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2002.01.31 14:40수정 2002.02.06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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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지청 앞에서 시장퇴진 1인 시위를 펼치고 있는 순천 시민단체 회원. ⓒ 이종철 |
검찰이 지자체의 관급공사 청탁 혐의자를 대량으로 적발하고도 이를 제대로 수사하기는커녕 혐의자 전원에 대해 무혐의 처분을 내려 해당지역 주민들의 원성을 사고 있다.
지난해 연말 전남 순천지역의 시·도의원, 민주당 당직자, 고위공무원, 언론인 등 40여 명이 관급공사 청탁 혐의로 줄줄이 검찰에 소환되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주민들은 이 지역 유력 인사들이 총체적으로 개입한 이 사건을 전형적인 '토호비리'로 규정하고 촉각을 곧추세웠지만 검찰은 이 사건 관련자들을 모두 무혐의 처분해 축소수사 의혹을 사고 있다.
검찰 관계자는 지난 21일 "관급공사 청탁사실은 확인했지만 수의계약 대가로 금품을 수수하거나 압력을 행사한 증거를 확보하지 못해 관련자 전원을 무혐의로 수사 종결한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시민들은 "지방 비리세력들에게 면죄부를 준 수사였다"면서 검찰에 대해 불신감과 허탈감을 동시에 표시하고 있다. 심지어 일부 관급공사 업자들조차 이해할 수 없는 수사결과라며 의문을 제기하고 있고 시민단체들은 특검제를 도입해 재수사해야 한다며 검찰 수사결과에 반발하고 있다.
신준식 순천시장의 구속 과정에서 불거져나온 공사청탁 리스트 사건 전개과정을 통해 무엇이 문제인가를 짚어보았다.
공사청탁 리스트에는 지역 실력자 40명이 적혀 있었다
공사청탁 리스트는 지난해 2월 신준식 순천시장이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되면서 불거져 나왔다.
신 시장은 지난해 2월 건설업자 신 아무개 씨로부터 각종 공사 등과 관련해 편의를 봐달라는 청탁과 함께 2억3천만 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 기소돼 2심에서 징역 5년에 1억1천만 원을 선고받고 대법원에 항소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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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천 내일신문이 입수한 전남 순천지역 관급공사 수의계약 의뢰현황 자료. 오른쪽 끝에 수의계약을 따내기 위해 청탁을 한 시·도의원, 정당관계자, 고위공무원, 언론인 등의 이름이 적혀있다. |
순천지청은 순천시청 압수수색 과정에서 당시 순천시 회계과장인 최아무개 씨가 작성한 '수의계약 의뢰현황'이라는 제목의 공사청탁 리스트를 입수했다. A4용지 80쪽 분량의 이 서류에는 2000년 2월부터 12월까지 순천시가 발주한 관급공사 수의계약에 개입한 청탁자들의 이름도 적혀 있다.
최씨의 공사청탁 리스트에는 순천시의원 23명 가운데 19명, 순천지역 도의원 4명 가운데 3명이 포함됐다. 이와 함께 민주당 순천지구당 당직자, 순천시청 고위공무원, 방송사 간부 및 지방신문 순천주재기자 등 40여 명의 이름도 연필로 적힌 리스트에 올라 있다.
이 리스트에 적힌 청탁자들의 이름은 2천만 원에서 5천만 원의 관급공사를 자신과 친분이 있는 특정건설업체에 주라고 힘을 쓴 '흔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간 말로만 떠돌던 일부 지방자치단체의 수의계약 청탁비리의 결정적인 단서가 드러난 것이다.
지자체에 만연한 부정부패에 의해 지방자치 무용론까지 들먹여지고 있는 시점에 불거진 수의계약 청탁리스트는 지방자치 개혁과 부정한 수의계약 관행을 개혁할 좋은 기회였다.
검찰은 왜 청탁리스트를 압박용으로만 사용했나?
하지만 광주지검 순천지청은 가공할 만한 폭발력을 지닌 공사청탁 리스트를 입수하고도 수사의지를 보이지 않았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다만 신준식 순천시장이 자신의 금품수수 사실을 완강하게 부인하며 버티자 압박용으로 사용하는 데 그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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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퇴진 300인선언을 발표하고 있는 시민단체 ⓒ 이종철 |
당시 수사를 맡았던 박아무개 검사는 지난해 5월 18일 순천시장 1심 5차 공판에서 공사청탁 리스트를 회계과장 최아무개 씨에게 보여주며 "명단이 공개될 경우 엄청난 파장이 벌어질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검찰은 순천시장이 뇌물수수 혐의를 완강하게 부인하자 시장이 특정업체와 수의 계약하도록 지시한 것으로 파악한 14건을 재판부에 제출했다. 이때 검찰은 일부 시의원과 주재기자만 거론했을 뿐 도의원과 민주당 당직자, 고위공무원 등은 포함시키지 않았다.
검찰이 공사청탁 리스트를 법정에서 공개하자 관련 공사업자들과 시의원, 공무원 등은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반면 시민들은 부패세력 척결의 호기로 삼아줄 것을 기대하며 검찰 수사에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검찰은 시장 구속 선에서 수사를 내부 종결했고 담당 검사가 서울지검으로 발령나면서 이 사건은 흐지부지됐다.
검찰은 시장 구속에 이어 청탁리스트를 전면 수사할 경우 대형 비리 사건으로 확산될 것을 우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순천지역 유지들은 민선 1,2대 시장이 사법 처리되자 '여수, 광양은 놔두고 왜 우리만 치냐?'는 식으로 검찰의 조치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지역 유지들의 이같은 반발을 의식해 검찰이 사법정의와 시민들의 지역개혁 요구를 외면한 게 아니냐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국정감사장에서 다시 살아난 청탁리스트 사건
검찰이 덮어둔 이 사건이 다시 살아난 것은 국정감사장에서였다. 지난해 9월 20일 실시된 광주지방검찰청 국정감사에서 최병국(한나라당) 의원이 청탁리스트에 대한 검찰의 미온적인 수사태도를 문제삼았고 검찰은 재수사에 들어갔다.
국정감사 지적에 의해 마지못해 이뤄진 검찰의 재수사는 시간 벌기에 급급한 인상을 심어줬다. 검찰은 관련자들이 금품수수 사실을 부인할 경우 혐의를 입증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순천지역 시민단체들은 검찰입장에 대해 '봐주기 수사'라며 철저한 수사를 촉구했다. 방송, 일간지, 시사지 등 각종 언론이 이 사건을 계속 보도하면서 검찰의 부담은 커졌다.
검찰은 지난해 12월 20일부터 3건 이상 수의계약 청탁자 40여 명과 참고인 60여 명 등 100명을 줄줄이 소환했다. 그리고 관련 건설회사 장부 압수수색과 계좌추적 등이 이뤄지면서 사법처리 수위에 관심이 모아졌다. 이 과정에서 최소한 3∼4명 정도는 사법처리될 것이란 소문이 나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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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 민주당 각성을 촉구하며 차량시위를 벌이고 있는 시민단체 ⓒ 이종철 |
공사 청탁자들이 아무런 대가를 받지 않았다?
과연 검찰 수사결과처럼 청탁자 모두가 공사알선 대가를 받지 않거나 압력을 행사하지 않고 순수하게 알선만 했을까? 이에 대해 공사업자들은 어이없어하는 표정이다.
이름을 밝히기 꺼리는 김아무개(49) 씨는 25일 "관급 공사 알선 대가로 부가세를 제외하고 적게는 10%에서 많게는 15%까지 떼내어준다"면서 "순수하게 공사를 알선한 경우를 거의 보지 못했다"고 털어놓았다.
김씨는 또 "정상적인 수의계약으로 이뤄진 공사는 거의 없다"면서 "아무런 대가없이 공사계약에 개입했다는 말은 소도 웃을 일이다"고 잘라말했다.
순천지역 시민단체들은 "이번 수사를 계기로 깨끗한 순천시가 되기를 기대했는데 검찰의 수사 미진으로 물건너가게 됐다"며 "엄연히 존재하는 이권개입을 감싸고 부정부패 세력들에게 손을 들어준 이번 수사를 신뢰할 시민들은 별로 없다"며 특검제 도입으로 재 수사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정감사에서 검찰수사의 문제점을 지적한 최병국(한나라당) 의원실 김길 비서관은 25일 "검찰에 청탁리스트 관련 자료를 요구하겠다"면서 "지방비리 개혁차원에서 문제를 다루겠다"는 뜻을 밝혔다.
한편 순천지청 관계자는 25일 "검찰 수사인원 부족으로 처음부터 수사를 하지 못해 아쉬웠다"면서 "금품수수나 압력을 행사한 혐의를 잡지 못했는데 여론에 밀려 처벌할 수는 없다"고 해명했다.
신준식 순천시장 구속과 관급공사 리스트 사건 경과
2001년
- 2월 3일 : 신준식 순천시장 1억2천만원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
- 2월 17일 : 시민단체 시장퇴진 2차 길거리 시민투표 찬성 97.6%
- 3월 3일 : 시민단체 2차 차량시위(순천대-순천 민주당사)
- 3월 21일 : 순천시장 퇴진을 위한 시민단체 300인 선언
- 5월 18일 : 순천시장 1심 5차 공판 (검찰이 재판정에서 관급공사 청탁리스트 처음 공개)
- 7월 20일 : 순천시장 1심 선고공판 (징역5년 추징금 1억5천만원)
- 9월 20일 : 한나라당 최병국 의원 광주지검 국감에서 최기수 리스트 공개와 검찰의 미온적 수사 지적, 정홍원 지검장 미진한 수사 시인과 함께 순천지청 재 수사
- 11월 15일 : 순천시장 2심 선고공판 (징역5년 추징금 1억1천만원)
- 12월 20일 : 순천지청 3건 이상 수의계약 청탁 40여 명 참고인 60여 명 등 100명 소환 시작 (순천시의원 19명, 순천출신 전남도의원 3명, 민주당 순천지구당 당직자 7명, 순천지역 방송기자, 신문 기자 등 언론인 7명 등)
2002년
- 1월 21일 : 광주지검 순천지청 2개월간 수사 끝에 청탁리스트 관련자 무혐의 종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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