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성북동의 고급주택가. 여기는 한국의 베버리 힐즈라고 불리는 곳으로 주로 재벌 회장이나 정, 관계의 고위인사, 그리고 문화계의 대가들이 살고 있다. 강남이 대한민국의 신흥 부촌이라면 이곳은 오리지널 부촌이다.
이곳은 주변 경관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공기도 좋아서 한 번 정착을 하면 좀처럼 떠나지를 못한다. 최근에는 젊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강남으로 많이 이주하긴 했지만 그래도 한국 최고의 주택단지라고 하면 아직까지는 이곳을 꼽는다.
어둠이 내리고 시계바늘이 막 저녁 9시를 가리킬 때였다. 승합차 한 대가 주택가 골목길을 들어섰다. 그 차는 동네를 한 바퀴 돌더니 거대한 저택의 담벼락에 멈췄다. 그 저택은 이 일대에서 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크고 화려했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사람들의 왕래가 뜸해지자 차에서 한 명이 내렸다. 그는 주위를 살피더니 전봇대 위로 올라갔다. 옷차림이나 행동으로 봐서는 절대 전화나 전기공사를 하는 사람 같지는 않았다.
그는 특수 장비도 없이 전봇대의 꼭대기까지 손쉽게 올라갔다. 그곳에서 잠시 주위를 살피더니 호주머니에서 집게 같은 것을 꺼냈다.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다음 그는 선을 한 가닥 끊었다.
"삐리리릭......!"
동시에 주변의 여러 집에서 비상벨 소리가 울렸고, 사내는 그 즉시 밑으로 내려와 차 안으로 숨어버렸다. 비상벨이 울린 집들은 고함소리가 나고 난리도 아니었다.
잠시 후 경비업체의 차가 오고 나서야 사태는 진정되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경비업체 차가 떠나자마자 사내는 다시 전봇대로 올라가 선을 끊었다. 물론 차는 다른 곳으로 옮겨져 있었고, 비상벨은 다른 집에서 울려 퍼졌다.
이렇게 이 일대는 자정이 넘도록 똑같은 사건이 수십 건 반복해서 일어났다. 경비업체의 직원은 시스템 상의 문제라는 말만 되풀이할 뿐 속수무책이었다. 나중에는 적응이 됐는지 비상벨이 울려도 동네가 평상시처럼 조용했다.
새벽 1시. 그 사이 차는 처음 세워졌던 담벼락 옆으로 옮겨져 있었다. 이번에는 두 사람이 내렸다. 그들은 얼굴은 물론이고, 옷과 신발까지 모두 검은 색으로 뒤집어쓰고 있었다. 그들은 차에서 내리더니 곧바로 옆에 있는 저택의 담을 오르기 시작했다. 3미터가 넘는 곳을 두 사람은 별로 힘들이지 않고 뛰어넘었다.
독산그룹 한상철 회장. 독산그룹은 30대 그룹에 들어가는 중견 그룹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쿠데타로 집권하고, 한.일간의 국교가 정상화되면서 급격히 성장한 기업이다. 처음에는 주로 일본에서 원자재를 들여와 가공해서 수출하는 일을 했는데, 15년 전부터 음료와 유통시장에 진출해 그 분야의 국내 최고 기업이 되었다. 최근에는 회사의 주력을 인터넷과 IT 산업으로 전환하고 있다.
또한 한상철 회장은 한일무역인협회와 한일문화협력회의 회장직을 맡는 등, 국내의 대표적인 일본통 경제인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이 바로 그의 집이다.
연속해서 고장이 나자 경비업체에서는 아예 경보장치를 꺼버렸다. 그 덕분에 두 사람이 월담을 했는데도 경보는 울리지 않았다. 이들은 이것을 노리고 경보장치를 고장낸 것이다.
두 사람은 뛰어내리자마자 황급히 몸을 나무 뒤로 숨겼다. 그들이 내려선 곳에서 불과 5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경비 두 명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조금만 늦었어도 들켰을 것이다.
"씨팔! 하필이면 오늘 같은 날 경비 시스템이 고장날 게 뭐야?"
"그러게 말야. 오늘도 잠자기는 다 틀렸군."
경비원들은 담배를 피워 물더니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 사이 두 사람은 건물 뒤편으로 이동했다. 건물은 전체가 환하게 밝혀져 있어서 접근하기가 쉽지 않았다. 게다가 경비원들이 주요 지점마다 버티고 있어서 마음대로 움직일 수도 없었다.
두 사람이 잠시 머뭇거리고 있을 때였다. 정문이 열리더니 고급 외제승용차 한 대가 집 안으로 들어서는 것이 보였다. 자연히 경비원들의 신경은 그곳으로 집중되었고, 그 틈을 이용해서 두 사람은 건물의 뒤쪽 문으로 접근하는 데 성공했다. 이번에는 문이 말썽이었다. 그 중 한 명이 만능 열쇠로 열려고 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안쪽에 이중 잠금 장치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은 할 수 없이 벽을 타고 2층으로 올라갔다. 다행히 그곳에는 창문이 한 곳 열려 있었다. 두 사람은 좌우를 살핀 다음 즉시 안으로 들어갔다. 위험이 도사리고 있기는 그곳도 마찬가지였다. 창문을 닫는 순간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의 크기로 봐서는 그리 멀지 않은 거리였다.
그들은 재빨리 욕실로 몸을 숨겼다. 욕실 문을 닫는 순간 방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안으로 들어섰다. 이십 대 말 정도로 보이는 사내로 외제차를 몰고 온 장본인이었다. 그는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는 옷을 벗었다. 헌데 벗기만 할 뿐 입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건 외출에서 돌아와 샤워를 하겠다는 뜻이었다.
두 사람도 문틈 사이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기 때문에 상황파악을 하고 있었다. 만약 그가 욕실로 들어선다면 모든 것이 들통나고 만다. 그들은 위기의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빠르게 움직였다. 한 명은 문 뒤에 숨고, 다른 한 명은 욕조 속에 몸을 숨겼다.
예상대로 청년은 욕실로 향했다. 그는 뭐가 그렇게 좋은지 음악에 맞춰서 휘파람을 불며 가볍게 몸까지 흔들어댔다. 어느새 그의 오른손은 문고리를 잡고 있었다. 이제 문을 열기만 하면 두 사람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다행이 행운의 여신은 두 사람 편이었다. 그가 막 문을 열려는 순간 노크와 함께 밖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사님, 회장님께서 부르십니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이십대 말에 불과한 사내를 이사님이라고 불렀다. 이 집에서 그렇게 불리는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한창규, 28세. 한상철 회장의 외아들로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대학원까지 미국에서 보낸 뒤 작년에 돌아왔다. 지금은 그룹 기획조정실 실장 겸 이사직을 맡아서 경영수업을 하고 있다.
다시 옷을 입고 방을 나선 한창규는 2층 끝방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은 방을 나와서 옆방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한창규가 들어간 방과 붙어 있는 방이었다. 방에 들어선 두 사람은 신속하게 움직였다. 한 사람은 품 속에서 가는 줄을 꺼내서 허리에 매고, 다른 사람은 창문을 열고 주위를 살폈다.
주위에 사람이 없는 것이 확인되자 허리에 줄을 맨 사람이 창문을 통해서 밖으로 나갔다. 물론 남은 사람이 그 줄을 붙잡았다. 옆방 창문까지의 거리는 2미터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곳을 이동하는 데 2분이나 걸렸다. 우선 붙잡을 곳이 없는 데다가 오전에 비가 와서 벽면이 미끄러웠다.
"우웃!"
너무 긴장한 탓일까? 오른 손이 옆방의 창문틀을 잡는 순간 그만 미끄러지고 말았다. 왼손이 조금만 늦게 창문틀을 잡았어도 그대로 밑으로 떨어졌을 것이다. 간신히 위기를 모면한 복면인은 호주머니에서 보청기처럼 생긴 작은 물체를 꺼내더니 창문에 붙였다. 그게 끝이었다. 그는 곧바로 방으로 돌아왔다.
두 사람은 도둑질이 목적이 아니었다. 방에는 귀중품들이 상당히 많았다. 서랍과 장롱 속에는 귀금속과 현금이 들어있고, 골동품도 꽤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런 것에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두 사람은 창문에 작은 물체가 붙어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방을 나섰다. 그 때부터 그들은 자신들이 들어왔던 길을 따라서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나가는 것이라 들어올 때보다는 수월했다. 불과 3분 뒤에 두 사람은 담벼락에 세워진 차에 들어가 있었다. 차는 그들이 돌아오자마자 곧바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수고했어. 위험하진 않았어?"
그들을 반기는 것은 아라의 걱정하는 목소리였다. 그렇다. 복면을 한 사람들은 바로 얼과 면도날이었다.
"난 괜찮아. 대부분 면도날이 했기 때문에 힘들지도 않았어."
얼은 공을 면도날에게 돌렸다. 이번 일은 면도날에게 부담이 컸다. 남의 지갑을 훔치는 데는 일가견이 있지만 월담은 처음이었다.
사실 그는 얼의 뒤꽁무니를 따라다니기도 힘들었다. 특히 한창규가 욕실로 들어서려 했을 때와 얼이 창문에서 미끄러지는 순간에는 눈앞이 캄캄하고 등줄기에서는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런데도 그는 웃기만 할 뿐 말이 없었다.
"녹음은 잘됐냐?"
얼은 녹음 장치와 통신장비들이 있는 뒷자리에 앉았다.
"당근이지. 한 번 들어볼래?"
우석은 테이프를 돌리면서 자신 있게 말했다. 얼이 창가에 붙인 것은 무선도청기였다. 고성능이라 반경 1킬로미터 내에서는 도청할 수 있다. 성능에 따라서 다르긴 하지만 그 정도 물건은 세운상가에 가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다.
"틀어봐라. 어떤 놈들인지 한 번 들어보자."
면도날은 약간 상기된 얼굴로 재촉했다. 힘들기는 했지만 그에겐 좋은 경험이었다. 이번 일은 그에게 소매치기를 성공했을 때보다 더 큰 스릴과 쾌감을 안겨주었다. 테이프가 다 감기자 곧바로 음성이 흘러나왔다.
"하하하! 그럼 이제 내 결혼 문제는 해결된 거나 마찬가지군요. 김 부장, 수고했소."
"아닙니다. 저야 회장님의 지시대로 했을 뿐인 걸요."
"이건 그냥 인사치레로 하는 말이 아니오. 만약 내 결혼이 성사되면 김 부장에게도 그만한 대가가 돌아갈 거요."
"감사합니다. 그 땐 제 부하 놈들도 신경 좀 써 주십시오. 고생들을 많이 했습니다."
"하하하! 걱정하지 마시오. 내가 누구요? 몇 달만 기다리시오. 앞으로는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해주겠소. 요즘 건설업이 주춤해서 그런데, 경기만 회복되면 하청업체 정도는 몇 개라도 만들 수 있을 거요."
"감사합니다.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저희들은 영원히 회장님과 이사님께 충성할 것입니다.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기뻐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세 명이었다. 방금 제동을 걸고 나선 굵직한 목소리의 소유자가 바로 이 집의 주인이자 독산그룹의 오너인 한상철이고, 나머지 두 사람은 한창규와 일기장을 빼앗아간 콧수염이었다. 콧수염의 오른쪽 어깨는 붕대를 감았는지 불룩했다. 그곳은 얼의 비밀병기인 '은총이'가 꽂힌 자리였다.
"아버지도 참, 일기장까지 손에 넣었는데 뭘 걱정하십니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우선 영감이 살아있는 것이 마음에 걸리고, 그리고 그가 일본에 자주 다녀왔다는 것도 왠지 꺼림직하다."
"하긴 영감을 처리하지 못한 것은 우리의 실수죠. 그렇다고 그렇게 걱정하실 것까지는 없지 않습니까? 영감이야 앞으로 잘 감시하면 될 테고... 그런데 일본에 갔다 온 게 왜 문제가 됩니까?"
"어디를 갔다 왔느냐가 문제지. 영감은 일본에 있는 동안 국회 도서관과 국가문서보관소에서 살다시피 했다. 만약 그곳에서 당시 사건과 관련된 자료를 찾아냈다면 문제가 달라진다."
일본통이란 별명답게 한 회장은 김 노인의 일본에서의 행적을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훤히 알고 있었다. 그건 일본 내에서도 정보계통의 사람이 아니면 알 수 없는 고급정보였다.
"국회도서관은 그렇다치더라도 국가문서보관소는 아무나 들어갈 수 없을 텐데..."
"영감은 젊은 시절에 일본에서 학교를 다녔다. 확실치는 않지만 그 때 친구들의 도움을 받은 것 같다."
"애초에 일기장만 처리하기로 했으니까 설사 그게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우리와는 상관이 없지 않습니까?"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넌 조국일보가 소용돌이에 휘말리는데도 우리와 사돈지간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조국일보에 관한 얘기가 나오자 한창규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대신 콧수염이 나섰다.
"영감을 다시 잡아다가 족치면 되지 않습니까?"
"그것도 이젠 쉽지 않을 게다."
"그 놈들 때문입니까? 그 놈들은 제가 처리할 수 있습니다."
콧수염은 큰소리를 쳤다. 그는 얼과 면도날에게서 일기장을 빼앗았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만약 두 사람이 일기장을 일부러 빼앗겼다는 것을 알면 그의 표정이 어떻게 변할까?
"그러다가 우리까지 노출되면 자네가 책임질 텐가?"
"그... 그건......."
한 회장이 노려보며 말하자 콧수염은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한 회장은 얘기를 하는 동안 계속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일단 놈들의 신원부터 파악하게. 처리 방법은 그 뒤에 논의하도록 하고."
"알겠습니다. 그럼 전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콧수염이 나간 뒤에도 방안에는 한 동안 침묵이 흘렀다.
"챙크랑!"
문이 닫히고 콧수염의 발자국 소리가 들리지 않자 한 회장은 탁자 위에 있는 재떨이를 집어다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유리로 된 것이라 부셔지면서 조각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건 한 회장은 극도로 화가 났다는 증거였다. 눈 꼬리는 위로 올라가고, 볼은 연신 실룩거렸다.
"아... 아버지."
한창규도 부친이 이렇게 화를 내는 것을 본 적이 없는지라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30이 다 되어 가도록 부친으로부터 뺨도 한 대 맞지 않았다. 헌데 부친의 눈에서 살기가 발산되는 것을 느꼈으니 어찌 놀라지 않겠는가?
"내가 아랫사람을 어떻게 다뤄야 한다고 했느냐?"
"그건 갑자기 왜?... 죄송합니다."
그는 부친이 화내는 이유를 눈치채고는 고개를 숙였다.
"다시 한 번 더 말하지만 어떠한 경우에라도 돈이나 자리로 부하들을 부려서는 안 된다. 놈들의 속성상 한 번 주기 시작하면 끝도 없이 요구하기 마련이다."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주의하도록 하겠습니다."
"특히 저 놈처럼 약아빠진 놈들은 조심해야 한다. 언제 우리 등 뒤를 찌를지도 모른다... 놈은 우리의 약점을 너무 많이 알고 있다. 난 항상 그게 마음에 걸린다. 그래서 말인데, 이 번 일이 정리되면 난 가장 먼저 저 놈부터 처리할 생각이다."
"그럼 제거하시겠다는 말씀입니까?"
"그래, 그것도 아주 깨끗하게 제거해야 된다. 그렇다고 우리 손으로 하자는 것은 아니다. 일단 적당한 구실을 붙여서 일본으로 보낸 다음 야쿠자가 처리하게 할 거다."
"야쿠자를요?"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넌 결혼 준비나 해라. 너도 알다시피 우리에겐 지금 언론의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내년에 결정되는 통신사업자는 우리 그룹 전체의 사활이 걸린 문제다. 만약 우리가 사업자로 선정만 된다면 단숨에 10대그룹에 진입할 수 있다. 반대로 실패한다면 그 결과는 너도 잘 알 게다. 우리도 준비는 많이 했지만 경쟁자들도 만만찮다. 만약 이런 때 언론이 조금만 도와준다면 승산은 우리에게 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사귄 지가 4년이 넘었습니다. 그리고 미국에서는 같이 생활하기도 했고요. 그건 아버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이 놈아, 넌 항상 세상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게 문제란 말이다. 4년 전을 생각해봐라. 그 때도 그 아이에겐 너 못지 않게 가까운 남자가 있었다. 헌데 어떻게 됐느냐? 심지어 둘 사이를 갈라놓기 위해서 죽은 것처럼 꾸며 미국으로 보내지 않았더냐? 언론사는 정치인은 물론이고, 재벌들도 눈독을 들이는 곳이다. 방심하면 안 된다. ......."
"멈춰!"
한 동안 테이프에서 흘러나오는 대화내용을 듣던 얼이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무슨 일이야? 형, 왜 그래?"
"야, 얼아! 너 어디 아프냐?"
다른 사람들은 놀라 눈이 휘둥그래졌다. 운전을 하던 아라도 무슨 일인가 싶어서 차를 길가에 세우고는 뒷자리로 옮겨왔다.
"얼아, 왜 그래?"
다른 사람들은 얘기를 듣느라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는 테이프에서 결혼에 관한 얘기가 나오면서부터 흥분하기 시작했다.
"다시 돌려. ...... 그게 아니고, 거꾸로 돌리란 말야. 빨리!"
그는 거의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우석은 그가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아... 알았어. 이 정도면 되겠어?"
테이프는 콧수염을 처리하는 부분부터 다시 계속되었다. 그 부분에서는 괜찮았다. 하지만 얘기가 다시 결혼부분에 이르자 얼은 다시 흥분하기 시작했다. 특히 여자를 죽은 것처럼 꾸며서 미국으로 보냈다는 부분에서는 얼굴이 붉다 못해 혈관이 튀어나올 정도로 흥분했다. 그러더니 급기야 몸을 떨기 시작했다. 본인 스스로 감정을 자제할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이다. 동료들은 그의 이런 모습을 본 적이 없어서 어떻게 할 줄을 몰랐다.
"형! 정신차려. 어... 얼이 형! 면도날 형, 어떻게 좀 해봐. 이러다 잘못되는 거 아냐?"
"야, 얼아. 정신차려! 얼아!"
면도날이 뺨을 때리고 몸도 주물러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석아, 테이프를 꺼라. 어서!"
눈치는 아라가 빨랐다. 그녀는 테이프가 원인이라는 것을 알고는 소리쳤다. 하지만 얼이 그렇게 하도록 놔두지 않았다.
"안돼! 계속 틀어 놔!"
그의 테이프에 대한 집착은 대단했다. 지금 이 순간 그의 모든 신경은 테이프에 집중되어 있었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번 결혼은 간단하게 집안 사람들만 모여서 치르게 될 게다. 나도 온 나라가 떠들썩하게 하고 싶지만 그 놈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린다. 이 회장하고도 그렇게 합의했으니 너희들도 이해하기 바란다."
"알겠습니다. 그럼 주무십시오."
그것으로 테이프는 끝났다. 하지만 얼의 흥분 상태는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1 시간쯤 지나자 몸을 떠는 것은 사라졌으나 다른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는 완전히 넋이 나간 사람처럼 맨 뒤 좌석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한 가지에만 몰두한 탓인지 그는 다른 말은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이 부분에서 그랬단 말이지?"
"예! 결혼 얘기만 나오면 발작 증세를 보입니다. 벌써 두 시간째입니다. 두 시간."
"으음! 얼이가 조국일보와 관련이 있을 줄은 몰랐군."
그 사이 최강조와 오동민도 도착했다. 그들은 몸이 아직 완쾌되지 않았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달려왔다. 오동민은 아직 목발을 짚고 다녔지만, 최강조는 멀쩡해 보였다.
"형이 조국일보와 관련이 있다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죠?"
우석은 얼의 몸을 주무르다 고개를 돌렸다.
"그건 두 가지 이유에서다. 첫 번째, 얼이 한 회장과 관련해서는 별다른 반응을 안 보였다는 것이다. 역으로 그건 조국일보와 관련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두 번째는 결혼과 관련된 부분에서 흥분했다는 거야. 그건..."
"그럼 혹시 형이 한 회장이 말하는 그 사람이 아닐까요?"
우석은 동민이 설명하는 도중에 끼어 들었다.
"음! 그럴지도 모르겠군."
사람들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유독 아라만은 침묵을 지켰다. 처음에는 얼을 걱정하느라 그녀는 다른 것에는 신경을 쓸 틈이 없었다. 하지만 그가 조금씩 안정되자 상황이 달라졌다. 그녀의 마음 속에 어둠의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한 것이다.
'내가 왜 이러는 걸까? 정말로 얼이를 사랑한다면 그를 이해해야 한다. 더구나 난 이런 일을 예상하고 있지 않았는가. 그런 데도 난 지금 화를 내고 있다. 아니, 불안하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만약 우리의 추측이 사실이라면 얼이는 지금 나하고는 비교할 수 없는, 아니 인간으로서는 견디기 어려운 고통에 시달리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난 지금 내 자신만 생각하고 있다. 이건 질투심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다. 아, 결국 나도 속좁은 여인에 불과하단 말인가?'
그녀는 이런 상황에서도 얼을 원망하기보다는 질투를 하는 자기 자신에게 화를 냈다. 그 정도로 그녀는 마음이 착했다. 보통 여자들 같았으면 남자의 괴로움 따위는 아랑곳 않고 구석으로 몰아세웠을 것이다.
"형이 계속 저런 상태로 있으면 어떡하죠? 놈들의 움직임으로 봐서는 마냥 기다리기는 어려울 것 같은데."
"얼이 개인적으로 조국일보와 연관된 게 분명하다면 설사 회복된다 하더라도 일을 하기는 어려울 거다."
강조는 책임자답게 냉정하게 판단했다.
"하긴 형이 그 여자를 만나면 얼마나 괴롭겠어요. 저 성격에 사고를 칠 수도 있고. 힘들더라도 우리끼리 해요."
"그건 안돼!"
우석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뒤쪽에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얼이었다.
"형!"
"얼아!"
우석과 면도날이 재빨리 뒤로 넘어갔다.
"대장, 전 괜찮습니다. 끝까지 같이 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얼의 두 눈에서는 밤 고양이의 눈을 연상케 하는 푸른빛이 흘러나왔다. 그에 비해 목소리는 많이 차분해졌다.
"너도 알다시피 우리는 개인적인 이익이나 원한을 풀기 위해서 일을 하지 않는다. 우리가 보기엔 넌 지금 감정이 많이 격해 있다. 그래서 걱정하는 것이다."
"부인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가능한 감정에 치우치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럼 며칠만이라도 쉬는 게 어떻겠느냐?"
얼이 고집을 부리자 동민까지 나섰다.
"대장, 저도 제 운명이 죽도록 싫습니다. 하지만 피하고 싶진 않습니다. 도와주십시오.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얼은 바닥에 무릎을 꿇는 것으로 자신의 심정을 대신했다.
"어... 얼아!"
목에 칼이 들어와도 고개를 숙이지 않을 것 같던 그였기에 사람들의 충격은 컸다. 그들의 눈빛들은 한결같이 '그 정도로 가슴 아픈 사연을 지니고 있었단 말인가?'라고 말하는 듯했다. 강조는 그에게 다가가 미소를 지으며 손을 잡았다.
"우리가 왜 네 마음을 모르겠느냐. 자, 일어나거라."
"이런 모습을 보여드려서 죄송합니다."
"이건 네가 미안해야 할 일이 아니다. 세상에 한두 가지쯤의 사연을 간직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네 생각이 그렇다면 말리지는 않겠다. 대신 너와 조국일보의 관계를 모두 밝힐 수 있겠느냐?"
강조는 조건을 내걸었다. 하지만 그건 얼이 쉽게 받다들이기 어려운 내용이었다. 그는 지금껏 어느 누구에게도 자신의 과거에 대해서 얘기를 하지 않았다. 아라도 그가 사랑하는 여인과 헤어졌다는 것을 짐작할 뿐 구체적인 사연은 모른다. 그는 그것이 마음에 걸렸던지 그녀의 눈치를 보았다.
'미안하다. 네게 먼저 고백했어야 하는데. 용서해 줄 수 있겠지?'
그의 눈빛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바보야. 우리 사이엔 용서란 말은 어울리지 않아. 잘못이 있다면 너의 아픔을 짐작하면서도 방관만 한 내가 더 크지. 어쩌면 그건 내 욕심이었는지도 몰라. 네 아픔이 계속돼야 그것을 달래줄 내가 필요하고, 그래야만 난 너의 가슴 한 구석을 차지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앞으로는 그냥 지켜보지만은 않을 거야. 너의 아픈 가슴을 달래고, 그 자리를 내가 대신 할 거야.'
어느 새 정상으로 돌아온 아라의 눈빛에는 사랑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얼의 표정은 한결 부드러워졌다.
"그녀와 제가 처음 만난 것은 약 6년 전이었습니다. 전 그 때 경찰 특수부대에서 근무하고 있었고, 그녀는 대학교 2학년이었습니다. 우리의 첫 만남은..."
그의 얘기는 한 동안 계속되었다. 얘기를 듣는 동안 사람들은 때론 슬픔의 눈물을 흘리고, 때론 분노의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의 얘기를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이나영, 21세. 그녀는 조국일보 회장 이길우의 손녀로 당시 T여대 불문과에 다니고 있었다. 두 사람의 만남은 한 사건에서 비롯되었다. 그것은 당시 세간에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경찰청 특수대 전 병력이 투입될 정도로 큰 사건이었다.
사건 명은 '여대생납치사건'이었고, 대상은 이나영, 바로 그녀였다. 범인은 몸값으로 50억을 요구했으나 사건은 특수대의 정예들이 투입되면서 일주일만에 해결되었다. 해결과정은 위험천만했다. 범인들이 흉기로 무장해 있어서 조금만 늦었어도 그녀의 목숨이 위험했을 것이다. 당시 그녀를 구한 사람이 바로 얼이었다.
범인들은 경찰이 투입되자 그녀를 죽이려고 했다. 그 때 그가 몸을 던져서 그녀를 구한 것이다. 대신 그는 칼에 옆구리를 찔려서 3 개월이나 병원신세를 져야 했다. 그것을 계기로 두 사람은 가까워졌으며 급기야 사랑을 하게 되었다.
동료들은 처음부터 반대했다. 이유는 두 사람의 신분 차이가 너무 크다는 것이었다. 그녀의 집안에서는 반대가 더 심했다. 심지어 경찰 고위층을 통해서 압력을 넣기도 했다.
그 역시 그게 마음에 걸려서 초기에는 일부러 그녀를 멀리했다. 하지만 그녀의 사랑이 그의 마음을 바꿔 놓았다. 사랑을 쟁취하기 위한 그녀의 행동은 감동적이다 못해 눈물겨웠다.
집안의 감시를 피해 그를 만나러 온 것은 다반사였고, 자살을 두 번이나 기도했다. 상황이 그 지경에 이르자 집안에서도 두 사람의 만남을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이 후 두 사람의 사랑은 더욱 깊어졌다.
당시 주위에서는 얼이 그녀의 집안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한 방법은 진급뿐이라고 충고했다. 그 역시 진급을 하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했다. 그 결과 그는 2년 동안 무려 3계급이나 진급했다. 무술 실력과 수사능력을 인정받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의 손에 해결된 사건만 해도 2년 동안 조직폭력배 24건, 마약사범 7건, 납치사건 3건 등이었다. 당시 특수대에서 처리한 사건 중에서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였으니 그의 활약상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녀가 4학년이 되면서 생겼다. 집안에서는 다시 그녀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정, 재계의 수많은 권력자들부터 청혼이 들어오자 어른들의 마음이 달라진 것이다. 결국 두 사람은 비밀리에 결혼식을 올리고 혼인신고도 하기로 했다.
그녀는 결혼식을 올리기 전에 여행을 가자고 했다. 얼이 특별휴가를 얻어 두 사람은 신혼여행을 겸해 제주도로 여행을 떠났다. 공교롭게도 그날은 얼의 생일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선물을 산다며 혼자서 제주 시내로 갔다. 헌데 그녀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경찰을 통해서 교통사고로 그녀가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는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장례식까지 치렀으니 부인할 수도 없었다. 더욱 그의 가슴 아프게 한 것은 그녀의 집안에서 보여준 태도였다. 그들은 그녀의 시신을 보여주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장례식조차 참석하지 못하게 했다.
그는 그들을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죄인처럼 생각되어 스스로 경찰복을 벗고 그들에게서 완전히 떠났다. 그리고 그녀의 뒤를 따르기로 하고 그는 마지막 여행을 떠났다. 그는 약 한 달 동안 그녀와 함께 보냈던 곳들을 찾아다니면서 그녀의 온기와 숨결을 느끼고, 또 가슴에 담아두었다.
그는 그녀와의 마지막 여행지이자 자살하기로 결심한 곳에서 새로운 인생을 찾았다. 광주로 향하는 기차에서 최강조와 오동민을 만난 것이다. 만약 그들을 만나지 않았다면 얼은 지금쯤 하늘나라에서 이름 없는 별자리 하나를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소설에 나타나는 지명과 인명 등은 특정 지역이나 인물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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