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대 주식투자자의 2001년 겨울 나기

한 증권사 객장 '납회식'에서 만난 사람들

등록 2001.12.31 10:15수정 2002.01.01 2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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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일 여의도 대신증권 객장에서는 2001년 증시 폐장을 기념하는 납회식이 열렸다. 이날 양대 증시는 모처럼 급등해 신년 장에 희망을 걸게 했다. ⓒ오마이뉴스 김시연


2001년 증시 폐장을 앞둔 12월28일 서울 여의도 대신증권 객장. 오후 3시가 가까워오면서 이날 폐장을 기념해 열리는 납회식을 취재하려는 신문방송기자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기자들 몰려드는 거 보니까 다음 장은 뻔하겠어. 신문방송에 대문짝만하게 난 다음날 주가 뜨는 걸 못 봤다니까."

사진기자들의 카메라 세례를 피해 자리를 뜨던 한 70대 노 투자자는 그들이 들으라는 듯 한마디 내뱉는다. 이날 양대 증시가 모처럼 큰 폭으로 올랐지만 그의 표정이 썩 밝지만은 않았다.

"금년 한 해는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어. 올해는 지독하게 운이 없었어. 봉사가 개천 나무란다고 너무 사람을 믿다가 당한 거야."

잔인했던 여름...주총장의 짧은 인연

주식투자 경력 20년째라는 김태희(70, 가명) 씨와 기자는 구면이었다. 그를 처음 만난 건 지난 7월25일 여의도 전경련회관에서 열린 한국창업투자의 임시주총장에서였다. 올 여름 여의도 증권가를 떠들썩하게 했던 안창용 전 벤처테크 사장의 한국창투 M&A 시도가 무위로 돌아가던 시점이었다.

"감자 안 하면 안됩니까? 전경련(편집자주; 한국창투의 대주주는 전경련 회원사들)이야 돈이 있겠지만 우리 같은 소액주주는 어떻게 합니까?"

안 사장의 적대적 M&A 시도를 저지하기 위한 이사회의 50% 감자 결정에 맞서 김태희 씨가 거의 유일하게 반대의견을 냈지만 다른 주주들의 절대적인 지지 발언에 묻혀 버리고 말았다.

"이번엔 꼭 한 몫 잡을 줄 알았어"

"한국비료 때도 당했어. 이번에는 괜찮을 줄 알았는데…."
김태희 씨는 94년 이뤄진 삼성그룹의 한국비료(현 삼성정밀화학) 인수 전 M&A 부인공시만 믿고 주식을 처분했다 큰 손해를 본 적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오히려 M&A 가능성만 굳게 믿고 주식을 쥐고 있다가 손해를 보고 만 것이다.

M&A설이 나돌기 전부터 한국창투 주식을 갖고 있던 김태희 씨는 안창용 사장이 M&A 추진을 공식화하자 추가 투자해 당시 1만5천여주나 되는 주식을 보유하고 있었다.

"4천원대에 그냥 팔았어야 했는데 마침 수술을 받느라고 시기를 놓쳤어. 정신차리고 보니 주가가 바닥으로 떨어져 있는거야. 안 사장이 (한국창투 주식을) 오래 갖고 있을수록 좋을 거라는 말만 믿고 샀던 건데."

하지만 그가 그렇게 믿었던 안 사장은 주총 전에 이미 자신의 보유지분을 모두 처분한 뒤 잠적한 상태였다. 그 뒤 안 사장은 불법 자금모집 행위로 검찰에 구속돼 실형을 선고받았지만 당시 피해를 본 한국창투 소액주주들에겐 아무런 보상도 이뤄지지 않았다.

"사람을 너무 믿은 게 탈이지"

▲ 동료 투자자와 얘기를 나누고 있는 김태희 씨(오른쪽). 챠트분석에 이력이 붙은 김 씨는 주변 사람들에게 투자조언도 아끼지 않는다. ⓒ오마이뉴스 김시연
김 씨의 불운은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올 여름 백내장 수술을 받을 만큼 시력이 좋지 않았던 김 씨는 지난 6월경 증권사 객장에서 만난 이재문(50, 가명) 씨에게 자신의 보유주식 1만여주에 대한 사이버 거래를 위탁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자신의 사전 허락을 받고 주식을 매매하도록 조건을 내걸고 공증 각서까지 받았지만 이 씨는 임의대로 주식을 거래하다 주식을 송두리째 날리고 몇달 전 잠적하고 말았다.

잃어버린 주식을 되돌려 받겠다는 일념으로 평소 이 씨가 자주 다니던 증권사 객장에서 진을 친지가 벌써 몇 달째. 지난 27일 객장에서 만난 김태희 씨의 손에는 이 씨의 주민등록증 사본과 공증 각서가 꼭 쥐어져 있었다.

"남한테 피나게 하면 자기도 피가 나는 법이야. 돈도 돈이지만 그런 사람은 면박을 줘서 다시는 객장에 못 나오게 만들어야 돼."

그 사건으로 투자 밑천을 고스란히 날린 그에게 12월 들어서면서 새빨게 진 주식 전광판도 한낱 그림의 떡일 수밖에 없었다.

"이젠 시골 가서 농사짓고 살고 싶어"

▲ 사이버 거래 비중이 커진 요즘 증권사 객장은 중장년층 투자자들의 보금자리가 되고 있다. ⓒ오마이뉴스 김시연


납회식이 끝난 증권사 객장엔 투자자들을 위한 조촐한 잔칫상이 마련됐다. 멀찌감치 납회식 광경을 지켜보던 투자자들은 카메라가 모두 철수한 걸 확인한 뒤에야 하나둘씩 모여들어 모처럼 술과 함께 얘기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이런 자리에서 빠질 수 없는 게 잔뜩 과장 섞인 투자 무용담. 한 번에 수천만 원을 번 사연부터 수억 원을 잃은 사연까지 줄줄이 이어진다. 한 60대 투자자는 기자를 붙잡고 젊을 때는 주식투자하지 말라며 신신당부한다.

"담배끊기 보다 더 힘든게 주식투자 손떼기야. 한 번 돈 맛 들이고 나면 크게 손해봐도 다시 증시 분위기가 되살아나기만 하면 언제 그랬냐는듯 다시 돌아오게 마련이거든."

그새 맥주 한 잔을 들이킨 김태희 씨도 한 마디 거든다.

"일반인들은 주식해서 재미보기 힘들어. 다들 값싼 중소형주만 사 모으니까 이런 상승장에선 힘 받기 힘든거지. 결국 정보를 쥐고 있는 외국인들만 다 해먹기 마련이야. (다리를 저는 한 투자자를 가리키며) 저 사람도 현대전자(현 하이닉스반도체)에 투자했다 1~2억 그냥 날렸어. 조금씩 벌다가도 단칼에 날리는 거지."

30여 년 전 자식 교육 때문에 시골에서 무작정 상경한 김 씨는 2년 전 아내를 잃고 나서 여의도 객장을 찾는 일이 부쩍 늘었다고 한다.

"집에는 답답해서 못 있어. 며느리 눈치 자식 눈치 보느니 차라리 여기 나와 있는 게 속편하지. 밥해 줄 식구만 있으면 이젠 다시 시골 내려가 농사짓고 싶은 심정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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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사회부에서 팩트체크를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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