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숲과 바람이 들려준 이야기

[서평] 김영하 < 아랑은 왜 >를 읽고

등록 2001.12.28 09:49수정 2001.12.29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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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 동안 겨울은 온기를 품어내는 또 다른 겨울이고 싶어했다. 맵찬 바람에 그 옛날 겨울밤을 떠올렸다. 겨울 바람에 온 몸을 맡기고 혼신을 다해 서로 비벼대는 소리, 그 소리에 나르시스즘에 빠지는 숲이 있다. 대숲이다. 그들은 바람속에서 생명을 잉태할 사랑을 나눠온 지 오래다. 온 마을이 대숲으로 가득한 나의 고향에서 그것을 알았다. 특히 겨울 바람은 대나무에게 사랑의 힘을 더 크게 발휘하게 한다는 것을….

고향에서의 사철이 아름다웠던 것은 대숲과 바람이 들려준 이야기 덕분이었다. 대문없는 시골집들은 이 대숲에서 새어나온 바람소리로 울타리를 삼았다. 바람이 대나무 울을 넘나들었기에 벗들과 울없는 우리가 될 수 있었다. 마을 위 천수답 곁을 지키던 저수지가 홍수로 터진다 해도 우리네 마을은 쉽게 휩쓸리거나 떠내려가지 않을 거라는 믿음도 집을 보듬고 마을을 둘러친 대숲이 심어준 생각이었다. ´아랑의 전설´도 그 무렵, 대숲과 바람이 들려준 이야기 가운데 하나이다. 시간을 뛰어넘은 아랑의 발자국 소리는 마을 꼬맹이들의 새가슴을 들썩이게 했고 더러는 어두운 대밭만 보아도 눈물을 그렁거리며 가까이 가지 못했다.

여름 정자와 겨울 회관은 마을의 소문난 재담꾼 미자의 공연장이었다. 미자의 이야기에 귀 기울였던 관객들의 절반은 또래의 동무들이었고 절반은 노인들이었다. 연전에 미자에게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던 마을 노인들이 도리어 관객이 되어 뻔히 알고 있었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던 데에는 까닭이 있었다. 여름에 들려줬던 아랑전설이 겨울에는 달리 들렸다. 회관에서 노인들에게 들려줬던 이야기와 우리들의 아지트 너럭바위에서 들려준 이야기가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갈 무렵, 미자는 동무들을 데리고 이야기 속으로 들어갔다. 두려움을 반쯤 접고 텅 빈 사당에서 벌인 우리들의 연극은 설화의 비현실적 요소를 현실로 옮겨 왔다.


우리 나름의 아랑 이야기- 긴 머리의 미자는 귀신 아랑 역을, 뚜렷한 이목구비와 굵은 목의 영수는 아랑의 한 풀던 이상사 역을, 장난꾸러기 종서는 아랑을 겁탈한 관노의 역을 …, 동생을 업고 다니던 은주는 유모 역을… 그리고 한 번쯤 배역을 따내고픈 마을 아이들이 관객이 되었다. 대숲에서 죽은 아랑 전설과 우리들의 목소리를 바람이 꽁꽁 묶어두고 있었다.

<아랑은 왜>는 어린 시절의 추억과 겹쳐지면서 내 눈길을 끌었다. 그의 대개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경쾌함과 흥미로움'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작가 김영하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꿈꾸며 존재의 가벼움조차 아예 초월하고자 하는 봄날의 아지랑이였다. 즉 그의 글쓰기 작업은 이런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관습화된 어떤 이야기의 구조나 스타일을 거부하는 그만의 소설 쓰기가 내 가슴을 헤집고 들어오는 이유는 한없이 가벼워지고 싶은 어떤 경쾌함 때문, 그것이 아닐까?

이 작품에서 그가 선택한 글쓰기 방식과 설화모티프는 신선했다. 사실 소설을 읽어 가면서 의심스러운 구석은 한 둘이 아니었다. ´이거 소설 맞아? 자작평까지 곁들여서 문학평론가 노릇을 하겠다는 작가의 또 다른 심보?, 독자들을 끌어 들여 이야기를 꾸미겠다고? 현대적 인물인 '박과 영주'의 이야기와 '아랑 전설'을 교차시키고 있는 이유는 또 뭔가? '설화' 자체에 주목할 듯 서두에서 모든 것을 밝히고 있는 작가의 의도는 또 뭐란 말인가? 그러나 설화에 집착하지 않고 설화의 사건을 추리적 기법으로 다시 만들어 내고 있는 의도는?´ 이러한 궁금증은 문턱도 없는 현대와 과거의 시간과 공간 속에 우리를 끌어들이면서 간혹 환상에 젖게도 하고 내 사유체계를 아예 뒤흔들어 버리기도 하였다. 독자인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그 수법은 건방지기까지 했던 것이다.

내 어깨를 툭툭 건드리며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괜찮겠수?" 하고 묻는 투의 어조는 독자의 의견을 받아 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태도였다. 말하자면 작가의 작품 분석 및 여러 인물, 소재 설정에 독자가 동참하기를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난 독자로서 이야기를 따라가 보기로 작심하고 낯선 그의 수법에 인내심을 발휘하기로 했다.

꿈에 나타난 ´아랑의 말´에 힘입어 글을 쓰게 된 글 속의 화자, 그리고 여러 책 속에 소개된 ´아랑형 전설´의 다양한 판본, 앞으로 어떻게 이야기를 펼쳐갈 것인가를 서두에서 ´친절하게´ 설명하는 태도, 어쩌면 너무 뻔한 얘기가 돼버릴 가능성 때문에 독자로 하여 어떤 흥미조차 앗아가 버릴 듯한 아낌없는 정보들. 그래서 작가는 글쓰는 동기에서 이야기의 전개방식까지 미리 실토해버리는 실수(?)를 범한다.

작가는 ´아랑 전설´을 말하기 위해 나비 연구가 김정환의 ´아랑은 큰줄흰나비였을 가능성이 크다´라는 견해를 끌어 들인다. ´아랑이 흰 나비로 환생해 원수를 갚았다는 음력사월 보름은 큰줄흰나비가 남부 지방에 나타나는 시기, 흰 꽃잎을 닮아 여리디 여린 것이 한을 품고 죽은 처녀의 이미지를 연상시키게도 생겼다´는 김정환의 추정은 작가가 독자들에게 이 전설의 존재를 수긍하기를 바라는 의미에서 제시한 것이기도 하다. 작가는 기존의 아랑전설에서 틈을 발견하고자 한다.

작가는 말한다. ´세상 모든 이야기에는 어떤 틈이 있다. 이 틈이야말로 이야기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를 짐작할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단서다.´라고. 따라서 아랑 전설에서 여러 가지 틈을 발견해내는 일이 이 소설에서 중요한 단서임을 알 수 있다.

작가는 계층과 계급에 따라 서로 다른 판본이 존재하는 아랑 전설의 틈찾기 작업에 들어가고 이 틈을 통해 새로운 이야기가 만들어질 수 있음을 예고한다.

´다 아는 이야기를 다르게 말하기´ 위하여 아랑 전설의 사건을 누구의 입장에서 볼 것인지-아랑의 입장, 신임부사의 입장, 관노 통인의 입장, 유모의 입장 등-를 결정해야만 한다.

작가가 선택한 판본은 이러하다. ´밀양 고을에 새로 부임하는 사또들이 줄줄이 죽는다, 용감한 사내가 자원하여 사또로 부임한다, 사내는 귀신을 만나 사연을 듣는다, 사내는 범인을 찾아내 응징한다.´가 가장 흡인력 있다고 판단한 작가는 이 전설에서 발견한 틈을 빌어 새로이 ´아랑 전설´을 만들기 위해 작가 자신은 물론 두 명의 ´민담 윤색가´를 설정한다. 작가는 이 민담윤색가들에게 조롱당할 준비가 다 돼 있는 사람처럼 이야기의 전개를 아예 ´박´과 김억균에게 넘겨준다.

작가는 어사 수행원인 종 8품 의금부 낭관 김억균을 ´아랑 전설´이 떠도는 밀양고을에 파견한다. 그리고 그는 탐정이 되어 ´아랑 전설´이 탄생할 수밖에 없는 그 단초를 찾아내는 데 온갖 추리를 동원한다. 김억균의 수색은 빈틈 없고 철저하게 펼쳐지기에 그를 ´명석한 탐정´ 으로 여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부임한 사또의 잇달은 죽음과 아랑의 원한을 풀어 준 이상사의 부임 이후 밀양 고을에 평화가 왔다는 아랑 전설을 뒤집으려는 김억균의 지혜로운 수색은 결국 이상사의 말 한마디에 반전되고 만다.

´아랑은 왜 흰줄나비가 되어 나타났는가, 왜 붉은 깃발로 죄인의 이름을 밝히고 있는가, 아랑이 왜 고목나무 속에 칼 꽂힌 채 쳐박혀 있었는가, 왜 죽은 채 북 속에 넣어져 있었는가, 아니면 아랑은 왜 죽었는가.´라는 단순한 질문에 대한 답 찾기가 아니다. ´아랑은 왜 우리 가슴 속에 하나의 욕망으로 살아날 수밖에 없는가´에 대한 하나의 시도일 따름이다. 그 시도의 하나가 김억균을 탐정으로 만들고 또 다른 아랑 전설의 틈을 제공하는 일이다. ´박´과 영주의 이야기 속에서 아랑이면서 영주, 영주이면서 아랑으로 환생할 수 있다는 것. 그래서 나비 박제를 파는, 스스로를 아랑이라 주장하는 여자 아이를 현실과 꿈에서 각각 만나는 장면을 통해 이 이야기가 아랑 전설을 토대로 현실과 환상을 넘나들게 될 것임을 예고했다.

아랑의 원한을 풀어 주었기에 밀양 고을에서 영웅이 된 이상사와 그에 얽힌 ´아랑 전설´에 김억균은 이 떠도는 소문에 의문을 제기한다. ´정말 전임 부사들은 아랑의 원한을 풀어 주지 못했기에 죽었는가?, 이상사는 진정 아랑의 한 풀이에 기여했는가? 밀양 고을 내의 행정업무 소홀, 속임수에 의한 업무 보고는 모두 아전들의 비리 속에 이루어 졌다는 것이다. 밀양고을은 국둔전에 큰 영향을 주는 저수지를 갖고 있었는데, 이를 소홀히 하거나 제방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아전들은 즉시 삭탈관직되고 그들의 가문도 모두 망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 민감한 아전들은 그의 행정업무 소홀함을 감추기 위해 즉, 제방을 쌓는 동안 새로 부임한 감사들을 잇달아 죽게 했다는 것이다. 그 제반 상황을 해결해 줄 뭔가가 필요했는데 그것이 ´아랑의 전설´이었다. 이는 ´탐정´ 김억균의 그럴 듯한 논리였다. 이상사와 아전들과의 암거래, 이상사는 아랑의 원한을 풀어 줌으로써 밀양 고을의 영웅이 되는 것이었고, 아전들은 그들의 잘못을 감추기 위해 전임부사의 살인사건을 아랑의 원귀에 그 원인을 돌리는 것이었다. 김억균은 기존의 아랑 전설을 합리적으로 뒤엎어 또 다른 아랑 전설을 만들어 낸다.

따라서 이상사의 ´아랑의 전설´은 있지도 않은 이야기가 되고 김억균의 탐문 작업으로 만들어진 ´아랑 전설´은 그럴 듯한 힘을 가진다. 그러나 철저히 작가 김영하의 지시 아래 이행된 김억균의 수색 작업은 결국 이상사의 말 한마디에 깡그리 짓밟히고 만다. 이 지점에서 이 작품의 유쾌한 반전. 즉, 김억균은 자신의 수색작업이 어사 조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상사에게 묻는다. "부사님, 정말 아랑이 부사님 부임 첫날 밤에 나타났습니까? 흰 나비로 환생하여 죄인을 알려 주던가요?"라고. 그러나 이부사는 "그렇게 궁금해 하는 자네에게도 곧 아랑이 나타나겠구먼. 내 어찌 아랑에 대해 안다 모른다 말할 수 있겠는가"하고 재치있게 딴전을 피운다. 이는 곧 탐정 김억균이 치밀하게 엮어 온 재담(수색작업)이 결국 이상사의 ´재담´에 조롱당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다시 말하면 작가 김영하는 이러한 인물 설정으로 하여 살인 사건을 조사하는 형사나 추리 소설에 투입된 탐정들의 역할에 주목하고자 한 것이 아니다. 그는 사건의 실체를 밝히는 게 목적이 아니라 ´아랑 전설´의 재구성은 지속될 것이라는 점과 어느 누구도 설화를 재구성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그래서 ´아랑 전설´의 반전과 비틀기는 또 다른 재담꾼에 의해 윤색돼야 하고 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완성된 ´아랑 전설´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몇 가지 점에서 작가 김영하의 재기발랄함과 이 작품에 대한 호평을 아끼고 싶지 않다.

먼저 끝임없이 독자의 동참을 요구하는 서술자, 서술방식이다. 서술자 자신의 판단을 유보하고 이야기의 방향을 요구한다. 그래서 서술자는 ´나´도 ´작가´도 아닌 ´우리´라는 공동 서술자가 된다. 결국 독자와 서술자의 동행으로 또 하나의 소설이 탄생한다.

´설화 다시 쓰기´라는 말로 고쳐 생각해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꼭 그렇지만은 않다. 소설 속에 설화를 개입시키는, 또는 설화 속에 소설을 개입시키는 방식 안에 자작평 내지 독자와 함께 하는 작품 분석이 개입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설화를 다시 쓰되 소설도 다시 써서 또 다른 형태의 글쓰기를 시도하고 있다.

이점에서 두 번째 특징을 끌어 낼 수 있다. 말하자면 기존의 ´서사 구조의 틀깨기´이다. 전근대적 서사 구조인 설화의 틀도 깨고 근대적 양식으로서 소설 구조도 비틀어 버리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소설도 설화도 될 수 있으나 될 수 없기도 한 이야기이다. 특히 이야기 서두 및 중간 중간에 개입한 자작평 및 이야기의 방향 전환을 위한 독자에게 말걸기(질문하기) 방식은 희곡에서 방백에 가까운 목소리 아니던가. 즉 김영하는 이 방식을 통해 기존의 서사구조를 과감하게 탈피한다. 그러나 이러한 탈피들은 처음부터 설정된 것이 아니다.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이야기 상황 및 방향이 설정된다. 서술자 ´우리´는 공모자가 되어 이야기를 만들어 가지만 지속 정도와 결말을 전혀 예측할 수 없다. 이 또한 기존의 서사 구조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야기의 진행 속에서 작가 또는 서술자가 임의로 이야기를 바꿀 채비를 하거나 바꿔 버린다는 것은 독자를 우롱하는 일이며, 이야기에 대한 신뢰성을 잃기가 쉽다. 작가는 이야기 구조 자체를 흔들어 버림과 동시에 독자들을 혼란에 빠뜨리고 있다.

아랑 전설의 전모를 파헤치려는 또 다른 아랑 전설의 재구성자 김억균 그리고 그의 재담, 박과 영주의 관계를 펼쳐가는 현대의 이야기, 독자를 끌어 들인 작가의 작품 분석 및 평가는 삼각관계를 이루며 <아랑은 왜>라는 하나의 이야기를 제공한다. 즉 이들은 각각 공존하면서 하나의 이야기로 재구성되고 있다.

작가는 현대와 과거를 넘나들면서 현대나 과거 그 어디에도 묶여 있지 않은 또 다른 공간으로의 이동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소설도 설화도 아닌 또 다른 이야기 판을 벌이고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작가는 결을 내리지 않는다.
또 다른 재담가의 목시여 영원히 채워질 수 없는 곳이다. 이는 우리의 삶이 계속되듯 이야기가 지속될 수 밖에 없음을 말한 것이리라. 따라서 이야기가 이야기를 만들고 이야기는 만들어질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닌다.

그의 재기발랄함은 전설의 소설적 변용을 꾀하면서 색다른 ´아랑 전설´로 둔갑시킨 데서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작업에 추리적 기법과 환상적 묘미가 곁들어 지면서 아랑은 영주로 환생하고 영주는 아랑으로 환생한다. 이리하여 작가는 더 무성하고 다양해질 ´아랑 전설´의 또 다른 판본을 구성해낸다. 이렇게 탄생한 새 판본 아랑 전설인 <아랑은 왜>에 독자들은 환상을 갖게 된다. 따라서 아랑의 죽음과 환생은 우리들의 욕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또한 ´아랑전설´속에 휩싸여 진정 어떤 진실도 말할 수 없고 볼 수 없는 영원한 미궁 속으로 빠져들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작가는 어느새 산 너머 무지개가 되어 있고 우리는 무지개 쫓는 소년처럼 무지개를 향해 걸을 수밖에 없다. 여전히 작가는 왜곡된 ´조선왕조실록´과 실제 존재하지도 않은 ´정옥낭자전´을 거머쥐고 진실인양 우리 독자를 조롱할테니 말이다. 우리는 작가에게 완벽하게 속았지만 작가는 우리를 속이지 않았다. 그것이 이야기꾼의 진실이기에 그렇다. 따라서 우리 독자가 생각하는 작가의 속임수는 영원해야 하며, 이는 세상을 흥미진진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이미 틀 지어진 이야기에 대한 틈새 발견하기, 딴전 피우기, 비틀어 보기, 딴지 걸기는 소설가의 운명이자 민담·윤색가의 운명 아니던가. 이 운명적 소임을 다하고 있는 자가 김영하이다.

김영하의 작품이 여느 작가와는 다른 ´가벼움´과 ´유쾌함´이 자리하고 있음을 이 <아랑은 왜>를 통해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순간들이었다. 그러나 내가 말하고픈 이 가볍고 유쾌함은 쉽게 그리고 빠르게 읽혀지면서 흥미진진하다는 것이다. 김영하 말의 가벼움과 유쾌함이다. 따라서 아무나 가벼워질 수 있는 그런 성향의 ´가벼움´이 아니다. 가벼워질 줄 아는 자만이 ´가벼움´에 대해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시대에 몸담고 살아가는 작가로서 그는 항간에 떠도는 ´경박스러워져 가는 세상´ 에 한 술 더 떠 ´경박스러움´을 말하고 싶었는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경박스러움의 몸짓은 냉소적이기까지 하지 않은가. 비웃음과 야유로 진지함을 뒤집어 보고싶은 그 끝없는 욕망과 몸부림, 그는 조금씩 그것들을 비틀고 있었다. 그래서 김영하는 말하고 싶었으리라. "나는 소설과 설화를, 세상의 모든 것을 파괴할 권리가 있다"라고. 그러나 그가 진정 말하고 싶은 파괴란 파괴를 위한 파괴가 아니라 ´새로움´에 대한 도전으로서의 파괴이다. ´잘빚은 항아리´를 꿈꾸는 자들에게 항아리의 파편과 금간 자국을 어루는 작업이 도공의 魂心을 일깨운다는 것을 작가는 일러준다.

전근대를 넘어 근대를 살고 있다고 자부하는 우리, 사실 우리는 근대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근대에서 소외된 채 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 김영하는 <아랑은 왜>를 통해 탈근대로의 탈주를 서슴지 않고 감행하고 있었다. 이것은 어디서든지 새로이 시작할 수 있고 어디서든지 변이할 수 있는 자만이, 그리고 자유분방한 상상력의 소유자만이 할 수 있는 도전이다. 그가 김영하이다. <아랑은 왜>는 이를 잘 드러내 준 작품이었다.

대숲과 바람이 들려준 이야기를 맛있게 윤색하던 미자의 모습과 아랑을 겁탈한 관노역의 종서가 겁탈이 아니라 사랑이었노라 항변하던 모습을 김영하에게서 찾을 수 있었다. 오늘밤에도 아랑의 발자국 소리가 대숲에서 바람을 안고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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