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에 대한 성찰의 의무

지요하의 <참된 세상 꿈꾸기> 우리 국어를 위하여

등록 2002.01.04 11:54수정 2002.01.04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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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의 글 <'너무너무'는 도대체 무슨 뜻일까?>와 관련하여 후속글을 하나 써야 할 필요를 느꼈다. 독자들의 반응이 워낙 컸기 때문이다. 참으로 다양하고도 심도 있는 의견들이 많이 제시되었다. 나는 우선 독자님들께 고마움을 느낀다. 어떤 형태의 의견이든 간에 그것은 우리 말에 대한 나름의 깊이 있는 성찰을 반영하는 것들이어서, 우리말에 대한 성찰을 하나의 의무로 생각하는(더 나아가 그것이 국민적 의무로 승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나로서는 더욱 고맙지 않을 수 없다.

누구나 알다시피 말은 말 자체로만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말의 변화나 과도한 쓰임 등이 시대상이나 사회의 속성을 반영한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말과 사회 현상은 서로를 유인하고 추동하며, 좋은 면으로든 나쁜 면으로든 그것을 알게 모르게 심화시키는 작용을 한다.

그런 관점으로 파악한다면 '너무너무'라는 부사의 과도하고도 무제한적인 사용은 언어라는 독립적 사안으로만 파악할 수 있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지난번 글에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나는 '너무너무'라는 말의 '범람'을 사회심리학적인 측면에서 바라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의 범람이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한 가지 병리현상으로부터 비롯된 것이고, 사회병리현상을 계속적으로 노정하며 추동해가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거두고 싶지 않다.

한 분 독자님의 의견에도 심도 있게 제시된 사항이지만, '지나침'을 뜻하는 '너무'라는 단어는 '넘친다'는 것으로부터 유래한 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관심하는 것은 그 말의 어원이나 유래보다도 그 말을 오랜 세월 사용해온 우리 조상들의 깊은 사려와 슬기다. '지나침은 부족함만 못하다'는 철리를 바탕에 깔고, 그 지나침을 경계하는 뜻으로, 다시 말해 부정적인 의미로 그 말을 사용해왔던 것이다.

우리 시대에 도래한 '너무'라는 말의 무제한적인 사용은 '지나침의 범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지나침을 경계하고자 하는 의지나 미덕이 우리의 삶에서 사라졌음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다. 또 거기에는 물량적 가치에 대한 사회 일반의 선호가 함축되어 있다. 물량적 가치에 대한 추구와 맹종뿐만 아니라 이 시대에 와서 우리 민족의 최대의 단점으로 부각된 조급함과 성급함, 정과 사를 명확히 분별하지 못하는 흐리멍덩함과 비합리성 따위와 직·간접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우리의 삶이 진실과 정직으로부터 많이 유리되면서, 그리고 어떤 지나친 극(極)의 현상들이 일상적으로 보편화되어 가는 가운데 사람들의 거짓과 가식이 일반화되면서 '너무'라는 과장적인 표현법이 급류를 타듯 널리 확산되었으리라는 생각을, 그것이 극단적인 견해일 수 있다는 위험 속에서도 나는 버리고 싶지 않은 것이다.

사람들이 편리하게 다니는 길이라고 해서 다 좋은 길인 것은 아니다. 대세라고 해서 다 옳은 것이 아닌 이치와도 같다. 편리만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잔디밭이나 숲을 가로질러 자연스럽게(실은 부당하게) 만들어진 길이라 하더라도 더 이상의 환경 파괴나 실책이 생기지 않도록 사후 보완이라도 충실히 해야 하는 것이 올바른 지혜다.

'너무너무'라는 말의 무제한적인 사용이 이제는 보편화된 대세라 하더라도, 그것의 옳고 그름에 대한 논의까지 슬그머니 사장될 수는 없다. 그것은 언제라도 확대 재생산될 수 있고, 그럴수록 좋다. 또 옳고 그름에 대한 논의마저 사라진다 해도, 오랜 세월 부정적인 의미로 쓰여왔던 '너무'라는 말의 본래 의미와 그것에 대한 기억마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너무'라는 말의 과도한 사용 때문에 찬밥 신세가 된 말들―'정말'이니, '참'이니 하는 말들이 오늘에는 비록 땅에 떨어진 오이 신세일망정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가식과 과장의 범람 속에서 '정말'과 '참'의 세계를 그리워하는 마음들은 더욱 커지게 될지도 모른다.

무릇 말이란 오늘의 쓰임으로만 그 의미가 종결되는 것이 아님을 생각해야 한다. 모든 사물의 변화 속에는 복원력이라는 것도 있는 법이다. 말도 마찬가지다. 일년 내내 현대 복장을 하고 살다가도 명절이면 고유 한복을 한번 입어보고 싶어하는 것, 온갖 고생을 무릅쓰고라도 고향 땅을 밟아보고 싶어하는 것은 모든 한국 사람의 인지상정이다. 그것을 어찌 그르다 할 것이며, 말의 본래 의미를 그리워하는 것을 어찌 무의미하다 할 것인가.

갖가지 지나친 현상의 범람과 함께 '너무너무'라는 말의 사용이 아무리 대세라 하더라도, "너무 좋다.", "너무 예쁘다.", "너무너무 감사드린다(한다)"란 말에서 의아심과 자괴감을 갖는 사람은 여전히 존재할 것이다. 그런 말들에서 정반대의 뜻을 감지하게 되는 현상도 생겨날 것이다. 그리하여 오해와 오해가 얼크러지는 혼란도 파생할 것이다. 그런 현상들이 결코 생겨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어디 있는가.

말은, 특히 민족의 고유어는 나라나 민족의 정체성을 반영한다. 어떤 형태로든 국민성을 키우고 유인해 가는 일에 있어서 가장 큰 구실을 하게 마련이다. 국민의 기본 심성, 예의, 삶의 미덕들을 결정적으로 좌우할 수 있는 것이 언어다. 그래서 언어는 곧 자신의(국민의) 정신이요, 자존심이기도 한 것이다.

언어를 갈고 다듬어서 국민의 큰 자존심으로 승화시켜야 할 책무는 문인과 학자들에게도 있지만(이 점과 관련해서는 나 역시 고치고 배워야 할 것이 많지만), 오늘날에는 방송 종사자들의 책무가 가장 크다고 할 것이다.

나는 일찍이 거짓말과 폭언이 난무하는 정치권의 풍경을 보면서 그것들이 알게 모르게 전체 국민들의 심성을 몹시 거칠게 만들어갈 것이라고 크게 우려한 적이 있었다. 그런 풍경으로부터 말미암은 일반 국민들의 우리 국어에 대한 '학대 현상'을 확대 조명하여 희화적으로 그린 소설을 쓰기도 했다. 그러나 정치권의 우리말에 대한 학대 현상은 오늘에도 여전히 심각하다.

천박함과 상스러움이 존재 근거인 것도 같고, 국어에 대한 자존심을 전혀 챙기지 못하는 정치권에는 희망을 둘 수 없는 만큼, 이런 때일수록 방송 매체 종사자들의 책무는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이 점을 방송 매체 종사자들은 명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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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태안 출생. 198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추상의 늪」이, <소설문학>지 신인상에 단편 「정려문」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옴. 지금까지 120여 편의 중.단편소설을 발표했고, 주요 작품집으로 장편 『신화 잠들다』,『인간의 늪』,『회색정글』, 『검은 미로의 하얀 날개』(전3권), 『죄와 사랑』, 『향수』가 있고, 2012년 목적시집 『불씨』를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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