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입국할 수 없습니다"

리투아니아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 3

등록 2001.12.27 16:32수정 2001.12.27 2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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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어떤지 모르지만, 동유럽의 경우 외국인이 비자문제를 해결하러 외국인사무소에 가는 날은 정말 단단한 각오를 해야한다. 외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업무이지만, 영어를 제대로 하는 경우도 드물고, 그리고 그들의 나라를 방문한 외국인들을 그냥 '일감'으로 보는 모양인지 말투도 퉁명스럽고, 필요한 설명을 해주지 않고 무성의하게 넘어가는 경우도 많다.

그리고 날마다 변해서 헛갈리는 업무시간, 서서 기다려야하는 긴 줄과 별 중요한 일도 아닌 것을 가지고 트집 잡고 몇 번씩 왔다갔다 하게 만드는 업무형태가 사람을 정말 피곤하게 만든다.

1999년 여름, 비자를 받으러 카우나스 외국인사무소에 갈 때에도 그런 사실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빌뉴스에서 비자를 받은 적은 있어서 그 분위기에 제법 익숙해져 있었지만, 카우나스의 외국인사무소는 처음이라 그 긴장감이 더 하는 것 같았다.

말을 천천히 해야지, 뭘 물어보면 일단 웃어줘야지 그리고 기다리게 하더라도 짜증내지 말아야지 등등 다짐에 다짐을 거듭하며 외국인사무소에 들어갔는데.

걱정 하나는 준 듯했다. 일단 줄이 없었다. 중국사람,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문 앞에 줄을 길게 만들어 서있던 빌뉴스하고는 분위기가 정말 달랐다. 그리고 일하고 있던 여직원들의 복장이 비교적 자유스러웠다. 거무스름하게 태운 피부에 분홍색 원피스, 그리고 유난히 붉은 립스틱. 그 립스틱 짙게 바른 여직원 중 한 명이 나의 비자업무를 맡아서 진행하게 되었다.

사진 한 장, 여권 확인 그리고 빠짐 없이 기록된 비자 신청서를 들이민 후 어디서 돈 내고 언제 찾으러 오라는 말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내 여권을 가만히 살펴본 여직원의 대답은 상당히 뜻밖이었다.

"당신은 리투아니아 내무부법을 어겼습니다.! 벌금을 낸 후 당장 리투아니아를 떠나세요!"

마침 '법을 어기다'라는 단어를 알고 있었으므로,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정확히 알아듣기는 했지만, 사람은 단어를 알아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렇게 헤매고 있는 사이 리투아니아어로 빠르게 쏟아지는 그 직원의 답변,
"한국인은 리투아니아에서 비자 없이 15일 이상은 있을 수 없는데 왜 겨우 지금 비자를 받으러 온거에요?"
"저 온지 15일 안됐는데요......"
"무슨 소리에요, 당신은 여기서 무비자로 체류한 기간이 20일이 넘어요!!"

유럽에서 한국인이 무비자로 있는 경우 일반적으로 3개월인 경우가 많다. 그 3개월이란 것이 마지막으로 국경을 넘은 날로부터 계산하여 3개월이다.

예를 들어 폴란드의 경우 무비자 기간이 3개월이지만, 그 3개월이 다 지나기 전에 국경을 접하고 있는 독일, 체코, 슬로바키아 등의 국경을 잠깐 넘어 출국과 입국 도장을 받게 되면, 그 날짜로부터 아무 문제없이 다시 3개월을 체류할 수 있다. '일반적'인 사실을 '진리'로 자주 착각하는 것이 사람인가. 그 일반적인 상식에 리투아니아를 끼워맞추려니 오류가 생겼는가 보다.

"한국인은 '1년 전체' 체류기간이 15일을 넘지 못한단 말예요."
국경을 몇 번을 넘더라고 아무 상관이 없이 일년동안 15일만 비자 없이 체류할 수 있는 게 이 나라의 법이었다. 그러니 그렇게 생고생을 하여 이루어낸 발티카 행사에 초청 받아서 머문 기간 일주일, 카우나스에서 머문 13일, 그리고 그 해 초 논문문제로 빌뉴스에 머문 이틀, 전부 합하면 22일. 누가 봐도 나는 내무부 법을 어긴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납부하라고 우기는 벌금의 금액은 카우나스에서 머무르려고 준비한 체류비용을 다 털어도 막지 못할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다.

리투아니아에 처음 오기로 작정했을 때 잠시 찾아간 서울의 리투아니아 명예총영사관에서는, 한국인의 체류기간이 15일이라고만 했지, 1년간 15일이란 사실은 들어본 바가 없었다. 그리고 이전까지는 그 해 최초 입국일로부터 15일 안에 비자를 신청하러 갔었으므로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것이다.

빌뉴스에서 10년 이상을 거주하신 한국분은 물론이고, 카우나스 비타우타스 대학교의 관계자들도 그 '일년간' 15일 체류사실은 처음 듣는 사실이라고 방방 뛰었지만, 확인해 본 결과 외국인비자법 관계 자료 귀퉁이에 조그맣게 그런 사실이 적혀 있었다.

그 소식을 듣고 당장 외국인사무소에 나타난 대학관계자들은 내가 리투아니아에서 장사를 하는 장사치가 아니라 카우나스에서 정식으로 공부하는 학생이라는 증거를 모두 모아 나를 변호해 주었다. 그때 내가 그들로부터 '정상참작'이란 단어를 처음 배웠다. 내 재학증명서, 어학연수를 신청하면서 바르샤바에서 보낸 그 편지들과, 카우나스 비타우타스 대학교의 총장 탄원서까지 전부 접수가 되었지만, 아무리 몰라서 지은 죄라 해도 국정법을 어긴 것이 사실이므로 비자 대신 여권 맨 앞 장에 '리투아니아를 몇 월 몇 일까지 떠나야 한다'는 내무부 도장을 찍어주고 말았다.

대학교 관계자들의 도움으로 체류일자는 다행히 그 어학연수가 끝나는 마지막날까지 연장되었고, 비교적 낮은 '죄질'임을 참작하여 벌금도 가장 낮은 금액으로 책정되었다. 그런 이유로 나는 학교에서 마련해준 공식작별파티에 참여하지 못하고 최종체류허용일자인 8월20일, 혹시나 이 버스가 늑장을 부리다가 국경을 밤12시 이후에 넘지는 않을까 걱정을 하며 버스에 올랐다.

억울한 사연은 단지 이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카우나스 외국인사무소에서는, 이번엔 비록 '추방'을 당하지만 가까운 리투아니아 공관에서 비자를 정식으로 신청하면 문제없이 리투아니아에 들어올 수 있을 것이라 했었다.

2000년 1월 한국에서 단체여행을 준비하고자 발트3국을 방문하는 한국인들과 연락이 되어 그들과 함께 리투아니아에서 에스토니아까지 함께 여행지 답사를 준비하게 되었다. 카우나스에서 들은 그 이야기를 굳게 믿고, 비자를 받기 위해 나는 바르샤바에 있는 리투아니아 영사관을 찾아갔다. 비자로 문제가 생긴 것은 작년이야기가 돼버렸으니 문제가 없으리라고 생각을 했다.

역시 처음엔 문제가 없었다. 사진, 여권, 신청서를 제출하고 언제 찾으러 오라는 말을 듣고, 약속된 그 날짜에 여권을 받으러 영사관에 찾아갔다. 그리고 그날 리투아니아 영사는 빈 여권을 돌려주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당신은 올 여름 리투아니아 외국인 비자법을 어겼으므로, 2000년 10월까지 리투아니아 입국금지조치가 내려졌습니다."

비자 신청시 만약 비자 신청이 기각될 경우에도 비자발급비용으로 제출한 돈을 환급받지 못한다는 구절에 사인을 했던 터라, 비자발급비용으로 납부한 40달러의 돈도 그냥 잃어버리는 순간이었다. 추방 당한 것도 서러운데, 입국금지까지 시키다니, 대체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덧붙이는 글 | 필자의 발트3국에 대한 홈페이지 http://my.netian.com/~perkunas

덧붙이는 글 필자의 발트3국에 대한 홈페이지 http://my.netian.com/~perkun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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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석 기자는 십수년간 발트3국과 동유럽에 거주하며 소련 독립 이후 동유럽의 약소국들이 겪고 있는 사회적 문화적 변화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다양한 저술활동을 해오고 있다. 현재는 공식적으로 라트비아 리가에 위치한 라트비아 국립대학교 방문교수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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