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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질형사, 공공의 적을 만나다

강우석 감독의 <공공의 적>

02.01.25 17:31최종업데이트02.01.28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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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우석이 감독한 영화를 본 지 얼마나 지났을까 궁금해서 그의 필모그래피를 찾아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의 마지막 연출작이 1998년 <생과부 위자료 청구소송>이더군요. 올해는 떼어내더라도 3년. 그동안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나요.

지난 2년간 한국 영화사를 다시 써야할 일이 몇 달이 멀다하고 터져나와서인지 3년 전 만든 영화인데도 10년전 쯤에 만들지 않았나 하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가 오랫만에 찍은 영화 <공공의 적>은 주방장의 이름만으로도 어느정도 기대가 되는 요리지요. 잠시 살펴볼까요.

강동서 강력반 형사 강철중.
아시안게임 권투 은메달 리스트로 경사로 특채된 전직 권투선수 출신. 아내는 강도에게 칼맞아 죽고, 노모와 유치원 다니는 두 딸이 있음. 깨끗한 경찰과는 거리가 먼, 이를테면 부패경찰. 폭력배 두목 풀어주고 돈 받기, 마약상에게 마약 뺏아 팔아먹기, 노점 삥뜯기는 기본. 욕을 넣지 않으면 문장 성립이 안 되는 언어환경에서 살고 있음.

독일계 금융회사 펀드매니저 이사 조규환.
자본주의 사회에 완벽하게 적응한 인간형. 헬스와 골프로 다듬어진 몸에 손익계산이 분명한 회전빠른 두뇌를 갖춤. 자상한 가장이자 능력있는 직장인. 10~20억 정도는 충분히 융통하는 부유한 경제력. 아내와 아들이 있고 노부모는 따로 살고 있음. 날카롭게 정돈된 자신의 모습처럼 깨끗한 사무실에서 일함.

딱 정반대의 인물이지요?
박봉에 시달리면서 몸을 던져 일해야 하는 형사라는(그것도 강력반) 직업과 사무실 의자에 앉아 컴퓨터 화면과 서류를 붙잡고 수십 억을 벌어들이는 펀드 매니저라는 직업은 우리 사회 양 극단에 있는 직업군으로 봐도 무방할 겁니다.

강철중과 조규환의 외모도 대조적이구요. 그들이 처음 스칠 때의 모습을 떠올려볼까요? 가게 주인과 생수병을 두고 실랑이하는 철중 뒤로 쫙 빠진 아우디를 모는 규환이 지나갑니다. 비오는 날 맞닥뜨렸을 때는? 규환이 온 몸에 음산함을 풍기며 걸어오는 동안 철중은 화장실을 찾아다니기에 바쁘죠.

이런 대조와 둘이 부닥치면서 유발되는 웃음과 긴장은 익숙한 것입니다. 역시 <투캅스>를 떠올리게 하거든요.

철중이 영화 도입부에 전화 받는 파트너가 놀라자 "왜 그래? 롯데가 졌대?" 하고 퉁기는 것, 규환의 비서에게 접근하면서 가발을 쓰고 스티커 사진기 안에 들어가는 것, 또 "네가 한달에 600만 원을 번다고 치자"라고 하는 것 등등이 익숙하게 느껴지는 것은 우리가 <투캅스>에서 엉뚱한 형사들을 봤기 때문일 겁니다.

'더러운 물에서 대충 더럽게 살던 형사가 진짜 악을 보고는 그 악을 제거하기 위해 물불 가리지 않고 뛰어든다.' 똑같은 이야기지만 <투캅스>에선 좀 더 가볍게 나간 것이고, 여기선 나름대로 끝까지 밀고나가 본 것이지요.

결과는? 80% 정도는 성공적입니다.

설경구의 강철중이란 캐릭터가 얼마나 생생한지, 그 하나만으로 영화의 80%는 칭찬받을 수 있습니다. 함부로 늘어진 몸에 역시나 함부로 내뱉는 욕설과 주먹질로 무장된 단순무식한 이 인물은 정말 '현실적'입니다.

물론 과장된 면이 없지 않지만(그 '600만 원'과 '370억' 처럼) 조폭들 앞에서 너스레를 떠는 모습이나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강철중이 '배역'이란 사실을 잠시 잊게 됩니다.

그 덕에 피해를 본 건 이성재로군요. 꽤 좋은 연기를 보여줬는데도 설경구에게 눌려 잘 보이질 않아요. 그러고보면 이성재는 파트너운이 나쁜 배우인 것 같아요. 상대가 너무 잘해서 자신이 가려지는 악운이 겹치는 것 같거든요. <미술관 옆 동물원>에서는 심은하에게, <주유소...>에선 다른 습격꾼들에게, <플란다스의 개>에선 배두나에게, <신라의 달밤>에선 차승원에게 약간씩 가리는 것 같군요.

제가 배우라면 당분간 설경구 근처엔 가지 않겠습니다. 그 무시무시한 기에 눌려 파묻힐 게 뻔히 보이는 것 같거든요.

이 지점이 나머지 모자란 20%입니다. 조규환의 캐릭터가 약한 것. 왠지 <아메리칸 사이코>를 떠올리게 하는 외모와 행동을 빼고나면 조규환에게 목소리는 없습니다. 강철중의 반대꼴로 억지로 만들어낸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어요. 규환에 대한 설명을 좀 더 붙였더라면 좋지 않았을까요.

그 정도의 실력있는 펀드매니저라면 돈 10억 정도는 다른 데서 융통해 쓰지 그런 극단적 방법을 택하지 않았겠죠. 그런 방법을 택한 이면에 뭔가 다른 게 있는 것 같은 뉘앙스를 슬쩍 풍기고만 말아버리니 조규환은 더 얄팍해져 버리고 맙니다.

공공의 적이 외국계 펀드매니저와 사채업자라...
철중은 시스템과 권력 자체에 대항하거나 변혁을 일으킬 인물이 못되죠. 그저 욕을 하고 주먹을 날리며 비아냥거릴 수 있을 뿐입니다. 이를테면 공공의 적은 패륜아이지 패륜아를 낳은 시스템이 아닙니다. 이건 반어법인가요, 비틀어놓은 풍자인가요.

강철중이 때려잡기에 적당한 선이 그 정도라는 이야기인 것 같아 극장을 나오는 마음이 썩 개운하지 못했습니다.
2002-01-25 17:32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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