡았다.
사건이 일어날 당시에도 두 사람은 상해에 같이 있었다. 그녀는 국내에서 모금한 독립운동 자금을 임시정부에 전달하기 위해 상해로 간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녀는 사건이 터진 줄도 모르고 국내에 들어왔다가 헌병에 붙잡히고 말았다. 해방이 채 10개월도 남지 않았는데 말이다.
그도 한 달 뒤에야 그녀의 체포 소식을 들었다. 하지만 자신은 조국으로 돌아올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 역시 조선해방그룹의 일원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 한 달 뒤. 그녀가 일본 경찰의 고문을 견디다 못해 옥사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는 자신의 여인을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죄책감 때문에 해방이 된 후에도 한동안 국내에 돌아오지 못했다. 나중에 돌아와서도 그는 오직 봉사활동과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데 전력을 다했다.
그가 사건에 집착하는 것은 부친의 죽음에 대한 복수심도 있지만, 무엇보다 그녀의 죽음에 얽힌 비밀을 풀기 위해서였다. 그러다보니 독신으로 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애인에 대한 얘기를 할 때는 그의 눈가에 이슬이 맺히기도 했다. 그것은 아직까지도 그의 가슴에 그녀에 대한 그리움이 남아 있다는 증거였다.
덧붙이는 글 | (이 소설에 나타나는 지명과 인명 등은 특정 지역이나 인물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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