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눈물 뽑아내는 '자판기'를 아세요?

'언제든 반납' 감언이설 판매..최고장 동원 강제 집행

등록 2001.11.28 14:52수정 2001.12.26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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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저희들은 형편이 어렵습니다. 미용실 집세도 석달을 못주었는데 100만 원을 달라하니 정말 기가 찹니다. 속지 않고 제가 계약을 했다면 당연히 물어야 하는 것도 정한 이치입니다. 물론 제 잘못이 우선이죠. 어리석게 쉽게 그들의 말을 믿은 죄, 그러나 쓰지도 않은 물건을 너무 많은 금액을 요구합니다..."(법률구조공단 상담게시판, 정모 씨)

요즘 세상은 '자동판매기'의 시대다. 커피와 음료수 자판기부터 인형뽑기, 경품타기, 팝콘, 구두닦이에 이르기까지, 골목마다 건물마다 자판기가 없는 곳이 없다.


자판기는 세워만 놓고 재료만 갈아주면 알아서 돈을 '집어먹는 기계'다. 그러나 자판기를 설치한 주인들이 무슨 '떼돈'을 벌겠다는 요량은 아니다. 서민들이 결코 '싼 값'이 아닌 자판기를 가게 모퉁이에 세워두는 것은 어려운 살림에 '푼돈'이라도 만져보기 위한 것이다.

그 자판기가 알아서 돈을 '집어먹고' 있다. 자판기를 찾는 손님에게서가 아니라 설치 '당한' 서민들로부터. 돈을 넣는 서민들에게 '상품' 대신 '눈물'을 뽑아주는 대가다.

'최고장' 받은 붕어빵 장사 엄 씨의 사연

▲엄 씨가 받은 최고장 엄 씨는 원하지도 않았던 '자판기'를 들여놓고 반납을 요구하자 회사로부터 '최고장' 통보만 받았다. ⓒ오마이뉴스 김영균
부산시 동래구 명장동 시장 골목에서 붕어빵 장사를 하는 엄동숙(31) 씨. 가게가 붙은 단칸방에서 남편과 어린 딸을 키우며 어렵게 가정을 꾸려가던 엄 씨는 최근 한 회사로부터 '최고장'을 받았다.

"... 당사에서의 귀하와의 약정에 따라 대금을 일시불 청구하겠으며, 이에 따른 소송비용은 채무자 전액부담이며, 법적 조치의 책임은 귀하께 있음을 엄중히 통고합니다..."


엄 씨는 지난 11월 6일 부산시 진구 개금동 S물산의 O부장이라는 사람에게서 포트리스 상품 자판기와 팝콘 자판기를 임의로 '설치' 당했다.

물론 엄 씨는 그 이전에 자판기를 주문하거나 알아본 적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상당히 당황했다. O씨는 자판기를 가져오자마자 "일단 설치하자"며 자판기를 세웠다. 그리고 엄 씨에게 '감언이설'을 동원해 자판기 설치를 권고했다.


"O부장은 자판기를 세워두고 필요 없을 때는 '언제든지 가져가겠다'며 구두로 수십 번 얘기했습니다. 저도 그 말을 믿었고, 옆에서 들었던 증인도 있습니다. 그러나 막상 자판기 반납을 요청하자 '그럴 수 없다'며 할부금 납부를 요구했죠. 정말 화가 납니다."

엄 씨에 따르면, O부장은 자판기를 먼저 설치해 놓고 계약을 요구해 왔다. 그러면서도 O부장은 엄 씨에게 "언제든지 가져가겠다"는 약속을 수차례 했다. 그러나 정작 엄 씨가 '반납'을 요구하자 "그런 일 없다"며 딱 잡아떼고 있다는 것이다.

당시 엄 씨는 O부장에게 "구입자의 요청이 있을시 (2년 후) 언제든지 15일 정도의 기간을 두고... 가져가기로 합니다"는 자필 계약서를 받았다.

엄 씨에 따르면 원래 자필 계약서에는 '2년 후'라는 문구가 없었다. 그러나 엄 씨가 잠깐 도장을 가지러 간 사이, O부장은 '2년 후'라는 문구를 임의로 써넣었다. 물론 내용이 바뀐 것을 알아채지 못한 엄 씨는 O부장을 믿고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뒤늦게 이를 발견한 엄 씨는 지난 13일 "구입자의 피해 없이 가져간다고 했는데, 이제 와서 말이 다름으로 반품하기를 요구한다"는 내용증명을 해당 회사로 보냈다.

▲임의로 써넣은 '2년 후' 문구 엄 씨에 따르면 계약 당시 O부장이 '2년 후' 문구를 몰래 써넣었다고 한다. ⓒ오마이뉴스 김영균
그러나 S물산은 지난 21일 "약정대로 성실하게 이행하라"는 최고장을 보내고 당장이라도 법 집행에 들어갈 태세다.

해당 계약을 한 O부장은 엄 씨의 주장에 대해 "전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주장하며, S물산 대표인 L씨 역시 "판매 사원이 그런 말을 할 리 없다"며 "법대로 한다"는 입장이다.

엄 씨가 O부장에게 속아서 계약을 했다는 '포트리스 상품' 기계와 '팝콘 기계'는 각각 349만 원과 249만 원, 두 기계를 합쳐 6백만 원 가까이 되는 금액이다. 회사측의 논리대로 한다면 엄 씨는 한 달 할부금과 유지비를 합쳐 30여 만 원을 2년간 꼬박꼬박 지급해야 한다.

눈물 뽑는 '자판기', 서민 피해 속출

현재 엄 씨와 같은 '사기성' 피해를 당한 서민은 전국에 걸쳐 부지기수다. 법률구조공단 상담 게시판에는 그와 같은 억울한 사연을 호소하는 민원이 지난 1년간 30여 건에 이른다. 대부분 자영업을 하는 노인이나 주부들이다.

이처럼 서민 피해가 속출하는 이유는 판매자들이 법의 맹점을 교묘히 이용해 서민들을 속이기 때문이다. 또 자판기를 대주는 곳과 판매망(딜러), 돈을 받는 곳이 서로 달라 책임 소재가 모호한 탓도 있다.

O씨와 같은 자판기 판매업자(딜러)들이 '자판기'를 아무 곳에나 가져가서 무조건 세워두고 전기를 연결시키는 이유는 일단 '설치'만 하고 나면 '반납'이 불가능하게 돼 있는 현행법 구조를 교묘히 악용하기 때문이다.

현행 소비자보호법은 '철회권'을 두고 상품을 구입한 고객이 7일 이내(방문판매의 경우 10일 이내) 반납을 요구할 경우 반납이 가능하도록 돼 있다.

그러나 몇몇 제품에 대해서는 대통령령에 의해 '철회권'이 해당되지 않는다. 뜯어서 물품의 원상회복이 불가능한 카세트 테잎이나 냉장고 등 큰 물품 등이 그것이다. 또 영리를 목적으로 구입한 물품은 방문판매법에 해당되지 않는다. '자판기' 역시 영리를 목적으로 구입한 물품이므로 10일 이내 '반납'도 불가능한 제품으로 규정돼 있다.

실제 법률구조공단 상담게시판에 올라온 글들에는 설치한 다음날의 반납 요구도 거절된 경우도 있으며 심지어 30분만의 '철회' 요구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자판기 판매에 대한 전국적인 피해자들이 속출하고 있다. 지난 1년 사이, 법률구조공단 상담게시판에는 무려 30여 건의 피해 사례가 올라왔다.ⓒ오마이뉴스 김영균
딜러들은 이런 점을 악용해 일단 '설치'부터 하고 온갖 감언이설로 서민들을 속여 계약을 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딜러들은 한 회사에 소속된 '직원'들이 아니다. S물산 L사장은 O부장에 대해 "그 사람들은 자기 사업을 하는 사람들"이라며 "우리에게서 기계를 가져가 알아서 판매한다"고 밝혔다.

따라서 이런 딜러들은 '구두'로는 온갖 약속을 다 하지만, 법률상 빠져나갈 방법으로 완벽한 서류를 갖춰놓고 이득을 챙긴다. 물론 그에 대해서 기계를 공급한 '회사'는 책임지지 않는다.

또 몇 백만 원씩 하는 자판기 대금은 대규모 할부금융회사들이 서민들에게 '빌려주는' 형식으로 돼 있기 때문에, 대금에 대한 '변제'도 칼날같이 가혹하다. 이들 할부금융회사 역시 딜러들의 '사기성' 행위에 대해서는 책임이 없다.

이래저래 '속아서' 자판기를 세운 서민들은 눈물을 삼키며 돈을 내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빠듯한 살림에 '푼돈'이라도 보태기 위해 '자판기'를 받아들인 서민들에게 당장 몇 백만 원이 나올 리 없다. 결국 서민들의 가정에 불화가 일어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내용증명서를 받고 아내에게 '최고증명서'를 보내 왔습니다... 이와 같은 변칙 부당거래가 어찌하여 정당한 거래라고 큰소리 치는지... 본인의 경우뿐만 아니라 차후 재 발생되는 사례가 없도록 강력히 호소드리며 원만한 해결 방안을 부탁드립니다... 가족 모두가 정신적, 육체적 고통이 너무 크고 가정불화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도와주세요. 억울합니다."(법률구조공단 상담게시판, 이 모씨)

엄 씨는 현재 법무사를 통해 '억울한 사연'을 해결하도록 노력하고 있지만, 법률적으로 엄 씨와 같은 사람들이 구제 받는 것은 쉽지 않다. 이미 계약과 관련한 서류들이 완벽하게 넘어가 있기 때문이다. 소비자보호원은 '자동판매기' 피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변한다.

"자동판매기와 같이 영리를 목적으로 구입한 물품의 계약은 <방문판매법>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방문판매 등에 관한 법률 제3조에서는 제조업에 의해 생산된 것이 아닌 농,수,축,임,광산물(1차산물), 의약품, 변호사, 공인회계사, 세무사, 관세사 등의 인적 용역, 소비자 주문에 의해 개별적으로 제조 제공된 상품 또는 용역(시행령 제2조), 상행위 목적으로 한 계약은 제외된다고 되어 있으므로 사업자 대표 앞으로 내용증명을 발송하신 후 소액재판을 청구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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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오마이뉴스 입사 후 사회부, 정치부, 경제부, 편집부를 거쳐 정치팀장, 사회 2팀장으로 일했다. 지난 2006년 군 의료체계 문제점을 고발한 고 노충국 병장 사망 사건 연속 보도로 언론인권재단이 주는 언론인권상 본상, 인터넷기자협회 올해의 보도 대상 등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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