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평 남짓 '쪽방'도 그들에겐 안식처

[르포] 대구 칠성시장 주변 쪽방을 가다

등록 2001.12.28 03:23수정 2004.11.21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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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우(가명. 50) 씨가 선뜻 자신의 방을 보여줬다. 냉장고와 TV가 갖추어진 김 씨의 방은 이곳에선 그나마 나은 방에 속한다. ⓒ오마이뉴스 이승욱
바깥 세상은 환한 대낮이다.

하지만 파란 철문을 지나 건물 안으로 들어서면 깜깜한 내부를 살피기엔 백열등 불빛도 별 소용이 없었다.

용기를 내 발을 내딛어봐도 폭 40cm가 채 넘을까 말까한 통로는 이내 사람의 움직임을 둔하게 만든다. 무엇보다 코끝을 자극하는 지린내는 낯선 방문객의 발걸음을 머뭇거리게 한다.

백열등 불빛만 비추는 도심속 '동굴'

마치 동굴이 연상됐다. '인간이 사는 동굴'. 하지만 그곳은 우리와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도시의 한 복판을 꿰차고 들어선 일명 '쪽방'이 그곳이다.

국어사전에서 '쪽방'이라는 말은 없다. 대충 '쪽'이라 하면 '매우 작다'는 의미로 단어에 쓰인다. 지난 1월 '대구쪽방상담소'(대표 한재흥 목사)가 펴낸 <대구지역 쪽방 실태 보고서>에 따르면 '쪽방'이란..."일세 혹은 월세의 형태로 운영되면서 방안에 개별 취사, 세면, 용변 등의 기초적인 부대시설이 없는 방에 독신 혹은 가족이 일용직 등의 이동이 강한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이용하는 저렴한 거주 공간"이다.

쪽방 건물 내 비좁은 통로 ⓒ오마이뉴스 이승욱
지금이야 쪽방이 사람들의 귀에 익숙해졌지만 이 단어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지난 97년 IMF 한파를 탔을 때였다. 실직자들이 거리를 헤매고, 가족 해체가 급속도로 진행되면서 도시 '최빈곤층'이 양산됐다. 그리고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사람들에게 쪽방은 최후의 안식처였다.

주로 인력시장이 인접한 곳과 역 주변에 몰려 있는 쪽방은 판잣집에서부터 과거 사창가·여인숙으로 쓰이던 2-3층 건물까지 다양한 형태를 보이고 있다.

이곳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대게 일용 노동자와 '앵벌이', 독거 노인이 대다수를 차지하며 하루 평균 5000원을 내거나 한달 10∼15만 원을 지불하고 잠자리를 해결한다.

쪽방의 기원을 찾아보는 것은 쉽지 않다. 최근까지 빈민지역으로만 분류돼 사회적인 관심을 크게 받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쪽방이 산업화와 도시화로 인한 '산물'이라는 점에는 이론이 거의 없다.

쪽방이 모여 있는 칠성시장 주변 한 골목 ⓒ오마이뉴스 이승욱
현재 전국에 쪽방은 서울 돈의동과 부산, 대전 등에 산재해 있다. 대구 지역의 경우에는 대구역, 칠성시장, 동대구역, 달성공원 주변 등으로 흩어져 있다.

하지만 대구에 형성된 쪽방은 300가구 이상 대단위로 형성된 타 지역과는 달리 4∼5개 건물이 모여 있는 소규모 형태를 보이고 있다. 현재까지 대략 파악되고 있는 쪽방은 대구에만 1700여 개, 거주자는 900명 선을 웃도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지난 25일 성탄절로 '요란스럽던' 날. 대구 칠성시장 주변 쪽방을 찾았다. 상가를 이리저리 헤치고 들어가 한 가게 건물 뒤로 난 좁은 길을 통과해 쪽방 건물로 들어섰다. 담 너머로 경부선 기차의 굉음이 울려온다. 쪽방이 들어선 건물은 시멘트로 지어져 판자와 슬레이트가 지붕으로 덮여져 있었다. 그곳에 대략 2,3m 간격으로 쪽방들이 줄을 서고 있었다.

쪽방 입구에 걸려진 먼지 쌓인 문패 하나

그곳에서 몸이 불편한 듯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기는 박기춘(가명. 71) 씨를 만났다. 낯선 방문객이 반가운 듯 인사를 건네는 그를 따라 그의 '쪽방'을 찾았다. 박씨가 기거하는 쪽방 안으로 들어설 때쯤 유독 눈길을 끄는 물건(?)이 하나 있었다.

ⓒ오마이뉴스 이승욱
'박. 기. 춘'이라는 이름 석자가 한자로 쓰여진 문패.

방 입구 왼쪽에 단정히 매달려 있는 문패는 세월의 깊이를 이야기하듯 먼지가 뽀얗게 묻어나고 있었다. 서너 평이 채 안 될 듯 좁은 방이지만 그에게 있어 이 공간은 어느 누구의 집보다 소중한 것이다.

몸을 깊게 웅크리고 조그만 문을 통과하고서야 그의 방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옷장 하나와 텔레비전 등 몇 안되는 살림살이가 빼곡해 장정 3명이 그대로 앉으면 더 들어올 것도 없을 만큼 좁았다.

경남 김해가 고향인 박씨는 한국전쟁 참전 당시 부상을 입은 후 거동이 불편한 장애인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부인이 노점으로 한 잔에 500원짜리 커피를 팔아가며 번 돈으로 겨우 생계를 끌어간다는 박씨. 그의 가족이 궁금해졌다.

"아들내미 하나 있재. 지 살기도 바쁘니깐 돌봐줄 여력이 있나. 그 놈도 쪽방 생활 못 벗어난기라..." 박씨의 말꼬리가 흐려졌다. 대물림의 고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쪽방 생활에 목이 메였으리라.

기자와 동행한 대구쪽방상담소 간사에게 생활비 보조에 대해 캐묻던 박씨는 "참전용사라고 상장 하나 주더니만 별 소식이 없더라 아이가. 내 죽고 나면 뭐라도 나올라나. 허허..."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40년 쪽방 생활..."젊어 보이려 머리염색해도 일자리가 없다"

박씨가 사는 쪽방 인근에서 만난 두 번째 인물은 김기태(가명. 58) 씨. 김 씨를 찾아 그의 방에 들어섰을 때는 방바닥의 냉기가 그대로 느껴졌다.

"얼마 전에 보일러가 고장났어요. 고치지도 못하고 있는데... 그래도 이불 덮어쓰고 잠자면 추운지는 잘 몰라요." 김 씨는 방바닥의 냉기를 막으려 깔아놓은 스티로폼이 그래도 추위를 잊게 해준다는 말을 곁들였다.

14살 되던 해 불어닥친 태풍으로 부모를 모두 잃었다는 김 씨의 인생사는 '굴곡' 그 자체였다. 부모를 잃은 후 형은 먼 친척집에 이발 기술을 배우러 떠나고, 동생은 보육원에 맡겨졌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은 이곳 대구로 '흘러' 들어왔다. 그렇게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그리고 40년 쪽방살이는 시작된다.

쪽방 거주자들은 대부분 각종 질병으로 시달리고 있다. ⓒ오마이뉴스 이승욱
"대구로 와서 바로 여기 칠성동으로 들어왔어요. 군대 갔다오고 난 후에는 안 해본 일이 없어요. 부산에서 파주까지 철도 공사하면서 잡일도 많이 했어요. 내가 경부선 만들었던 일등공신 아닙니까."(웃음)

산업화 역군으로 젊은 시절을 공사판에서 보낸 그의 세상살이는 거칠어진 두 손에 고스란히 남겨져 있었다. 하지만 이제 김 씨는 예전처럼 제대로 일할 수 없는 형편이다. 99년 앓았던 간질환이 더욱 심해졌기 때문이다. 당시 두 달 동안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았다는 김 씨는 지금도 약을 입에서 떼지 못했다.

그런데도 김 씨는 요즘 아침에는 라면을, 점심은 떡국으로 식사를 해결한다고 한다. 그래도 밥이 먹고 싶으면 가끔 보건소로 가기도 한다.

김 씨가 병을 앓고 있다는 이유로 일을 포기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나이가 너무 들면 일을 시켜 주지도 않아요. 그래서 얼마 전에 젊어 보이려고 머리를 까맣게 염색했는데... 다행이 일자리를 찾았는데, 공사판에서 청소하고 삽질하는 일을 했어요. 그런데 그것도 한 이틀 하니깐 일자리가 더 없대요. 지금은 도움만으로 살고 있어요."

"누가 이렇게 살지 알았습니까"...조용히 살다 죽는 게 소원인 삶

김 씨의 경우처럼 쪽방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거의 모두 한 가지 병을 몸에 지녔다. 공사판을 전전하는 일용 노동자의 생활과 노숙을 경험하기도 했던 이들은 입에서 술을 떼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각종 사고로 인해 장애를 앓고 있는 경우도 부지기수이다.

서울올림픽이 있었던 지난 88년 교통사고를 당하고 쪽방 거주자로 살아가는 오영화(가명. 45) 씨의 경우도 여기에 해당한다. 지난 26일 그를 찾았을 때 그는 전파가 잘 잡히지도 않아 '지글대는' TV 앞에 있었다.

취재 도중 우연히 알게 된 한 장애인의 쪽방 입구-그는 2주 전 홀로 이곳에서 숨졌다. ⓒ오마이뉴스 이승욱
사고가 난 후에 보상금 800만 원을 모두 치료비와 생활비로 쓰고 빈손이 된 오 씨는 '하루를 살아가는 것 자체가 고통'이라며 침통해 했다. "교통사고 나서 다리가 이 지경이 되면서 걷지도 못하는데 일을 어떻게 합니까. 요즘은 길거리 돌아다니면서 동냥하는 게 다인데... 며칠 사이 추위 때문에 몸이 아파 밖에 나갈 엄두도 못내요. 그냥 남들한테 피해 안주고 조용히 살다 죽는 게 원입니다."

과거를 묻는 질문에는 한 동안 말문을 닫고 있던 오 씨가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대구 D고등학교 졸업하고 큰 롤러장 감독도 하고, 미군부대에서 근무도 하고 제대로 살았죠. 근데 사고 당하고 오갈 때 없어지고, 의지했던 어머니마저 돌아가시니깐 사는 게 이래 됐습니다. 내가 이렇게 살 줄이야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오 씨의 눈가에 눈물이 언뜻 비쳤다.

사고로 다친 다리 때문에 비가 오고 추운 날씨엔 허리까지 고통이 전해온다는 오 씨는 병원에라도 가려면 119 구조대원들에 의지해야 할 만큼 어려운 신세다. 오 씨는 하루 5000원을 내는 1평짜리 방 하나도 지킬 수 있을지 불안한 하루를 보내고 있다.

'쪽방살이'를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주민등록증이 말소된 경우가 허다하다고 한다. 오 씨의 경우에도 주민등록이 말소된 상태로 십여 년을 '무적자'로 살아왔다. 주민등록이 말소된 경우에는 국민기초생활보장법에 따라 각종 혜택을 받을 수 없고 각종 공공근로 사업 등에도 참여할 수 없다.

대구쪽방상담소는 이러한 '무적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주민등록을 다시 갱신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 주민등록 말소에는 약 10만원의 벌금이 부과되기 때문에,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지원이 필요하다.

하지만, 무엇보다 걱정인 것은 최빈곤층으로 살아가는 이들에게 '바람막이' 역할을 해주는 이 쪽방이 도시계획에 의해 철거돼 사라지는 것이다.

산업화 결과로 잉태된 최빈곤층의 안식처. 하지만 '쪽방도 위태롭다'

쪽방이 들어선 건물의 골목 ⓒ오마이뉴스 이승욱
"쪽방 문제가 공론화된 기간이 아직 길지 않기 때문에 철거 문제가 대두되지는 않고 있다. 쪽방이 대중에게 더 많이 알려졌을 때 쪽방의 개선보다는 철거쪽으로 기울까 우려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대구쪽방상담소 허영철 실장의 말이다.

허 실장은 "쪽방 문제의 근원적인 해결을 위해서는 철거를 통해 시외에 집단 시설을 짓겠다는 식의 발상은 안 된다. 어차피 도시 속에 살아가야 하는 그들에겐 이것은 아무런 실효 없는 정책"이라고 지적했다.

또한 "근본적인 대책은 시설의 개선과 주변 주민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고, 6.7% 밖에 되지 않는 복지예산을 충분히 늘리겠다는 정부의 복지정책에 대한 의지에 달려 있다"고 덧붙였다.

물론 쪽방을 바라보는 일반인들의 시각 변화가 전제돼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대구쪽방상담소 장민철 간사는 의미 있는 말을 들려줬다.

하늘 아래 그곳에 '쪽방'도 있었다. ⓒ오마이뉴스 이승욱
"저도 처음 일을 시작할 때는 몰랐습니다. 우리 가까운 곳에 이렇게 생활을 하고 계신 분들이 있다는 것 말이죠.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이 '게을러서 그렇다'는 인식을 하는 것 같아요. 하지만 무능력한 것은 인정할 수 있어도 이들의 삶을 당연시하는 것은 문제가 있어요. 우리 모두도 이런 사회 속에서는 언제 '쪽방살이' 인생으로 전락할지 모른다는 시각부터 가져야 합니다."

쪽방 앞에 걸린 문패가 인상적이었던 박 노인과, 순진한 웃음을 지으며 반겼던 김 씨 아저씨, 언제 쓰러질 듯 병약한 오 씨... '쪽방살이' 인생 그들도 우리와 가까운 인생들은 아닐는지.

"걸레 같은 이 방에 선생님들 앉게 하는 것만 해도 죄송합니다"는 오 씨의 서글픈 말을 들으며 쪽방을 나섰다.

쪽방에도 서서히 어둠이 깔리고 '위태로워' 보이는 쪽방의 하루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에필로그

지난 25, 26일 이틀간의 쪽방 취재는 '진지한' 고민에 빠지는 시간이었다. 

우연히 듣게 된 쪽방의 현황은 연말을 맞아 자연스럽게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기도록 했다.

처음 계획은 '쪽방'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희망'에 더 주목하고 싶었다. 물론 그 희망을 찾기는 어렵겠지만 '분명'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누구도 비좁은 쪽방을 자신의 안식처로 간직하고 싶지는 않겠지, 그곳을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는 그들을 희망이라 볼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이틀간의 취재가 짧았던 탓인지 그 희망을 만날 수는 없었다. 아마 아직 그들에게 희망을 '섣불리' 묻기엔 시간이 이른 것 같다. 

내년 이맘 때쯤 다시 찾게 될 그곳에서는 희망을 만나기 위해 노력해봐야겠다. 그리고 그곳에서 '흔하게' 만나는 희망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든다.

덧붙이는 글 에필로그

지난 25, 26일 이틀간의 쪽방 취재는 '진지한' 고민에 빠지는 시간이었다. 

우연히 듣게 된 쪽방의 현황은 연말을 맞아 자연스럽게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기도록 했다.

처음 계획은 '쪽방'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희망'에 더 주목하고 싶었다. 물론 그 희망을 찾기는 어렵겠지만 '분명'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누구도 비좁은 쪽방을 자신의 안식처로 간직하고 싶지는 않겠지, 그곳을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는 그들을 희망이라 볼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이틀간의 취재가 짧았던 탓인지 그 희망을 만날 수는 없었다. 아마 아직 그들에게 희망을 '섣불리' 묻기엔 시간이 이른 것 같다. 

내년 이맘 때쯤 다시 찾게 될 그곳에서는 희망을 만나기 위해 노력해봐야겠다. 그리고 그곳에서 '흔하게' 만나는 희망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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