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그날리나' 여행길에 만난 어린왕자

서진석의 <발트3국 이야기>

등록 2002.01.23 16:10수정 2002.02.08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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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그날리나에 갔었다. 리투아니아 관광안내서에서 자주 보이는 숲이우거진 호수가 보고 싶어 찾아간, '아욱슈테이티야 (Aukstaitija) 국립공원'의 입구인 도시이다.

수묵담채화로 그려놓아 먹물이 번져나간듯, 검을 정도로 시퍼렇고 푸른 물과 숲이 서로의 색깔을 빨아들이는지, 구분도 모호한 수평선과 지평선 사이에 서서 그 호수들을 넋놓고 바라보고 왔다. 어디를 가나 호수 위로 스산하게 스며드는 물안개는 사람 마음을 참 이상하게 만든다.

이 분위기 있는 국립공원 인근에는 십여 년 전 폭파된 우크라이나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와 똑같은 방식의 원자력발전소가 있어, 리투아니아 유럽연합 가입에 먹물을 뿌리고 있다.

다른 발트지역은 물론 리투아니아 국내 전력의 상당수를 생산공급하기도 하거니와, 대체 에너지도 마땅치 않은 이 나라의 거의 유일한 전력생산지인 이곳에 유럽의 큰 형님들이 압력을 넣고 있는 중이라, 그 자그마한 나라는 지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중이다. 현재 2005년까지 폐쇄하기로 계획하고 있지만, 폐쇄에 필요한 비용만 해도 어마어마한 지경이라고 하는데….

소련이 무슨 마음을 먹고 그 곳에 원자력발전소를 지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리 강심장인 사람이라도 그 아름다운 호수에 원자력 폐기물을 버릴 수는 없을 것이고, 게다가 안전조치에 있어서 체르노빌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말을 믿어본다면, 이런 도시에 원자력발전소가 있어선 안될 이유도 없을 것 같았다.

내가 그 원자력발전소 근처에 사는 아이를 만난 것은, 빌뉴스 가는 버스시간을 맞추기 위해, 시오리 길을 부랴부랴 걸어내려와 땀을 삐질삐질 흘리고 있던 그때였다. 빌뉴스에서 아침에 출발하여 이그날리나에 도착하자마자 근처에 괜찮은 호수로 가는 버스가 바로 출발하는 것이 있길래 그냥 올라탔다.

그러다가 돌아가려고 버스시간을 알아보니 이그날리나 시내로 들어가는 버스는 자그마치 다섯 시간을 기다려야 오는 것이었다. 리투아니아의 국립공원은 우리나라 같이 개발과 파괴를 번갈아 하는 그런 곳이 아니라, 보호와 관리에 중점을 두는 곳이므로, 관광객들을 위한 버스가 많이 없는 것을 가지고 뭐라고 그러면 안된다.

그래서 이그날리나로 돌아가려면 시골길을 따라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이렇게 된 것, 그림으로 그려낸 것 같은 예쁘장한 리투아니아 시골풍경이나 보며 타박타박 걸어가자 마음 먹고 있는데, 젠장, 비까지 내린다. 우산도 없이 그 시골길을 괴괴하게 걸어가는 동양인을, 풀밭에서 풀을 뜯고 있던 그 점박이 소들은 어떻게 생각을 했을까?

아마 그 생각을 그 아이도 똑같이 했는지 모른다. 그 아이는 이그날리나 초입에서부터 따라오기 시작해서 마침내 기차역까지 내 꽁무니를 따라왔다. 한 예닐곱 살 정도 되었을까? 옷이 깔끔한 것을 보아 구걸하는 거지아이는 아니었다. 번듯한 집에서도 아이들에게 돈을 구걸해 오라고 시키는 경우가 있다는 말을 들은 바가 있어서, 난 돈을 주지 않으려고 적당히 경계를 하고 있었다.

비도 그치고 많이 걸어서 목도 마른 참에 나는 아이스크림이나 하나 사먹으려고 역 안의 가게로 들어갔고, 그 아이도 기어이 따라들어왔다. 귀찮은 마음에 정말 '저리 썩 꺼져!'하는 말을 내 짧은 리투아니아어로 해주려고 머리를 굴리고 있었는데, 난생 처음 볼 수도 있는 동양인한테 욕을 먹으면, 평생 그것을 가슴에 두고 살다가 커서는 외국인을 적대하는 스킨헤드족이 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어, 다른 말로 바꾸기로 했다.

"아이스크림 먹을래?"
아이스크림 냉장고 위에 코를 내리누르고 어기적 서 있던 그 아이는 말을 못 알아들은 것인지 아니면 난데없이 아이스크림을 권하는 내 말이 믿기지 않는 것인지 그냥 가만히 있기만 했다. 썩 비싸보이지 않는 아이스크림 두 개를 꺼내 계산을 하고 한 개를 그 애에게 건네주었다.

그러곤 역대합실 앞 화단에 나앉았다. 기차시간은 한 시간여가 남아 있었다. 그 아이는 아예 내 옆자리에 앉아버렸다. 아이스크림 사줬으니 스킨헤드 되는 일은 없겠군. 별것도 아닌 일에 그냥 우쭐한 생각이 들어 그 애에게 말을 걸었다.

"너 몇 살이니...?"
"일곱 살이요."
"너 왜 친구들이랑 놀지 않고, 이런 데 혼자 있어?"
"우리 동네엔 같이 놀 친구가 없어요."
"집이 어딘데?"
"여기서 기차 타고 30분 정도 가야 돼요."
"그럼, 너 혼자 기차를 타고 여길 온단 말야?"
"그냥 여기 와서 호수가에 나가놀아요."

한참 말이 없다가 그 애가 대뜸 물었다.
"아저씨. 비행기 타봤어요?"
"그럼, 내가 사는 나라는 아주 멀어서 꼭 비행기를 타야 돼."
나는 내가 어디서 왔고, 현재 어디 살며 뭘하고 있는지 얘기해주었다.
"아저씨 부잔가 봐요. 아까 아이스크림 값 낼 때 봤는데, 돈 참 많이 있더라. 그렇게 돈 많은 사람은 처음 봤어요."

하긴 만약을 대비해서 돈을 좀 많이 가져오긴 했는데, 그래도 부자소리 들을 만큼은 아니었다. 수중엔 미화로 40달러 남짓한 돈만 있었다.

"이거 그리 많은 돈이 아닌데..."
"우리 아버지는 지금 돈을 못 벌어요."
"왜?"
"아프시거든요. 어머니 아버지 지금 아프셔서 일을 못하신 지가 오래 됐어요. 우리 동네에서도 일을 하는 아저씨들은 정말 얼마 안 돼요."
"그렇게 돈을 아무도 못 벌면 살림은 어떻게 꾸려나가니?"
"집에 텃밭이 하나 있어서 감자랑 당근 같은 거 키우니까 먹는 건 걱정이 없어요. 근데 이런 아이스크림은 얼마 동안 못 먹어봤어요."

그 애 말에 나는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난 그냥 그 애를 데리고 역 앞에 있는 제과점 비슷한 데 가서, 맛있어 보이는 빵이란 주스랑 사서 같이 나누어 먹었다. 빵을 먹는 아이 손에 먼지가 잔뜩 끼어 시커맸다.

"얘, 호수가에서 노는 애 맞니? 넌 커서 뭐가 되고 싶니?"
"집 짓는 사람이요, 그 사람들은 돈을 아주 많이 벌거든요."
"돈을 많이 벌고 싶니?"
"그래야지, 가족들도 다 행복해지고, 집도 좋은 것으로 사고 할 거 아녜요."
"공부도 열심히 해야지, 영어도 배우고, 수학도 배우고... 너도 나중에 비행기 타고 한국에도 와보고 그래야 할 거 아니야."
나는 주제넘게 그애에게 뭔가 대단한 소리를 해주려고 하고 있었다.

"오늘 사주신 아이스크림 정말 맛있었어요. "
그 잘난 아이스크림 한 개 사주고 그런 얘기 들으니 무안해졌다.
"다음 번에 여기 놀러왔을 때, 외국인을 또 보게 되거든 오늘처럼 이렇게 거지 같이 졸졸 따라다니면 별로 안 좋아보이니까 그러지 말아라."
"난 그래도 태어나서 아저씨 같은 동양인은 처음 본 걸요. 너무 신기해서…."
"그래도 안돼."

알고 보니 그 아이는 표를 제대로 사가지고 기차를 탄 적도 거의 없었다. 그냥 차장 아저씨에게 매일 혼나면서 그 기차를 타고 이그날리나에 와서 호수가에 가서 놀다가 집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표값이 없다는 말을 자기가 타고 갈 기차가 멀리서 다가오고 있을 때 비로소 내게 해준 것이다. 표값을 그애 손에 쥐어주자, 그 돈으로 부랴부랴 표를 사서 기차에 올라탔다.

"오늘은 차장 아저씨한테 안 혼나겠네."
소리치듯 해준 말을 그 애가 들었는지는 모르겠다. 차창 밖으로 고개를 빼끔히 내밀고 나를 바라보는 그 아이 얼굴을 보자니, 나는 그때까지도 그 애 이름도 제대로 물어보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 이미 기차는 저만치 가고 있는데….

그 아이는 지금도 이그날리나역에 혼자 나와 놀고 있는지, 부모님은 병이 나아 취직을 했는지, 내가 얘기한 대로 공부는 열심히 하고 있는지 그저 궁금하기만 하다. 4년 전이니 지금은 꽤 커서 그 자리에서 우연히 본다고 해도 알아보지도 못할 것 같고…. 그냥 처음에 하고 싶었던 대로 욕을 하고 그 애를 쫓아버렸다면, 이그날리나에서 보낸 하루의 느낌은 지금과 아주 달라져 있을 것이다.

나무좌석이 참 불편했던, 빌뉴스로 가는 기차를 타고 지나가며 바라보는 이그날리나의 호수들은, 사람들에게 그곳에 그 악명 높은 원자력발전소가 있다는 사실을 감추고 싶은 것인지, 자신의 물빛을 하늘 속으로 계속 빨아올리고 있었다. 하늘빛이 왜 파란색인지 비로소 그때야 깨달았다.

여러 어려운 상황에 있지만 리투아니아는, 언제나 한결 같이 푸른 물빛을 잃지 않는 이그날리나의 호수들처럼 끊임없이 유럽연합 가입을 위해 노력할 것이고, 그 아이의 마을 사람들 역시 어려운 환경을 이기고 살아보기 위해 애쓸 것이다. 그 모든 소원들이 호수 물빛처럼 하늘로 빨아올려 골고루 섞여, 가르지도 않고 가두지도 않은 하늘빛처럼 어우러져 모두 행복해지기를 바라볼 뿐이었다.

덧붙이는 글 | 발트지역의 관광정보가 필요하신 분은 제 홈페이지에 들러보세요.
http://my.netian.com/~perkun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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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석 기자는 십수년간 발트3국과 동유럽에 거주하며 소련 독립 이후 동유럽의 약소국들이 겪고 있는 사회적 문화적 변화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다양한 저술활동을 해오고 있다. 현재는 공식적으로 라트비아 리가에 위치한 라트비아 국립대학교 방문교수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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