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납치된다, 경찰에 신고해라"

삼성노동자가 딸에게 보낸 긴급 문자메시지

등록 2001.12.29 18:00수정 2001.12.31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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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로부터 '납치'를 당했다고 주장하는 최영주 씨 ⓒ오마이뉴스 김영균

삼성의 '무노조 원칙'은 노동자들 사이에서 악명이 높다. '무노조 원칙'을 지키기 위한 삼성 회사의 '협박'과 '회유'도 마찬가지로 악명이 높다. 그 '협박'과 '회유'의 한 방법으로 특히 삼성에서 공공연하게 벌어지는 일이 '면담'이다.

그러나 퇴근을 준비하던 한 노동자가 회사 간부들에 의해 사흘 동안 억류되어 가족들에게 연락도 못하고 집으로도 돌아가지 못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면담'이 아니다. 더구나 삼성의 노동자들이 주장하는 대로 '다쳤으니 집으로 보내달라'고 애원하는 노동자를 폭행까지 했다면 그것은 일종의 '납치'다.

지난 22일(토) 오후 3시. 울산에 사는 여중생 최아무개(15) 양은 갑작스런 문자메시지를 하나 받았다. "아빠 납치된다 정XX 김XX 빨리 경찰에 신고해라." 최영주(38) 씨가 딸 최 양에게 보낸 다급한 '구원 요청'의 메시지였다.

그날 엄마와 함께 아빠를 기다리던 최 양은 문자메시지를 받고 큰 충격을 받았다. 마침 핸드폰 전원도 나간 터라 더 이상의 연락은 할 수 없었다. 최 양은 눈물을 쏟으며 아빠를 찾았고, 당황한 가족들과 직장 동료들은 백방으로 수소문하다 급기야 경찰에 '납치' 신고를 했다.

그로부터 이틀 뒤, 가족들은 겨우 그의 연락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하루가 더 지나 집에 돌아오지 못한 지 사흘만에, 삼성SDI 노동자 최 씨는 양다리와 허리에 큰 부상을 입고 만신창이가 된 모습으로 겨우 가족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 사흘 동안, 최 씨는 "차에 실려 다친 상처는 치료도 받지 못한 채 폭행까지 당하며 밀양으로 지리산으로 끌려다녔다"고 주장했다. 백주 대낮에 퇴근하는 노동자를 가족들의 품으로 돌려보내지도 않고 '면담'을 빙자해 억류한 이들은 바로 그 회사, '삼성의 간부들'이었다.

"식사나 같이 하자" 유인한 뒤 강제 억류

회사 간부들이 최 씨를 '납치'한 것은 얼마 전 삼성SDI 등에서 벌어진 '유인물'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서였다.

삼성 노동자들은 지난 11월말까지 회사 출퇴근 정류장이나 사원아파트, 언양, 양산 일대에서 '구조조정 반대', '희망퇴직 중단', '노동조합 결성' 등을 요구하는 유인물을 만들어 배포했다. 이 일로 인해 삼성SDI 내부에서는 은밀한 내사가 진행됐고, 최 씨를 유인물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해 강제로 억류한 것이다.

사건 당일 최 씨가 22일 오후 12시 30분경 순순히 회사 동료를 따라 나선 것은 회사쪽에서 이런 사실을 숨기고 "식사나 같이 하자"며 데리고 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식사를 하기 위해 회사 동료인 김 모 씨를 따라나선 곳에는 회사 간부인 정 모 부장, 차 모 씨 등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로부터 24일까지 사흘 동안, 최 씨는 정 부장 등을 비롯한 회사 간부들에게 "유인물에 대해 아는 대로 실토하라"는 끈질긴 협박과 추궁을 받아야 했다. 최 씨는 "아는 바 없다"며 버티기도 하고 "돌려보내 달라"고 애원도 했지만 간부들은 들은 척도 않았다.

급기야 기회를 틈타 어두운 시골길을 달려 도망치던 최 씨는 언덕 아래로 굴러 양 다리와 허리에 심한 부상을 입었다. 최 씨는 곧 뒤따라온 회사 직원들에게 붙잡혔지만, 간부들은 "앰블런스를 불러 달라"는 최 씨의 요청마저 들어주지 않았다.

이들은 부상당한 최 씨를 승용차에 그대로 태운 채 지리산 모텔로, 밀양으로 끌고다녔다. 이 와중에 최 씨는 "죽여버리겠다, 생매장시키겠다"는 협박을 받았고, "승용차 안에서 머리채가 잡히는 등 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당시 상황을 기억하며 최 씨는 "그날 밤이 1년 365일보다 더 길었고 인생이 그냥 끝나는 줄 알았다"고 토로했다.

결국 최 씨는 회사의 요구대로 '각서'와 '서약서'를 쓰고, 작은 형을 비롯한 가족들이 달려와 "안전을 보장해라"고 요구한 끝에 풀려날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 최 씨와 동행했던 삼성SDI 간부는 이런 사실을 모두 부인했다. 최 씨를 만나 "유인물에 대해 아는 게 없느냐"며 직접 추궁한 정 모 부장은 "납치가 아니었고, 회사일로 얘기하기 위해 만난 것"이라고 주장했다.

정 부장은 "최 씨가 '집에 보내달라'고 얘기한 것을 들은 적이 없다"며 "22일 당시 최 씨는 가족들, 동료들과 밤늦게까지 통화했다"고 밝혔다.

정 부장은 또 "언덕에서 구른 줄은 잘 모르겠고 최 씨가 발목을 다쳤다고 해서 침을 맞기 위해 한의원을 찾다 보니 중산리까지 간 것"이라며 "승용차 안에서 폭행을 당했다는 얘기도 나중에 들었지만, 당시 나는 다른 차량을 이용했기 때문에 잘 모르겠다"고 전했다. 그러면서도 정 씨는 "그런 일(폭행이나 협박)은 없었을 것"이라고 최 씨의 주장을 전면 부인했다.

365일보다 더 길었던 하룻밤의 악몽

현재 최 씨는 울산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 "모든 사람이 자신을 감시하고 있는 듯한" 고통에 시달린다고 호소하고 있다. 2년 전 끊었던 담배도 다시 피우기 시작했다. 최 씨의 자녀들은 '안전'을 염려해 이미 시골로 피신한 상태다.

이처럼 사흘간 생명의 위협에 시달린 최 씨지만, 삼성 노동자들에게서 '최 씨의 경우'는 특별한 경험이 아니다. 삼성 노동자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이러한 '면담'이 삼성 노동자들에게 매우 익숙한 일이라고 주장했다.

지난해 11월 삼성으로부터 해고당한 김갑수(38) 씨는 이미 여러 차례 이러한 '면담'과 위협을 경험했다고 밝혔다.

김 씨는 "개인적으로도 99년 11월, 2000년 3월, 4월, 9월 등 매 차례마다 20여 일씩 회사 간부들에게 끌려다니며 소위 '면담'이란 일을 당했다"며 "조용히 있으라는 협박은 그나마 나은 것"이고 그보다 더 심한 경우도 있다고 전했다.

김 씨는 또 "인간관계를 동원해 접근하는 방법과 해외 현장 근무를 보내 아예 인간적인 유대관계를 끊어놓는 방법 등 다양한 형태로 삼성이 노동자들을 탄압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최 씨의 부인 이미경 씨는 "그 일이 있은 후 정 부장이 직접 찾아와 무릎을 꿇고 잘못했다고 빌었지만, 절대 용서할 수 없다"며 법적 대응을 준비중이다. 삼성해복투(위원장 김성환)와 울산 민주노총 등도 삼성의 '비인간적인' 처사에 강력 대처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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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오마이뉴스 입사 후 사회부, 정치부, 경제부, 편집부를 거쳐 정치팀장, 사회 2팀장으로 일했다. 지난 2006년 군 의료체계 문제점을 고발한 고 노충국 병장 사망 사건 연속 보도로 언론인권재단이 주는 언론인권상 본상, 인터넷기자협회 올해의 보도 대상 등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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