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일 선물로 색연필을 받고 싶다

등록 2002.01.31 22:39수정 2002.02.01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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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은 해마다 온다.
그때마다 넥타이나 와이셔츠, 지갑이 늘어난다. 그것들은 이미 내게 있는 것들이다. 주는 이들에게 고맙다고 말하나 내 마음에 드는 물건이라기보다도 물건을 들고 온 사람들의 취향에 맞는 것이다. 물건을 받고서 아직도 한 번도 입거나 걸치지 않은 것들이 있다. 그들을 탓할 수 없다. 내가 바라는 것을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들과 딸은 자기들이 갖고 싶은 작은 사진 액자라든지 흙으로 만든 인형을 내게 생일 선물로 준다. 마음은 고맙지만 내게는 전혀 쓸모가 없다. 그렇듯 내 자신 또한 부모님께서 살아계실 때 당신들이 진정으로 원하셨던 물건을 생일선물로 드렸다고 장담할 수 없다.


내 생일이다.
우리 집에서는 생일 며칠전부터 생일이라고 아이들에게 때때로 말하여 아이들에게 신경을 쓰게 한다. 부모의 생일을 잊지않고 챙기라는 교육적 효과도 있다. 아이들은 돈 만 원도 안 들이는 선물을 사기만 해도 부담이 되는 눈치가 분명하다. 기껏해야 3-4천 원 짜리로 "해피버스데이 투유"한다. 고맙기는 하나 참된 정성이 들어 있다고 할 수는 없다. 아무리 부모의 사랑이 내리사랑이고 무조건이며 아이들의 사랑은 치사랑이라지만 거지 동냥 받듯 받는 선물은 싫다.

부모의 생일이 언제인지 알면서도 단돈 만 원이 없어서 쓰다 남은 카드를 찾아 "생신 축하드리고 어쩌구" 하면서 "건강하세요"하며 끝맺는 글도 마지 못해 쓰는 그런 카드는 받기 조차 싫다. 부모도 때로는 자식들에게 대접을 받고 싶다.

생일 선물로 번듯한 물건을 하나 받고 싶었다.
작년에는 딸에게 말해서 아이가 쓰지않고 서랍 속에 처박아 놓은 낡은 하모니카를 선물로 받았다. 사실 그 하모니카는 아이의 중학교 때 내가 선물했던 것이었다.

나는 며칠 전부터 생일 선물로 색연필을 갖고 싶다고 가족들에게 여러 번 말했다. 조건까지 걸었다.

"24색은 안 돼. 36색이어야 해" 하니 아내는 "자기 24색 있잖아. 또 뭐 하려고..." 한다.
"24색 가지고는 만화에 채색을 다 못해"하고 나는 내 주장을 꺾지 않았다.


나는 요새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스완네 집 쪽으로-콩브레)'를 그린 스테판 외의 만화를 틈틈히 모사하고 있다. 난해하기 짝이 없는 책을 만화로 쉽게 그려놓은 것을 나는 책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그림을 베끼고 있다. 컬러 만화라서 나는 색깔까지 칠하고 있다.

중학교 1학년 때 만화를 그려서 팔러 다닐 때 나는 만화를 그릴 종이와 먹물이 없었고, 미술반에 들어가서는 물감 살 돈이 없어서 늘 연필로 학교에서 나누어 주는 종이에 뎃상만 하였다. 내게 누구 하나도 제대로 된 스케치북과 연필과 물감과 붓을 사준 일이 없었다. 나는 색연필이라도 갖고 싶었다.


시내에 있는 데 전화가 왔다. 아내였다.
"색연필이 돈 만 원이 아녜요. 36색이 3만5천원 가는 데 사요, 말아요."
받는 사람이 값을 알아야 할 일이 없다. 나는 한번쯤 호사를 느끼고 싶었다.
"값이 비싸면 그만 두라고... 내가 사지"하는 내 말에 심통이 담겼다.
먹여 주고 입혀 주고 학교에 보내고 용돈을 주어서 아이들을 키웠어도 3만5천 원짜리 색연필도 가질 수 없는 불쌍한 인생을 사는 내 처지가 한심했다.

집에 돌아왔다.
우리 가족말고도 친가와 처가식구들이 가득 모여 있다.
그리고, 어렸을 때부터 가지고 싶어했던 36색의 색연필도 있었다.
"생일 축하합니다" 하고 노래가 터지고 나는 꿈을 꾸는 듯했다.

갖고 싶었던 색연필을 가진 내 마음은 철부지 소년의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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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성본부 iso 심사원으로 오마이뉴스 창간 시 부터 글을 써왔다. 모아진 글로 "어머니,제가 당신을 죽였습니다."라는 수필집을 냈고, 혼불 최명희 찾기로 시간 여행을 떠난 글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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