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태안문학>을 만드는 이유 ④

<반딧불의 소명>

등록 2001.12.21 14:28수정 2001.12.21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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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단하기 전해부터 고장에서 문학회를 만들어 고장 정신문화의 토양을 가꾸기 위해 헌신 봉사해 온 20여 년 동안 꽤 많은 문재(文才)들을 발굴했다고 자부합니다.

내가 고장에서 문학지들을 만들지 않았으면 그냥 별 볼일없이 흙 속에 묻혀 있을지도 모를 문재들이 속속 발굴되어 나름껏 자신의 정신세계와 기량을 발휘하며 지방문단을 풍미할 수가 있었던 거지요.

중앙에서(또는 전국적으로)이름을 날리는 문인들만 우수한 문인인 것은 아니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문화의 중앙집중·집권적 형태 속에서 문학권력이나 상업주의의 촉수가 미치지 않는 변방에 위치하고 있는 탓으로 명성을 키우지 못했을 뿐이지, 지방문학지 속에서나마 자신의 출중한 정신세계와 기량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는 문인들도 많다는 것을 나는 확신합니다.

아무튼 나는 과거의 흙빛문학에서처럼 오늘의 태안문학에서도 출중한 문재들을 많이 발굴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글을 쓰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 더욱 많아지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자신의 생각과 삶을 진솔하게 글로 표현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사회는 그만큼 더욱 역동적이며 정직성과 투명성을 많이 확보해 갈 수 있으리라는 소박한 믿음을 버리고 싶지 않습니다.

태안문학은 1998년의 창간호에서는 '우리 고장에서의 동학혁명의 모습'이라는 이름의 '대특집'을 꾸민 바 있습니다. 그리고 1999년의 제2집에서는 '우리 고장의 일제 시대의 모습'이라는 이름으로 또 한번의 대특집을 꾸민 바 있습니다.

그 후로 '우리 고장의 6.25'를 특집으로 다룰 계획을 세우고 자료 수집까지 해 놓았으나 워낙 미묘한 사항이라 계속 신중을 기하고 있지만, 미구에 성사가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밖에도 우리는 여러 가지 특집들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 지역의 황금어장이었던 천수만 상실 관련 특집, 1991년 정부의 '안면도 핵폐기물처분장 설치계획 발표'에 따라 수년 동안 치열하게 전개되었던 안면도 주민들의 '반핵항쟁' 관련 특집 등이 우선적으로 우리의 계획에 올라 있습니다.

그리고 이 시대의 최대의 명제가 되어야 할 '통일 논의'에 좀더 실질적으로 접근해 가기 위한 방책으로 '우리 고장의 이북 실향민 실태'를 특집으로 다뤄볼 예정입니다. 우리 지역의 이북 실향민 거주 분포와 함께 그들이 겪어온 삶의 애환과 오늘의 소망 등을 다각도로 조망해 보는 것도 통일 논의의 확산 차원에서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으로 확신합니다.

나는, 내가 나고 자랐고 지금도 살고 있는 내 고향 태안을 사랑합니다. 내 고향 태안이 참으로 아름답고 살기 좋은 고장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 소망의 구체적 표현의 하나가 '태안문학'을 하는 것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태안문학이 태안 땅 정신문화의 향취를 위해, 그리고 사람살이의 품성과 덕목과 온갖 아름다운 것들을 추구하기 위해 존재하며 노력하는 문학예술 단체임을 스스로 확신합니다.

그리하여 태안문학이 진정으로 태안의 양심, 태안의 향기, 태안의 수준, 태안의 자존심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태안의 상징물들인 백화산의 정기, 백제의 미소(마애삼존불), 소나무의 기상, 동백꽃의 몸짓, 갯바람을 타는 갈매기의 비상 같은 것들을 폭넓게 포유하고 발양하며 힘차게 구체화시키는 문예지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텔레비전에서는 또 한바탕 진승현 게이트에 관한 보도가 나오고 있군요. '뇌물'에 관한 얘기도 들리는데, '금액'을 듣는 순간엔 또 한번 기가 죽고 맥이 풀리는 것을 체감합니다. 그들이 사는 모습에 비한다면 나는 너무 작고 초라하고 꾀죄죄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책 한번 만드는데 소요되는 고작 4,5백만 원의 돈을 마련하기 위해 때로는 전전긍긍하며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는 것이, 2년 동안 2천만원 정도 겨우 모아가고 있는 후원회비를 놓고 기고 만장하는 것이나 아닌지 모를 내 품새 따위가 이상한 비애를 안겨 주는 것도 같습니다.

세상이 저 돈 많은 사람들과 높은 벼슬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더욱 혼탁해지고 있음을 다시 한번 실감하면서 새삼스럽게 문인으로서의 내 작은 삶의 의미를 생각해 봅니다. 문단의 변방에서 애써 만들어 내고 있는 태안문학의 존재 가치에 대한 의문도 다시 한번 가져봅니다.

지금 당장 어떤 해답을 스스로 얻을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존재 가치에 대한 의문은 그 의문 자체로서 중요하다는 모호한 생각 따위나 내 의식의 언저리를 배회할 뿐…. 별수 없이 지난여름의 태안문학 제6집(2001년 상반기호)에 썼던 '권두 에세이'의 한 부분을 다시 읽어보면서 나 자신을 위안하기로 했습니다.

'외로운 반딧불의 소명'이라고 제목한 그 글의 후반 부분을 여러분께 소개하는 것으로 이 긴 글을 마치겠습니다. 읽어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하며….

덧붙이는 글 | 태안문학 제6집(2001년 상반기호) 권두 에세이 「외로운 반딧불의 소명」후반부    

전파 시대의 복판에서 순수문학이 날로 위축되고 있는 현상을 겪으면서, 그리고 사람들의 심성을 더욱 교활하고 사납고 거칠게 만들어 가고 있는 인터넷 세상의 부박함을 겪으면서 '고민'의 몫을 다시 한번 생각해 봅니다. 오늘의 현상들 속에서 고민의 몫을 담당해야 할 것은 역시 순수문학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람들의 관심이 전파와 인터넷 쪽으로 쏠리다보니 '태안문학'에 참여하여 종이 책에 글을 쓰고자 하는 젊은이들을 찾는 일이 참으로 어렵습니다. 어쩌다 참여하는 젊은이들은 요즘 젊은이들의 특성대로 진지함도, 책임감도, 예의도 없습니다. 더구나 태안이라는 동네의 규모가 크지 않다 보니 다부진 심성을 지닌 문학청년을 만나기가 더욱 어려운 것 같습니다.
 
이런 현실 때문에 우리가 감당해야 할 고민의 몫은 더욱 버겁기만 합니다. 아직은 우리가 안고 가야 할 그 고민에 대한 인식만 분명할 뿐 그 고민을 해결할 방도는 참으로 묘연합니다. 과연 타개나 해결이 궁극적으로 가능한 것일지도 의문입니다. 

그렇지만, 현재로서는 그 고민에 대한 투철한 인식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고민에 대한 인식만이라도 우리 태안문학 공동체가 바르고 투철하고 분명하게 지녀야 한다는 생각이지요. 

언젠가 한 번은 아내와 함께 으스름 달밤에 군민체육관 쪽으로 산책을 하다가 뜻밖에도 반딧불을 보았습니다. 아내는 탄성을 질렀고, 나는 그 순간 이상한 감격 때문에 숨이 막힐  것 같았습니다.

우리는 아이들을 데리고 나오지 않은 것을 후회하였습니다. 아이들에게 반딧불을 보여 주고 싶은 마음, 보여 주지 못하는 아쉬움이 참으로 극명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한 마리 반딧불이 몹시도 외로워 보였습니다. 어쩌면 짝을 찾는 몸짓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데, 과연 짝을 찾게 될지 의문이었습니다.
 
부박해져 버린 자연 환경 속에서 반딧불을 한 마리라도 볼 수 있다는 게 신기하게 느껴졌고, 그 반딧불의 외로운 처지가 안타깝게도 느껴졌고, 그 외로운 반딧불의 짝이 어딘가에는 있을 것이라는 희망적인 생각도 들었고, 그 외로운 반딧불의 짝이 어딘가에는 반드시 있어야 하고 또 있게 해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왠지 내 마음을 비장하게 하는 생각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나는 우리 태안문학을 생각했습니다. 우리 태안문학이 한 마리 반딧불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부박한 환경 속에서의 외로운 처지도, 전깃불 세상에서 한결 미약하고 초라할 수밖에 없는 작은 몸체의 그 푸르스름한 빛도….
 
그러나 반딧불의 그 작은 몸체에서 스스로 발광하는 그 빛은 그야말로 자력의 빛이고 생명의 빛이었습니다. 그리고 수백만 년 이어오는 빛이고, 향토의 정취와 동화의 세계를 가능케 하는 빛이었습니다.
 
우리 주변에서 아직 반딧불이 멸종되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고, 절대로 반딧불이 멸종하는 환경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다시 할 수 있었고, 비록 반딧불을 찾아 나서지는 않더라도 어느 날 밤 우연히 반딧불을 보게 되면 내 아내처럼 탄성을 지르거나 나처럼 숨막히는 감격을 누리는 사람들도 이 세상 어딘가에는 있을 거라는 생각도 할 수 있었습니다.
 
아무리 전깃불이 대낮처럼 휘황한 문명 세상이라 하더라도 반딧불이 없는 세상이라면, 조물주의 창조 질서가 유지되는 세상일까요? 인간이 온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일까요?

아무리 전파와 인터넷이 지배하는 세상이라고 하더라도, 종이 책과 순수문학이 멸종되는 사태가 과연 가능할까요? 순수문학이 멸종되는 세상이라면, 반딧불이 멸종된 세상과 어떻게 다를까요?

전파 시대와 인터넷 세상에서 태안문학이 비록 외롭고 초라하고 미약한 존재일지라도, 부박한 환경 속의 저 반딧불처럼 생명의 빛, 자력의 빛을 끝내 잃지만 않는다면, 저 반딧불과  같은 존재일 수만 있다면―우리에게도 존재 가치에 대한 희망은 늘 살아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한사코 추구해야 할 것은 저 반딧불의 질긴 생명력입니다. 우리 스스로 저 반딧불이 되고자 하는 슬픈 노력과 열정입니다. 

(2001년 5월을 보내며)

덧붙이는 글 태안문학 제6집(2001년 상반기호) 권두 에세이 「외로운 반딧불의 소명」후반부    

전파 시대의 복판에서 순수문학이 날로 위축되고 있는 현상을 겪으면서, 그리고 사람들의 심성을 더욱 교활하고 사납고 거칠게 만들어 가고 있는 인터넷 세상의 부박함을 겪으면서 '고민'의 몫을 다시 한번 생각해 봅니다. 오늘의 현상들 속에서 고민의 몫을 담당해야 할 것은 역시 순수문학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람들의 관심이 전파와 인터넷 쪽으로 쏠리다보니 '태안문학'에 참여하여 종이 책에 글을 쓰고자 하는 젊은이들을 찾는 일이 참으로 어렵습니다. 어쩌다 참여하는 젊은이들은 요즘 젊은이들의 특성대로 진지함도, 책임감도, 예의도 없습니다. 더구나 태안이라는 동네의 규모가 크지 않다 보니 다부진 심성을 지닌 문학청년을 만나기가 더욱 어려운 것 같습니다.
 
이런 현실 때문에 우리가 감당해야 할 고민의 몫은 더욱 버겁기만 합니다. 아직은 우리가 안고 가야 할 그 고민에 대한 인식만 분명할 뿐 그 고민을 해결할 방도는 참으로 묘연합니다. 과연 타개나 해결이 궁극적으로 가능한 것일지도 의문입니다. 

그렇지만, 현재로서는 그 고민에 대한 투철한 인식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고민에 대한 인식만이라도 우리 태안문학 공동체가 바르고 투철하고 분명하게 지녀야 한다는 생각이지요. 

언젠가 한 번은 아내와 함께 으스름 달밤에 군민체육관 쪽으로 산책을 하다가 뜻밖에도 반딧불을 보았습니다. 아내는 탄성을 질렀고, 나는 그 순간 이상한 감격 때문에 숨이 막힐  것 같았습니다.

우리는 아이들을 데리고 나오지 않은 것을 후회하였습니다. 아이들에게 반딧불을 보여 주고 싶은 마음, 보여 주지 못하는 아쉬움이 참으로 극명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한 마리 반딧불이 몹시도 외로워 보였습니다. 어쩌면 짝을 찾는 몸짓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데, 과연 짝을 찾게 될지 의문이었습니다.
 
부박해져 버린 자연 환경 속에서 반딧불을 한 마리라도 볼 수 있다는 게 신기하게 느껴졌고, 그 반딧불의 외로운 처지가 안타깝게도 느껴졌고, 그 외로운 반딧불의 짝이 어딘가에는 있을 것이라는 희망적인 생각도 들었고, 그 외로운 반딧불의 짝이 어딘가에는 반드시 있어야 하고 또 있게 해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왠지 내 마음을 비장하게 하는 생각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나는 우리 태안문학을 생각했습니다. 우리 태안문학이 한 마리 반딧불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부박한 환경 속에서의 외로운 처지도, 전깃불 세상에서 한결 미약하고 초라할 수밖에 없는 작은 몸체의 그 푸르스름한 빛도….
 
그러나 반딧불의 그 작은 몸체에서 스스로 발광하는 그 빛은 그야말로 자력의 빛이고 생명의 빛이었습니다. 그리고 수백만 년 이어오는 빛이고, 향토의 정취와 동화의 세계를 가능케 하는 빛이었습니다.
 
우리 주변에서 아직 반딧불이 멸종되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고, 절대로 반딧불이 멸종하는 환경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다시 할 수 있었고, 비록 반딧불을 찾아 나서지는 않더라도 어느 날 밤 우연히 반딧불을 보게 되면 내 아내처럼 탄성을 지르거나 나처럼 숨막히는 감격을 누리는 사람들도 이 세상 어딘가에는 있을 거라는 생각도 할 수 있었습니다.
 
아무리 전깃불이 대낮처럼 휘황한 문명 세상이라 하더라도 반딧불이 없는 세상이라면, 조물주의 창조 질서가 유지되는 세상일까요? 인간이 온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일까요?

아무리 전파와 인터넷이 지배하는 세상이라고 하더라도, 종이 책과 순수문학이 멸종되는 사태가 과연 가능할까요? 순수문학이 멸종되는 세상이라면, 반딧불이 멸종된 세상과 어떻게 다를까요?

전파 시대와 인터넷 세상에서 태안문학이 비록 외롭고 초라하고 미약한 존재일지라도, 부박한 환경 속의 저 반딧불처럼 생명의 빛, 자력의 빛을 끝내 잃지만 않는다면, 저 반딧불과  같은 존재일 수만 있다면―우리에게도 존재 가치에 대한 희망은 늘 살아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한사코 추구해야 할 것은 저 반딧불의 질긴 생명력입니다. 우리 스스로 저 반딧불이 되고자 하는 슬픈 노력과 열정입니다. 

(2001년 5월을 보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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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태안 출생. 198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추상의 늪」이, <소설문학>지 신인상에 단편 「정려문」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옴. 지금까지 120여 편의 중.단편소설을 발표했고, 주요 작품집으로 장편 『신화 잠들다』,『인간의 늪』,『회색정글』, 『검은 미로의 하얀 날개』(전3권), 『죄와 사랑』, 『향수』가 있고, 2012년 목적시집 『불씨』를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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