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고르라구요?

영화 속의 노년(18) : <원더풀 라이프>

등록 2001.12.11 20:33수정 2001.12.12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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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사람들이 영원의 시간 속으로 가기 전 반드시 들렀다가는 중간역인 림보역. 월요일에 이 곳에 도착하면 누구나 면접관에게서 자신의 지나온 생애 중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하나 골라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것도 수요일까지 골라야 한다.

가장 행복했던 기억 하나를 골라내면 그것을 영상으로 재현해주고, 그것을 보며 그때 그 마음을 그대로 느끼면 비로소 영원의 시간 속으로 떠날 수 있다. 행복한 기억만을 가지고 나머지 기억은 다 잊은 채.


일주일의 시간 동안 끝내 기억해내지 못하면 그대로 림보역에 머무르게 되고, 다른 사람들이 기억해내는 것을 돕는 면접관이 된다.

중년의 아저씨는 전차를 타고 가며 느낀 봄 바람을, 한 젊은 남자는 첫 비행에서 본 빛나던 구름을 기억해내고, 할머니 한 분은 대나무 숲 속에서 어머니가 해주시던 주먹밥을 꼽는다. 여중생은 디즈니랜드를 거쳐 결국에는 귀지를 파주던 엄마에게서 나던 엄마 냄새 그리고 엄마 무릎을 가장 행복한 기억으로 고른다. 얼굴과 나이가 다른 만큼 골라내는 기억 역시 모두 다르다.

그러나 70세에 세상을 떠나 이 곳에 도착한 와타나베 할아버지는 기억을 골라내지 못한다. 특별한 일 없이 평범하게 살아오며 늘 그저 그런 학력에, 그저 그런 직장, 그저 그런 결혼, 그저 그런 퇴직의 길을 걸어왔을 뿐이라 생각한다.

담당 면접관 모치즈키가 1년에 한 개씩, 모두 일흔 한 개의 비디오 테입을 건네주며 행복했던 기억을 찾아보라고 권한다. 놀랍게도 신혼 시절의 비디오 테입 속에 담긴 그의 아내 쿄코는 바로 모치즈키의 약혼녀. 스물 둘에 전사한 모치즈키는 행복했던 기억을 찾지 못해, 살아 있으면 일흔 다섯이 될 나이까지 림보역에 면접관으로 머물러 있는 중이다. 스물 두 살 그대로의 모습을 하고 있는 모치즈키는 와타나베에게 자신이 누구라는 것을 고백하지 못한다.

결국 와타나베 할아버지는 아내와 결혼 40년 만에 처음으로 영화를 보고 나서 나란히 앉았던 공원의 벤치를 고르고, 모치즈키 역시 자신을 기억해준 그 사랑을 기억하며 영원의 시간 속으로 떠나기로 한다. 림보역에서 일하며 모치즈키를 좋아하는 시오리는 그의 선택을 돕는다. 그가 떠날 것을 알면서도.


누군가에게서 잊혀질 것이 두려워 이 곳에 남겠다는 시오리에게, 모치즈키는 그 누군가의 행복의 일부분이었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이제서야 알겠노라고 이야기한다.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하나만 골라야 한다니, 어느 누가 쉽게 고를 수 있을까. 그것도 나머지 모든 기억은 다 잊어버린다는데. 거기다가 또 나의 기억은 그렇다치고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나는 어떤 존재일까 하는 생각이 꼬리를 문다.


와타나베와 쿄코, 모치즈키, 시오리 네 사람의 행복했던 기억은 각기 다르다. 나는 그를 행복으로 기억해도 그의 영상에 나는 없을 수 있는 것처럼.

영화를 보면서 내내 할머니, 할아버지들과 단체로 영화를 관람했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어르신들을 만나보면 저 세상으로 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고 인생의 마지막 언덕에서 마지막 계절을 보내고 있다고 말씀들은 하시지만, 진정 자신의 생을 돌이켜보는 일은 잘 하지 않으시는 것 같다. 이런 영화 한 편을 같이 보고 그런 질문을 던져 본다면 참 좋겠다. 노인복지관이나 노인대학에서 단체 관람을 원할 경우 영화 관람료도 좀 깎아주고 말이다.

사람이 사람을 온전하게 다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늘 조바심내며 종종 걸음을 걷는다. 확인하고 확인 받으려고. 내가 누군가의 행복의 일부분이라도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할까. 그래서 사랑은 늘 손 안에 움켜 쥐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해주는 것인가. 상대의 기억 속에 내가 있을지 없을지 그것으로부터도 자유로워져야 하듯이.

멀리 갈 것도 없이 지금 여기서 한 번 골라 보자. 지금까지의 인생 중 가장 행복했던 기억 한 가지만. 그럼 사랑에 대해 좀 너그러워질까. 사람에 대해 좀 너그러워질까.

(원더풀 라이프 7Days After Life / 감독 코레에다 히로카즈 / 출연 아라타, 오다 에리카, 나이토 타카시, 카가와 쿄코, 테라지마 스스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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