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4일 <오마이뉴스>에는 보기 드문 기사가 올랐다. '공무원은 더 이상 화석이 아니다. 안경률 의원 "진심으로 사과"'가 바로 그것이다.
현직 국회의원(한나라당 안경률)이 기장군청 사회복지과에 자료를 요청한다. 전화를 받은 사회복지과 직원(기장군청 직협 사무국장 김종옥)은 득달같이 자료를 준비해 의원사무실로 달려간다. 그러나 의원은 왜 과장이 직접 오지 않았냐고 호통을 친다. 직원은 출장 중인 과장을 전화로 연결한다. 의원은 과장에게도 역시 폭언을 퍼붓는다. 1라운드의 상황이었다.
김종옥 씨는 고민에 빠진다. 공무원은 국회의원 말 한마디면 죽는시늉까지 해야 하나. 그럴 순 없다고 힘겹게 결론을 내린다. 이틀 후 그는 인터넷 게시판에 자신이 보고 들은 바를 게재한다. 기장군의 많은 공무원과 '부공련'까지 합세해 안 의원을 성토하기에 이른다. 24일 오후 현직 국회의원이 공식 사과와 함께 '재발방지안'을 제출함으로써 2라운드의 막이 내렸다.
아직은 사태의 추이를 더 지켜봐야 하겠다. '부공련'과 기장군 직협에서 내건 조건은 안경률 의원의 '징계와 사퇴'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니저러니 논평할 단계는 아니라고 본다. 이 시점에서 나는 2라운드까지 진행되는 동안 두 사람(김종옥 사무국장과 안경률 의원)이 겪었을 딜레마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한다.
김종옥 씨의 딜레마
김종옥 씨의 고민은 우리 모두의 고민이나 마찬가지였다. 조직에 속해 있든 자영업을 하든, 늘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명제 '정의냐 타협이냐'의 갈림길이었다. 김종옥 씨는 그러한 '타협'의 성격을 강준만 교수의 표현을 빌어 '착한 놈 패러다임'이라 했다. 다분히 한국적 특성인 '좋은 게 좋은 거 아니냐'는 정서에 위배되는 행동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무력함뿐이라는 걸 그도 잘 알고 있었다.
더구나 김종옥 씨는 "부서장님께 어떤 영향을 미칠까, 큰 곤경에 빠지지 않을까" 이런 인간적 고민을 해야 했다. 또 "한 집안의 가장이고, 두 아이의 아버지"인 그가 특히 우려했을 생존의 위협에 대한 갈등도 컸을 것이다. 즉, "10년 공직생활 '최대의 위기'를 겪을지도" 몰랐던 것이다. 이것이 김종옥 씨의 딜레마였다.
안경률 의원의 딜레마
안 의원이 1라운드에서 보여준 행동은, 지금도 도도히 한국사회의 저변을 관통하는 '힘의 논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비록 초선(初選)이지만 나이나 이전 경력 등을 고려할 때, 안 의원 자신의 몸에 배어 있을 '힘의 논리'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면 그는 '도인(道人)'이다. 그의 힘 과시에 면죄부를 주려는 게 아니다. 그만큼 가진 힘이 있는데 남용하지 않기란 '도인'이 아니면 불가능할 정도라는 말이다.
거기까진 늘상 보아온 힘센 자의 전형이었다. 그런데 한겨울에 파리를 보는 것만큼 신기한(?) 일이 벌어진다. 당장 공무원을 요절낼 것처럼 길길이 뛰던 안 의원이 태도를 바꿔 정중한 사과를 하기에 이른 것이다. 안 의원은 무슨 생각을 했던 걸까. 정치인답게 '실리'를 택한 걸까. 사건의 여파가 의외로 거센 것에 대한 '일보후퇴'일까. 그렇더라도 안 의원으로서는 소중한 부분을 잃게 된다. 정치적 '자존심'. 당분간은 억지로라도 겸허하게 지내야 한다. 이것이 안 의원의 딜레마였다.
김종옥 씨는 '정의냐 생존의 위협이냐'는 딜레마에서 정의를 선택했다. 그 옛날 '이문옥' 감사관이 그랬던 것처럼. 그저 '위로부터의 압력'이라면 쩔쩔매기에 바빴던 대다수 공무원들에게 '당당한 대응'의 단초를 제공한 것이다. 물론 모든 공무원이 다 김종옥 씨처럼 행동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제2, 제3의 김종옥 씨가 탄생할 때마다 느리게나마 세상은 변한다고 나는 믿는다. 적어도 누구나 한번쯤 빠질 수 있는 딜레마에서 어떤 모델이 실재한다는 사실은 분명 유익한 일이다. 누가 알겠는가, 김종옥 씨도 결단의 순간에 '이문옥' 감사관을 떠올렸을지. 김종옥 씨와, 더불어 그에게 많은 힘을 실어준 기장군 공무원들과 '부공련'에게 조용하지만 뜨거운 박수를 보낸다.
안경률 의원은 '실리냐 정치적 자존심이냐'는 딜레마에서 실리를 택했다. 물론 그의 인식틀 속에 박혀 있는 '실리'는 아닐 터이다. 일개 공무원에게 꼬리를 내리는 국회의원은 여태껏 없었으니까. 더구나 그가 보여준 '낮은 자세'의 배후에 '윗분'의 의중이 작용하지 않았나 하는 의혹도 제기될 수 있다. 그처럼 그의 변신은 급작스러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에 안 의원이 취한 행동은 여러 모로 신선(?)했다.
해서 나는 안 의원이 저지른 1라운드에서의 횡포는 잠시 잊어도 좋다고 본다. 더더욱 그의 변신을 두고 '정치적 제스처'라 깎아내리고 싶지도 않다. 그것이 '정치적 제스처'일지라도, 여태껏 우리가 보아온 정치인 중 그토록 세련된(?) 제스처를 취한 이가 어디 하나라도 있었던가를 상기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다.
앞서도 말했지만 이 사건은 럭비공처럼 어디로 튈지 예측하기 힘든 상황이다. 안경률 의원이 돌연 사과를 취소할지도, '부공련'과 기장군 직협이 끝끝내 안 의원의 '징계와 사퇴'를 요구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혹은 이대로 마무리될 수도 있을 것이다. 상황이 어떻게 전개되든 나는 2라운드가 끝난 이 시점에서만 보아도 의외로 건진 게 많았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다만 안경률 의원의 '진심'에 대한 진위여부가 여전히 숙제로 남는다. 정말 진심으로 사과한 걸까. 이제부터는 유권자를, 공무원을 '아랫것'으로 취급하던 행태와 진정 결별하려는 걸까. 안경률 의원 그만이 알 일이다. 그리고 진심이라 하더라도 '폭언' 부분만큼은 철저히 죄과를 물어야 하는 건지, 또는 진심이 아니라면 어떤 식으로 더 따끔한 맛을 보여줘야 하는 건지, 이 역시 딜레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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