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을 찢는 사나이

서진석의 <발트3국 이야기>

등록 2002.01.16 16:07수정 2002.01.16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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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트비아 리가에 가면 구 시가지 앞쪽으로 하늘을 향해 좀 어색하게 두 팔을 들고 서있는 초록색 여신상을 볼 수 있다. 이 <발트3국 이야기>에서 몇 번 소개한 적이 있는 라트비아의 자유의 여신상이다.

'밀다(Milda)'라는 이름의 이 여신상은 라트비아 국민들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약간 숙이고 있는 모습이, 서울 광화문에 있는 이순신 동상을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이곳은 리가 시민들이 만나는 주요 약속장소이기도 하고, 여신의 발 아래로는 군인들이 매 시간 교대식을 하는 볼거리가 이어지기도 한다.

시베리아로 죄 없이 추방된 라트비아인들에 대한 기념으로 발 아래에는 항상 꽃과 촛불이 놓여져 있다. 그 여신상 밑부분을 한바퀴 돌아보면 옆면으로는 비슷비슷한 그림들이 조각되어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무언가에 맞서 싸우는 사람들, 기사들 등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이 양각되어 있는 이 조각 그림의 주인공은, 그들 중 한가운데서 있는 이상할만큼 커다란 '털모자'를 쓰고 있는 사람이다.

그림을 감상하느라 한바퀴를 돌다가 '차렷'하고 서있는 군인들 옆에 너무 가까이 다가가면, 혹여 부동자세를 정말로 하고 있는지 알아보려고 괜한 장난을 했다가 광장에서 순찰을 돌고 있는 '고참군인'한테 아주 혼이 날 수도 있다.

그 여신상 어디에도 그 그림과 관련된 설명이 있는 곳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냥 멋있는 그림이려니 하고 쓱 보고 지나가는 경우가 대반사이지만, 그 그림은 라트비아가 자랑하는 역사 서사시 '라츠플레시스(Lacplesis)'의 장면들을 묘사한 그림이다. 라츠플레시스는 바로 그 서사시의 주인공 이름으로, 번역을 하자면 '곰을 찢는 사람'이란 의미이다. 이름으로 봐서는 곰과 상당히 안 친할 것 같지만, 정작 라츠플레시스의 어머니는 곰이었다고 한다.

어색하게 털모자를 쓰고 있는 것 같은 머리모양은, 그가 곰의 후예임을 알려주는 유일한 표적인 '곰의 귀'이다. 들은 바에 의하면, 여신상 옆면으로 조각되어 있는 모습은, 곰의 귀를 가지고 있는 라트비아 영웅의 모습을 후대의 사람들이 상당히 부끄러워하여 모자로 가려놓은 모습이라고 하는데, 어찌 되었건 라츠플레시스는 라트비아 민중들이 어려움에 빠져있을 때, 갑자기 나타나 싸우는 라트비아의 수퍼맨이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어느 나라치고 그런 변변한 서사시 하나 없는 나라는 없다. 그래서 이런 서사시에 관한 기사는 어떻게 보면 굉장히 쓸데없는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 서사시가 한 민족의 정신에 이 만한 영향력을 미친 나라는 정말 손에 꼽을 만하다.

이 역사 서사시 라츠플레시스의 저자는 '안드레이스 품푸르스(Andrejs Pumpurs 1841-1902)'라는 시인이다. 러시아 터키 전쟁 시 장교로 활동한 전적을 반영하여 문학관련서적에는 전부 군복을 멋지게 차려입은 모습으로 소개되는 이 멋있는 작가의 작품은, 19세기 말 라트비아에서 솟구치는 민족애와 자유 투쟁의 정신을 반영한 작품이지만, 사실 이 작품을 통해 그러한 분위기가 형성되었다고 하는 것이 낫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라트비아의 민요와 전설을 토대로 창작된 이 작품은 라트비아의 건국시대부터 시작해서, 독일인들이 라트비아 점령을 시작한 12세기까지 고대의 이야기를 내용으로 삼고 있다. '곰의 턱을 맨손으로 잡고 찢어죽이는 엄청난 힘을 가진 사나이' 라츠플레시스는 라트비아를 침략해 들어오는 독일기사단들과 그들의 배후에 있는 검은 악마들과 맞서싸운 인물이다.

천국과 지옥, 영웅과 악마, 천상을 누비는 활동무대, 그리고 신과 인간의 사랑, 반전과 긴장감 등 재미있는 이야기가 갖추어야할 요소들은 다 갖춘 서사시인데, 지면관계상 내용을 다 소개 할 수 없는 것이 못내 아쉽다. 독일인들과 악마들을 혼합한 요소가, 라트비아 역사를 통해 독일인들이 저지른 일들을 잘 대변해 주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작품에서 라츠플레시스는 독일의 '검은 기사'와의 전투 중 장렬한 전사를 한다. 악마들이 그에게 일러준 라츠플레시스의 약점을 단칼에 제거했기 때문인데, 그곳은 다름 아닌 라츠플레시스의 '커다란 곰의 귀'였다. 독일인들은 그 라츠플레시스를 죽이고 라트비아를 차지해, 19세기까지 그 땅의 주인으로 남아 살게 되는 것이다. 내용이 이러하니만큼 1888년 라츠플레시스가 최초로 출판될 당시 독일인들과 상당한 알력이 있었던 것은 당연하다.

라츠플레시스가 발표된 후 라트비아 국민들에게 미친 영향은 아주 지대하다. 작품에 나오는 민족을 배반한 악의 화신 캉게르스(kangers)는 한때 소련 시절 변절자를 말하는 대표적인 단어로 쓰였다고 한다.

현재 라트비아에서 수여되는 최고의 훈장 중 하나는 바로 '라츠플레시스 훈장'이며, 리가를 비롯한 라트비아의 도시의 유명거리 중에는 이 작품의 등장인물을 딴 경우가 아주 많다.

라임도타(Laimdota), 스타부라제(Staburadze), 코크네시스(Koknesis) 등 유명장소와 주인공들의 이름은 의상실, 식당, 극장 등 라트비아인들의 즐겨 사용하는 이름이 된지 오래이고, 이 작품의 스케일에 맞게 록뮤지컬로도 제작되어 매년 라트비아인들의 사랑을 받으면서 장기 공연되고 있기도 하다.

이 작품과 일맥상통하고 있는 것이 지난 번에 한번 소개한 바 있는 에스토니아의 '칼렙의 아들'인데, 작품 '라츠플레시스'에서 칼렙의 아들은 공교롭게도 라츠플레시스를 죽이려는 원수로 등장한다. 그러나 다행히 마지막에는 위험에 처해있는 발트인들을 구하기 위해 라츠플레시스와 협력하여 독일인들과 맞서싸우는 거인으로 그려져 있다.

이 작품을 논할 때 빠질 수 없는 것이 그리스 신화를 비롯한 서유럽의 서사시들로부터 받은 영향에 관해서인데, 주로 언급되는 작품들은 핀란드의 신화 '칼레발라', 스웨덴의 신화 '프리트요크에 관한 이야기' 등이다, 구성이나 내용면에서 그 작품들에서 많이 차용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엄연히 라트비아의 신화, 라트비아인들의 정서에서 나온 인물과 지명, 또 라트비아인들을 위하여 싸우는 영웅들의 이야기이다.

사실 라트비아 역사상으로는 라츠플레시스처럼 독일인들에 대항하여 싸우다가 목숨을 잃은 실제 영웅들의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그렇지만 라트비아 문학사에서는 이런 서사시의 전통의 결여되어있는 것도 사실이며, 품푸르스 전까지 전쟁, 결투, 복수를 다룬 영웅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문학작품도 없었다.

품푸르스는 위험에 처해있는 라트비아인들을 위해 '국가를 방어해낼, 민족정신과 힘의 결정체'로서 라츠플레시스를 탄생시켰다. 동과 서에서 밀려오는 제국주의의 침략 속에서 자칫 하다간 민족의 존립이 위태하게 될 중요한 순간에, 라트비아인들이 민족의 생존을 위한 투쟁을 벌일 수 있도록 불을 당긴 것이 바로 이 작품이다. 그렇다면 이것이 어느 나라의 영향을 받았는지 뭐했는지 하는 논쟁은 중요한 것이 못된다.

서유럽 국가들이 세계 대전의 종전을 축하하며 샴페인을 터뜨리고 있을 때, 발트3국은 독일과 소련에 의해 만신창이로 찢겨버리고 말았다. 그 결과 현재까지도 라트비아의 제6대 도시에서는 전부 라트비아 현지인들이 인구비율 40%로 곤두박질 치고마는 상황이 되는 결과를 안게 되었다.

리가 시가지 한가운데 있는, 언뜻 우울해 보이는 자유의 여신 밀다는, 슬픈 운명의 라츠플레시스와 함께 라트비아인들에게 끝없는 교훈을 던져주고자 고개를 숙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덧붙이는 글 | 필자의 발트3국 홈페이지에 와보세요 http://my.netian.com/~perkunas

덧붙이는 글 필자의 발트3국 홈페이지에 와보세요 http://my.netian.com/~perkun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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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석 기자는 십수년간 발트3국과 동유럽에 거주하며 소련 독립 이후 동유럽의 약소국들이 겪고 있는 사회적 문화적 변화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다양한 저술활동을 해오고 있다. 현재는 공식적으로 라트비아 리가에 위치한 라트비아 국립대학교 방문교수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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