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교 회장 엄마는 꼭 한턱 내야 하나?

아이들에게 균등한 기회를

등록 2001.12.09 16:32수정 2001.12.10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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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 중인 교실문을 누가 두드린다. 문을 여니 한 여인이 화장기 없는 얼굴로 꾸벅한다.


"지현이(가명) 엄맙니다. 지현이가 전교 회장이 됐다구요?"
"아, 예."
"어떻게 하면 될까요?"
"뭘 어떻게... "
"남들만큼은 하겠습니다."
2학기 전교 어린이 회장이 된 지현이 어머님이셨다. 전교 어린이 회장 턱을 내겠다는 말씀이다.

10여 년 전에 6학년 담임했을 때 일이다. 지현이는 체격은 자그마하지만 친구들에게 너그럽고 매우 성실한 아이였다. 2학기에 반장이 되었는데 어머니 뜻이라며 전교어린이 회장에는 출마하지 않겠다고 했다. 짐작은 하면서도 이유를 물었다. 회장이 되면 어머니가 돈을 써야 하기 때문에, 집안형편을 잘 아는 아이 스스로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이었다.

나도 그 가정의 형편을 알고 있었기에 마음이 아팠다. 그러면서 열두 살 짜리 아이가 집안 형편 때문에 전교회장 출마를 포기하는 초등학교 현실에 대한 분노가 지현이를 꼭 당선시켜야겠다는 오기로 바뀌었다.

'어머니가 부담 느끼시는 일 없을 것이다'라는 말로 설득하고 소견발표문까지 써주어 지현이를 출마시켰다. 개표가 끝나 당선을 확인하고 교실로 돌아온 아이의 얼굴은 오히려 낙선자의 것이었지만 나는 내가 한자리 한 것 같이 기뻐서 녀석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속 깊은 아이는 어머니에게 전교회장 이야기를 못 꺼냈고 어머니는 며칠이 지나서야 사실을 이웃에게 듣고는 깜짝 놀라 한달음에 수업중인 담임을 찾아 왔던 것이다.

어린 아들의 회장당선 소식을 이웃에게 듣다니, 어떻게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전교회장에 당선된 초등학교 6학년 아이는 집으로 달려가서 대문을 걷어차며 '엄마, 나 전교회장 됐어요'라고 소리쳐야 자연스러웠을텐데...


"아무 걱정 마시고 집으로 가세요. 지현이 때문에 동전 한 개 쓸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혹시 부회장 어머니들이 무슨 말을 하거든 제 핑계를 대세요, 담임이 절대 못하게 한다고."
"그래도 1학기 회장만큼은 해야..."
"안 됩니다. 어머님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좋은 일 하시는 셈치고 어머니가 끊어 주셔야 이제부터라도 집안 형편 때문에 회장출마를 포기하는 아이가 생기지 않습니다."
어머니는 일단 돌아가기는 하지만 편한 얼굴은 아니었다.


그 후에도 부모 형편 살펴서 전교 어린이회장 출마를 포기하는 아이들을 자주 봤다. IMF 때는 더 많은 아이들이 사정상 전교 어린이회장 출마를 포기해서 일간지 사회면을 장식하기도 했으나, 당시 신문은 IMF한파를 얘기했지 돈을 쓰는 일 자체는 문제삼지는 않았었다.


학교 안에서도 '누가 (돈 쓰라고) 시켰냐, 스스로 좋아서 하겠다는데 말릴 거야 없지 않느냐.'라는 견해가 대세였다. 학교 안팎에서 회장 당선되면 돈 좀 쓰는 일을 자연스럽게 여기고 있다는 말이다. 돈 써서 당선하겠다는 것 아니고 당선 후에 한턱 내겠다는 게 뭐가 나쁘냐는 그럴듯한 말도 한다.

전교회장에 당선된 아이 부모는 교사들에게 식사대접이나 학교에 교육용 기재를 기증하는 정도는 생각할 수도 있다. 부모로서 자식 잘되는 것보다 기분 좋은 일은 없을 것이다. 여유 있다면 돈 좀 쓰면서 기분 한 번 더 좋아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 사회에서 법과 원칙에 앞서는 전례·관례를 만들어 가고, 그 때문에 또 다른 아이가 회장 출마를 포기하는 고통을 당할 수 있다는 걸 지현이가 보여주었다.

그 후, 난 내 반 아이가 전교 어린이회 회장단에 당선되면 어머니에게 먼저 전화를 걸어 돈을 쓰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자청해서 전교어린이회 업무를 담당하여 당선자 학부모들에게 돈 쓰면 안 되는 이유를 설명하고 쓰지 못하게 하기도 했으나 쉬운 일은 아니었다. 자기가 쓴 돈이 다른 아이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끝까지 이해 못하는 학부모도 있었고, '잘난 척 하지 마라. 너 혼자 그런다고 세상이 바뀌냐?'고 빈정대는 사람도 있었다.

1학기 전교 어린이회장 선출은 문제가 더 심하다. 상당수의 학교에서 학부모단체 회장은 학생회장 어머니가 맡고 있다. 자청해서 맡는 사람이 없을 경우 전교회장 어머니에게 시선이 쏠리고 어쩔 수 없이 짐을 지는 것이다. 시간이나 경제적으로 여유없는 학부모들은 자기 아이의 1학기 전교 회장 출마를 그래서 더 많이 막는다. 이런 현실에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일까?

자본주의 국가라고 하지만 의무교육기관인 초등학교 안에서는 학부모의 경제력이 아이에게 불공정하게 작용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 우리 아이들에게 좀더 균등한 기회를 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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