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뜨거운 물세례'를 받고

한 가장의 생활 반성문

등록 2001.12.27 22:22수정 2001.12.28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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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우리 집사람이 제 앞에서 큰 실수를 했습니다. 팔팔 끓인 물을 들고 오다가 넘어져 밥상머리에 앉아 있는 내 아랫도리에 그만 확 쏟아버리고 말았습니다.

저의 집은 오래된 집인 데다가 난방도 허술해서 겨울이면 유난히 춥습니다. 게다가 저는 체내에 지방질이 적은 사람이라 유독 추위를 많이 타는 관계로 아내는 매일 아침 숭늉을 팔팔 끊여 내오는 게 관례가 되었지요.

아내는 오늘따라 성급하게 서두르다가 -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기온이 차가운 관계로 끓인 물이 조금이라도 식어 미지근하게 되면 잔소릴 들어야 하거든요.(남편 시집살이) - 넘어져 그 물 사발을 내 아랫도리에 쏟아부어버린 것입니다. 다행히 '그 지역'은 비껴서 허벅지에 엎질렀습니다.

"아얏 뜨것!"
외마디 비명 소리와 함께 마치 개구리 도약하듯 나는 팔짝 뛰었지요. 이때 당황한 아내의 표정을 나는 무어라 필설로 형언키 어렵습니다. 벌겋게 데인 허벅지를 걷어부치고 앉아 있는 사람. 그 폭발력이 강할 것으로 예상되는 핀잔을 미리 두려워하면서 "많이 데이지는 않았어유?" 조심스레 묻는 아내에게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화상(火傷) 정도랄 수는 없고, 정신이 바짝 드는 정도였으므로 얼마든지 침묵으로 관용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저는 오늘 아침에 일어난 이 사소한 일을 예사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개인적으로 중대한 의미가 있는 하나의 사건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한 해 이것으로 액땜하는구나! 싶어서가 아닙니다. 아내의 느닷없는 '온수 세례'는 어리석은 나 자신을 다시금 돌아보게 하는 좋은 계기가 되었습니다.

불교에서는 과보(果報)라고 하던가요. 내가 올 한해 무언가 잘못한 게 많아 저 선량한 아내가 이 식전 아침에 뜨거운 물사발을 엎어버린 거라고 단정했습니다. 저는요, 아침신문에 게재되는 '재미로 보는 오늘의 운세'도 거의 믿는 사람이에요. 맞으면 좋고, 안 맞아도 서운하지 않은 일진이지만, 하루를 지내면서 신변에 무슨 일이 생기면 괜히 그와 연관지어 생각해보려고 하거든요. 그런 강박관념도 일종의 병이니, 고쳐야 한다고 다짐하면서도 이미 오래 전부터 길들여진 습성이라 이젠 그냥 살지요.

어쨌거나, 아내가 뜻하지 않은 온수 세례로 정신이 바짝 들도록 내게 자극을 준 것은 틀림없이 저 세상에 계신 부모님의 어떤 계시가 있었거나, 전지전능하신 어느 성자가 한 번 따끔하게 혼내주도록 일부러 지시하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나의 잘못이 대체 무엇인지, 한 번쯤 짚고 넘어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나의 반성 항목(또는 마음에 걸리는 항목)


① 남들이 유리 상자처럼 보고 있는 개인 홈페이지에 글을 쓰면서(혹은 지면에 원고를 쓰면서) 혹여 교만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았는가?

② 인간적으로 매우 허술하고 정신적으로는 부실한 지식을 가진 사람이, 또한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사람이 그걸 카무플라주 (camouflage)하기 위해 때로는 정직하지도 못한 말을 하고 스스로를 위장한 적은 없는가?

③ 저 세상 부모님을 마음 속으로는 늘 생각하면서 실제로 그 분들의 생전의 가르침(형제간 우애, 건강 돌봄, 가정화목)을 얼마나 성실히 지켰나?

④ 자식에게는 잔소리하면서 나 자신은 언행(言行)에 있어서 얼마나 모범적이고, 성실했나?

⑤ 알게 모르게 나의 말 한마디로 마음 아프게 해 준 사람이 없는지 하루도 빠짐없이 성찰하였는가?

⑥ 남에게 대접받고 무엇이라도 갚았나?(마음으로 진 빚은 잊지 않고 기억이나 하는가?)

⑦ 나의 욕심 때문에 남(또는 가족)에게 피해를 준 일은 없는가?

⑧ 뭇 사람들의 가슴 아픈 실수와 불미스런 뉴스를 보면서, 하늘이 무너지는 그 가족들의 입장을 한 번쯤 깊이 생각하고, 나는 얼마나 깊은 고뇌를 하였던가?

⑨ 고등학교 다니는 둘째 아이가 1천 원어치 미만의 라면이나 떡볶이로 점심과 저녁을 때우면서 밤늦도록 공부하고 있을 때, 나는 5천 원(때로는 그 이상)짜리 밥을 사먹으면서 목에 조금이라도 걸려 본 적은 있는가?


…이렇게 나열하고 보니, 나를 점검할 수 있는 항목이 의외로 너무나 많고, 항목 별로 체크해 보니, 그야말로 마음에 걸리는 게 한 둘이 아닙니다. 그러니 한 해가 저무는 이 시점에서 아내의 뜨거운 물 세례야말로 당연한 '과보'요, '잘코사니'가 아니겠습니까! 아랫도리의 더 중요한(?) 부분을 데지 않은 것만도 크게 봐 준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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