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2001.11.28 15:51수정 2001.11.28 16:40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이번에도 예상대로(?) 그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대통령이 27일 오전 국무회의를 통해 '공직자들의 기강해이를 잘 점검해줄 것'을 내각에 지시했다 한다. 그 소식은 당일 저녁에 TV의 뉴스로도 볼 수 있었다.
나는 전직 공무원이다. 1989년부터 1995년까지 모 시청소속 지방행정직 공무원으로 일했다. 만 6년의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 나는 저 '공직기강확립' 소리를 귀가 닳도록 들어야 했다. 귀만 닳은 게 아니다. '대통령 지시'는 당연히 공문으로도 하달된다.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공무원들은 제목만 쓱 보고 얼른 '공람란'에 도장이나 쿡 찍어버리고 말지만.
한편으로 무척 궁금했었다. 도대체 대통령으로 하여금 그와 같은 지시를 내리게 하는 장본인은 누굴까 하고 말이다. 이제 현직을 떠난 몸이니 마음 놓고(?) 물어봐야겠다. 대통령께 '이제 연말도 다가오고 있으니 공직기강에 관한 지시 하나쯤 내리실 때가…'하고 사뢰는 인물은 대체 누군가? 그는 왜 연말이면 모든 공직자들의 기강이 해이해질 거라 여기는 것인가.
혹 그런 통계라도 있다면 모르겠다. 아니, 혹시 연말에 공직기강이 더 흔들렸다는 통계가 있다면 아마 그건 그런 식의 집중 내지 표적 감찰활동의 결과일 것이다. 즉, 본말이 전도된 거라 이 말이다. 이제 해를 넘기고 '설날'이 가까워오면 또 틀림없이 '명절대비 공직기강 확립'이란 지시가, 대통령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행자부장관 명의로 하달될 테니 기대(?)들 하시라.
이거야말로 구태의연한 발상이요, 지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오히려 연말이 되면 대부분의 공무원들은 이사철의 이삿짐센터 직원만큼 바쁘다. 일선 동사무소만 해도 연말정산용 각종 민원서류를 떼러오는 주민들로 북새통을 이루게 마련이다. 구청이나 시청에선 가능한 해를 넘기지 않고 사업계획을 마무리하느라 야근을 밥먹듯 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대다수 공무원이 그처럼 자기 본분에 매달려 있는데 일부, 그것도 주로 고위직 공무원들의 동태가 염려된다고 해서 낯뜨거운 '공직기강' 운운할 수 있단 말인가. 뉴스를 보다 보니, "이에 따라 사정당국은 … 민원관련 분야를 집중 점검하고 … 일부 공무원들의 정치권 줄대기 및 정치관여 행위, 등을 강도 높게 감찰할 방침"이라고 한다.
그런데 위의 '방침'을 잘 보시라. '정치권 줄대기'나 '정치관여 행위' 따위를 감히 하위직 공무원이 할 수 있다 생각하시는가. 거의 고위직에 해당하는 얘기가 아닌가 말이다. 그리고 말 많고 탈 많은 민원관련 분야만 해도 그렇다. '윗분'도 모르게 해먹을(?) 수 있는 공무원은 정말이지 만에 하나다. 또한 그쯤 되는 인물이면 평소에 수시로 쓱싹 해치우지 여간해선 꼬리를 잡히지 않는 법이다.
물론 나는 그러한 '특별감찰활동'의 순기능을 전면 부정하려는 게 아니다. 범행길에 나선 범죄자가 순찰차를 보곤 발길을 되돌린다는 원리를 적용시키려는 의도도 충분히 이해한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취지라 하더라도 그 지시를 받는 공무원들의 정서 또한 고려해야 한다고 본다. 더 더욱 실생활에서 늘 공무원과 접하는 수많은 일반시민들의 인식도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이다. 정말 눈에 잘 안 띄어서 그렇지 '명예'를 먹고 사는 공무원도 꽤 된다는 사실 또한 잊지 말아야 한다.
군대를 다녀온 분들은 다 아실 것이다. 조금 평온한 세월을 보낸다 싶으면 어김없이 전체 집합을 시켜놓고 '니들, 요즘 군기가 빠졌어!'하며 기합을 주던 고참들을 기억하실 것이다. 그런데 희한한 건 아무리 잘해도 어느 일정 기간이 경과하면 예의 그 '군기'를 또 들먹이며 못살게 굴더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 기합은 잘하든 못하든 치러야 하는 '연례행사'였다. 그런 연례행사를 치르는 사병들은 '더 잘해야겠구나'하는 다짐보단 '에이, 드러워서!'하는 반발심만 싹틀 확률이 더 높다.
마찬가지였다. 공직생활 동안 무슨 때만 되면 각종 회의석상이나 공문 등으로 지겹게 접하는 저 '공직기강확립' 소리가 꼭 군 시절의 그 '군기 빠졌다'는 소리와 하나도 다르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 옛날 못된 고참들이 심심한(?) 김에 졸병이나 괴롭히려 할 때 갖다 붙였던 '이유 아닌 이유'나, 공직자로서 기강이 해이해졌으니 바로잡겠다는 소리나 그 주체의 위상만 다를 뿐 대동소이하다는 느낌은 비단 나만이 가진 건 아닐 것이다.
문제는 그토록 살벌했던 옛날 군대에서도 실지로 군기 빠진 군인은 늘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아무리 공직기강을 부르짖어도 엇박자로 나가는 공무원은 늘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파리는 파리채로 잡아야지 도끼를 들고 설치다간 골동품만 깨기 마련이다. 조용히 내부공문으로, 혹은 '암행감찰'로 다스릴 일을 전국 방방곡곡으로 흘러나가는 전파에 대고 '우리 공무원들은 이렇게 가끔 경종을 울려주지 않으면 큰일난다네!'하면 어쩌란 말인가.
예전에 내가 근무하던 부서의 사무실에 바로 그 '연말 특별감찰반'이 들이닥친 적이 있었다. 때는 오후 1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그 감찰반원은 자리가 비어 있는 직원들의 '출장명령부' 기재여부를 점검하기 시작했다. 세 명이 출장을 달지 않고 자리를 비운 사실이 발견됐다. '건수'로 판단하는 그 감찰반원들에게 우리는 식사를 교대로 하기 때문에 빚어진 현상이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통하지 않았다.
어떻게 됐겠는가. 사정사정해서(그렇게 시간이 경과하다 보니 식사를 마친 직원들이 마침 돌아왔다) 겨우 징계는 면했지만, 이후로 우린 점심시간이면 민원인이 방문하든 말든 모조리 몰려나가 함께 밥을 먹어야 했다. 이런 게 바로 특별감찰의 '역기능'이란 것이다.
내 경험에 비추어 보았을 때 공직기강이란, 그 부서의 장(長)의 기강만 반듯하면 특별한 교육이나 지시 없이도 확립되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렇게 평소에 매만지고 다잡는 기강이 되어야지, 어느 특별한 때라고 군대식 '내무사열' 취하듯 해선 역효과를 초래하고 사기만 떨어뜨린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한다.
아울러 이 기회에 대통령께도 부탁하고 싶다. 혹 앞으로 무슨 때가 되어 주위의 누군가가 '공직기강에 대해 지시 한번 내려주십사' 하는 건의를 올리거든, 서슴지 마시고 YS의 어투를 빌려 이렇게 넌지시 한마디 해주시기 바란다. "씰데없는 소리!"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