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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일 여의도 대신증권 객장에서는 2001년 증시 폐장을 기념하는 납회식이 열렸다. 이날 양대 증시는 모처럼 급등해 신년 장에 희망을 걸게 했다. ⓒ오마이뉴스 김시연 |
2001년 증시 폐장을 앞둔 12월28일 서울 여의도 대신증권 객장. 오후 3시가 가까워오면서 이날 폐장을 기념해 열리는 납회식을 취재하려는 신문방송기자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기자들 몰려드는 거 보니까 다음 장은 뻔하겠어. 신문방송에 대문짝만하게 난 다음날 주가 뜨는 걸 못 봤다니까."
사진기자들의 카메라 세례를 피해 자리를 뜨던 한 70대 노 투자자는 그들이 들으라는 듯 한마디 내뱉는다. 이날 양대 증시가 모처럼 큰 폭으로 올랐지만 그의 표정이 썩 밝지만은 않았다.
"금년 한 해는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어. 올해는 지독하게 운이 없었어. 봉사가 개천 나무란다고 너무 사람을 믿다가 당한 거야."
잔인했던 여름...주총장의 짧은 인연
주식투자 경력 20년째라는 김태희(70, 가명) 씨와 기자는 구면이었다. 그를 처음 만난 건 지난 7월25일 여의도 전경련회관에서 열린 한국창업투자의 임시주총장에서였다. 올 여름 여의도 증권가를 떠들썩하게 했던 안창용 전 벤처테크 사장의 한국창투 M&A 시도가 무위로 돌아가던 시점이었다.
"감자 안 하면 안됩니까? 전경련(편집자주; 한국창투의 대주주는 전경련 회원사들)이야 돈이 있겠지만 우리 같은 소액주주는 어떻게 합니까?"
안 사장의 적대적 M&A 시도를 저지하기 위한 이사회의 50% 감자 결정에 맞서 김태희 씨가 거의 유일하게 반대의견을 냈지만 다른 주주들의 절대적인 지지 발언에 묻혀 버리고 말았다.
"이번엔 꼭 한 몫 잡을 줄 알았어"
"한국비료 때도 당했어. 이번에는 괜찮을 줄 알았는데…."
김태희 씨는 94년 이뤄진 삼성그룹의 한국비료(현 삼성정밀화학) 인수 전 M&A 부인공시만 믿고 주식을 처분했다 큰 손해를 본 적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오히려 M&A 가능성만 굳게 믿고 주식을 쥐고 있다가 손해를 보고 만 것이다.
M&A설이 나돌기 전부터 한국창투 주식을 갖고 있던 김태희 씨는 안창용 사장이 M&A 추진을 공식화하자 추가 투자해 당시 1만5천여주나 되는 주식을 보유하고 있었다.
"4천원대에 그냥 팔았어야 했는데 마침 수술을 받느라고 시기를 놓쳤어. 정신차리고 보니 주가가 바닥으로 떨어져 있는거야. 안 사장이 (한국창투 주식을) 오래 갖고 있을수록 좋을 거라는 말만 믿고 샀던 건데."
하지만 그가 그렇게 믿었던 안 사장은 주총 전에 이미 자신의 보유지분을 모두 처분한 뒤 잠적한 상태였다. 그 뒤 안 사장은 불법 자금모집 행위로 검찰에 구속돼 실형을 선고받았지만 당시 피해를 본 한국창투 소액주주들에겐 아무런 보상도 이뤄지지 않았다.
"사람을 너무 믿은 게 탈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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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료 투자자와 얘기를 나누고 있는 김태희 씨(오른쪽). 챠트분석에 이력이 붙은 김 씨는 주변 사람들에게 투자조언도 아끼지 않는다. ⓒ오마이뉴스 김시연 |
김 씨의 불운은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올 여름 백내장 수술을 받을 만큼 시력이 좋지 않았던 김 씨는 지난 6월경 증권사 객장에서 만난 이재문(50, 가명) 씨에게 자신의 보유주식 1만여주에 대한 사이버 거래를 위탁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자신의 사전 허락을 받고 주식을 매매하도록 조건을 내걸고 공증 각서까지 받았지만 이 씨는 임의대로 주식을 거래하다 주식을 송두리째 날리고 몇달 전 잠적하고 말았다.
잃어버린 주식을 되돌려 받겠다는 일념으로 평소 이 씨가 자주 다니던 증권사 객장에서 진을 친지가 벌써 몇 달째. 지난 27일 객장에서 만난 김태희 씨의 손에는 이 씨의 주민등록증 사본과 공증 각서가 꼭 쥐어져 있었다.
"남한테 피나게 하면 자기도 피가 나는 법이야. 돈도 돈이지만 그런 사람은 면박을 줘서 다시는 객장에 못 나오게 만들어야 돼."
그 사건으로 투자 밑천을 고스란히 날린 그에게 12월 들어서면서 새빨게 진 주식 전광판도 한낱 그림의 떡일 수밖에 없었다.
"이젠 시골 가서 농사짓고 살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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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이버 거래 비중이 커진 요즘 증권사 객장은 중장년층 투자자들의 보금자리가 되고 있다. ⓒ오마이뉴스 김시연 |
납회식이 끝난 증권사 객장엔 투자자들을 위한 조촐한 잔칫상이 마련됐다. 멀찌감치 납회식 광경을 지켜보던 투자자들은 카메라가 모두 철수한 걸 확인한 뒤에야 하나둘씩 모여들어 모처럼 술과 함께 얘기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이런 자리에서 빠질 수 없는 게 잔뜩 과장 섞인 투자 무용담. 한 번에 수천만 원을 번 사연부터 수억 원을 잃은 사연까지 줄줄이 이어진다. 한 60대 투자자는 기자를 붙잡고 젊을 때는 주식투자하지 말라며 신신당부한다.
"담배끊기 보다 더 힘든게 주식투자 손떼기야. 한 번 돈 맛 들이고 나면 크게 손해봐도 다시 증시 분위기가 되살아나기만 하면 언제 그랬냐는듯 다시 돌아오게 마련이거든."
그새 맥주 한 잔을 들이킨 김태희 씨도 한 마디 거든다.
"일반인들은 주식해서 재미보기 힘들어. 다들 값싼 중소형주만 사 모으니까 이런 상승장에선 힘 받기 힘든거지. 결국 정보를 쥐고 있는 외국인들만 다 해먹기 마련이야. (다리를 저는 한 투자자를 가리키며) 저 사람도 현대전자(현 하이닉스반도체)에 투자했다 1~2억 그냥 날렸어. 조금씩 벌다가도 단칼에 날리는 거지."
30여 년 전 자식 교육 때문에 시골에서 무작정 상경한 김 씨는 2년 전 아내를 잃고 나서 여의도 객장을 찾는 일이 부쩍 늘었다고 한다.
"집에는 답답해서 못 있어. 며느리 눈치 자식 눈치 보느니 차라리 여기 나와 있는 게 속편하지. 밥해 줄 식구만 있으면 이젠 다시 시골 내려가 농사짓고 싶은 심정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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