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트인들의 '노래하는 혁명' (1)

서진석의 <발트3국 이야기>

등록 2001.11.20 17:08수정 2001.11.20 19:43
0
원고료로 응원
얼마 전 리투아니아와 라트비아 양국간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 등록을 두고 상당한 알력이 오고 간 적이 있었다. 빌뉴스와 리가 두 도시 모두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이미 등록되어 있으므로 전 세계에 내놓을 만한 자랑거리를 전부 하나씩은 가지고 있는 셈인데, 이 사이 좋은 두 나라 사이에 잡음을 만들어 놓았던 것은 바로 두 나라의 민속음악이었다.

이전부터도 라트비아는 자국의 민속음악과 수천 명이 모여 대합창을 만들어내는 '노래대전'을 유네스코 세계고전(古典)명단에 등록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다. 일단 등록이 되면, 세계적 기관의 후원을 받으면서 민속음악의 녹음과 연구를 진행할 수 있는 등 많은 이점이 생기기 때문이다.

라트비아인들의 그런 간절한 수고에도 불구하고, 유네스코는 라트비아 민속음악의 세계문화유적등록신청을 기각했다. 라트비아인들이 이번 일로 기분이 나쁜 것은 단지 그 기각 사실뿐 아니라, 리투아니아 위원들이 그 일에 방해공작을 했다는 생각 때문이다.

리투아니아인들은 이 사건에 대해 라트비아와 리투아니아의 민속음악은 거의 비슷하므로 한 부류로 인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라트비아인들은 자신들의 전통이 더 오래 되고, 그리고 수집된 양도 더 많다고 반론을 펴며 팽팽히 맞섰다.

리투아니아측은 라트비아 민속음악 등록이 거부된 이유는, 리투아니아의 방해 때문이 아니라, 유네스코 위원회의 자체적인 결정이었다고 말하고 있지만, 라트비아 사람들은 결코 심기가 편하지 않다. 리투아니아의 주요 공예품인 전통 십자가 수공업 기법이 마침내 세계문화유산명단에 등록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번의 경우 민요라는 것이 발트인들의 화합을 저지하고 방해하는 일로 부각이 되었지만, 사실 발트인들 전부에게 민요라는 것은 정말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며, 민요처럼 그들을 하나로 묶어주었던 것은 없다.

지구상 어느 나라이건 자신들의 사상과 전통이 담긴 민요라는 것이 없는 경우가 없겠지만, 발트인들의 경우, 자신들의 민요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남들 못지 않게 특별하다고 할 수 있다.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세 나라를 통틀어 거의 모든 지방, 도시, 학교, 단체에 각국의 민속음악을 전문적으로 배우고 보급하는 아마추어 민속그룹이 활동하고 있으며, 국민들의 일상생활 속 여러 부분에서 아직까지 살아 숨쉬고 있다.

젊은이들 사이에서도 민속음악을 리믹스한 곡들이나, 민속음악의 모티브를 사용하여 현대감각으로 해석하는 그룹들이 많은 인기를 얻고 있으며, 각국 별로 그 민요를 수집하여 정리하는 작업도 활발히 진행중이다.

에스토니아의 경우는 수집정리한 분량이 아일랜드에 이어 전 세계에서 두 번째라고 하며, 리투아니에서는 '리투아니아 문학 전통예술 연구소'에서 리투아니아 민요의 수집과 연구를 맡아 진행하고 있으며, 라트비아에는 '라트비아 민속문화연구소'라는 단체가 그 일을 맡아 활동하고 있다.

세계에 알려진 가장 발트3국다운 행사 중에서, 위에 거론한 '세계노래대전'이라는 것이 있다. 리투아니아와 라트비아는 4년, 에스토니아는 매 5년마다 열리는 이 어마어마한 행사는 전 세계에서 살고 있는 해외동포와 전 지방의 사람들이 각국의 수도로 몰려와 일주일간 노래의 향연을 벌이는 잔치이다.

이 세계노래대전은 맨 처음 에스토니아에서 시작하였다. 1869년 타르투에서 시작되어 매 5년마다 전 에스토니아와 해외에 살고 있는 에스토니아 후손들이 모여 민요와 현대의 합창곡을 부르며 화합을 다지는 행사인데, 마지막 피날레 합창단의 수는 수 천에 이른다.

이 축제가 시작한 때는 에스토니아 민족의 각성운동이 막 시작한 때였기도 했지만, 소련 시대에는 그들의 연대감과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로서, 막대한 중요성을 가지고 내려왔다.

이 축제는 발트3국 전역으로 전파되어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전지역에서 열리고 있다. 소련의 압박이 심할 당시에도 발트인들은 폭력이나 무기를 사용하지 않고, 이런 노래로 대응했기 때문에, 그들의 혁명은 '노래하는 혁명'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본인이 직접 관람한 바 있는 1998년 리투아니아에서 열린 세계노래대전의 규모는 정말 엄청난 것이었다. 북남미와 전유럽에서 몰려온 리투아니아 교민들과 전 리투아니아 지역에서 국민들이 참가하여 리투아니아 민요로 빌뉴스 전지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잠실 스타디움보다야 많이 못하지만, 그만한 규모의 운동장이 있는 스타디움에서 수 천 명의 '춤꾼'들이 형형색색 색동이 아름다운 민속의상을 입고 함께 추는 '민속춤의 대전', 장대비가 억수같이 내리는 가운데에서도 수 천 명이 한 무대에 모여 화음을 만들어내는 '대합창의 대전'은, 발트3국이 아니면 도저히 만날 수 없는 진기한 구경거리임에 틀림없다.

애석하게도 라트비아와 리투아니아가 같은 해, 같은 달에 노래대전을 개최했기 때문에 두 나라의 행사를 모두 볼 수 없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라트비아는 2002년에 노래대전을 개최할 예정이고, 리투아니아는 사정상 2003년으로 연기했다. 꼭들 가보시길...

들어본 사람들이면 다 알겠지만, 사실 라트비아와 리투아니아의 민요는 곡조면에서 그리 많은 차이가 없어 보인다. 언어는 못 알아들을테니 내용은 둘째치더라도, 특별한 변화가 없이 반복되는 단조로운 멜로디의 곡은 외국인이 듣기에 재미도 없고 화려한 기교도 없어, 누구라도 몇 시간 배우면 다들 하겠군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발트민속음악은 화려한 치장과 변화가 확실히 적다. 단조분위기의 단순한 멜로디가 곡이 끝날 때까지 반복되는 형태를 가지고 있는데, 외국인의 귀로는 지극히 단순하고 재미가 없는 노래들이 대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형태에 대해서 리투아니아의 한 민속학자는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리투아니아 음악에 익숙하지 못한 외국인의 귀에는 지극히 단조로운 멜로디만 들린다. 그 이유는 그 리듬이 정형화 되어 있고, 변화가 없이 흐르기 때문인데, 이것은 리투아니아 민속음악의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이 단조로운 멜로디는 넓고 풍족한 리듬으로, 오래 듣고 있으면 그 깊고 신비한 구조를 느낄 수 있다. 이 멜로디는 수없이 반복되며 마침내 듣는 사람의 귀에 깊게 가라앉아 그 속에서 지배하기 시작한다."

덧붙이는 글 | 필자의 발트3국 정보방에 들러보세요.http://my.netian.com/~perkunas

덧붙이는 글 필자의 발트3국 정보방에 들러보세요.http://my.netian.com/~perkunas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서진석 기자는 십수년간 발트3국과 동유럽에 거주하며 소련 독립 이후 동유럽의 약소국들이 겪고 있는 사회적 문화적 변화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다양한 저술활동을 해오고 있다. 현재는 공식적으로 라트비아 리가에 위치한 라트비아 국립대학교 방문교수로 재직중이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캐나다서 본 한국어 마스크 봉투... "수치스럽다"
  2. 2 100만 해병전우회 "군 통수권" 언급하며 윤 대통령 압박
  3. 3 황석영 작가 "윤 대통령, 차라리 빨리 하야해야"
  4. 4 300만명이 매달 '월급 20만원'을 도둑맞고 있습니다
  5. 5 시속 370km, 한국형 고속철도... '전국 2시간 생활권' 곧 온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