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때리고 안 맞아본 군인 있을까

분풀이 대물림 하려는 마음만 접는다면...

등록 2002.02.01 16:39수정 2002.02.04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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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T체조하는 훈련병들. 군대에서 안 때리고 안 맞아본 군인 있을까. ⓒ 국방화보


제대할 때까지 고참에게 단 한 대도 안 맞은 군인이 있을까. 그럼 제대할 때까지 졸병을 단 한 대도 안 때린 군인이 있을까. 영원한 졸병은 없는 법이어서 누구에게나 고참의 서열에 등극할 수 있는 기회는 주어진다. 놀라운 건 졸병 때 이가 갈리도록 맞아보았다는 고참일수록 더욱 히스테릭하다는 사실이다.


그런 고참에게 맞으면서 특히 곤혹스러웠던 대목은, "니들은 사람 잘 만난 줄 알아! 내가 맞을 때는…"하며 역대 고참들에 비해 자기는 대단히 너그러운 인간인 양 포즈를 취할 때였다. '그런데 어떻게 저리 멀쩡히 살아 있지?'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은 고통 속에서도 엉뚱하게 난 그걸 궁금해했다.

사내들끼리 모인 자리라면 꼭 불거져나오는 군대 얘기에 단골로 등장하는 메뉴가 바로 그런 '악질고참'에게 '당한' 기억들이다. 그럴 때면 가급적 그런 대화에 끼길 싫어하는 나로서도 그저 있지 못하고 토를 달곤 했다. "그럼 당신은 고참이 돼서 졸병들 안 때렸겠네요?" 돌아오는 건 묵묵부답이었다.

이러한 '당한 만큼 물려주기' 현상은 내가 공직에 있을 때도 자주 접할 수 있었다. 새로 업무를 맡으면 이래저래 생소하기 마련. 관련법규를 들추어도 개념파악이 잘 안될 때, 전임자에게 물어보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대부분은 귀찮아하거나, 그도 아니면 '법령집 찾아보쇼!'하는 무성의한 대답으로 일관했다. 한번은 정색을 하고 따졌더니 '아, 나도 그렇게 배웠다니까요!' 이러는 것이었다.

지금 우리가 분노하고 치를 떠는 조직의(군대든 공직이든) 온갖 불합리와 모순 속에는 실은 우리의 '과거'도 담겨 있는 게 아닐까. 포악한 일본군대의 전통을 비판 없이 이어받아 군대는 무조건 '까라면 까는(?)' 곳으로 인식시켜온 건 우리 선배들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불합리함을 알면서도 암암리에 그 전통을 계승한 장본인 역시 우리들 자신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요즘에도 심심찮게 접하는 군 폭력 사건이나 의문사는 왜 발생하겠는가.

자신이 당했던 폭력만큼 더도 덜도 없이 휘두르면서 '그래도 니들은 좀 나은 거다'라고 말하는 모순이 비단 군대에만 존재하는 건 아니다. 그 폭력의 수위나 행태에서 다소 차이가 날지언정, 크든 작든 모든 조직 내에서 천연덕스럽게 자행된다. 그것은 먼저 들어온 자만이 누리는 일종의 '기득권'이다. 또한 질 나쁜 전통의 계승이기도 하다. 그런 전통이 군대나 학교나 직장사회에 만연할 때 우리가 갖게 되는 건 분노와 냉소와, 그리고 때로는 자신도 기어코 대물림(?)을 해야겠다는 치사한 다짐일 것이다.


▲ 고공침투 대비훈련에 나선 병사들. ⓒ 국방화보


다시 군대 얘기. 믿기 어렵겠지만, 공공연히 구타를 용인하는 공문이 부대장 명의로 하달된 적이 있었다. 서슬 퍼런 군사정권(박정희) 시절이었다. '공적인(?) 구타는 용납하되 사적인 구타는 금지한다'는 요지의 특별지시였다. 이건 드러내고 '패라!'는 소리나 다름없었다. 이 지시를 전해들은 당시 고참들의 즉각적인 반응이 기억에 남는다. "이 하사, 일루 와!" 수십 차례 갈긴다. "이건 공적인 구타다. 이의 있나?" "없습니다!"


그런 악몽의 나날들을 보낸 뒤, 드디어 우리 내무반에 마지막 남은 고참이 제대했다. 날짜를 따져보니 내가 입대한 지 꼭 3년이 되는 날이었다. 내무반장인 나는 졸병들을 불러모았다. "앞으로 우리 내무반만큼은 구타를 없애겠다. '얼차려'도 없다. 대신 자율적으로 알아서 행동하도록!" 졸병들은 반신반의하면서도 이 새로운 풍습에 적응하려는 의지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단 두 달이 못 가 내무반 분위기는 여학교 휴게실 수준으로 변하고 말았다.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을 정도였다. 나는 부끄럽게도 내가 한 약속을 스스로 저버리는 짓을 해야 했다. 일석점호가 끝난 어느 날 밤, 나는 전 내무반원에게 이른바 '빳따'를 쳤다.

내무반원들은 진심으로 내게 미안해했다. 모두의 눈빛에서 다시금 잘해보자는 다짐이 이글거렸다. 비록 한 번의 식언(食言)이 있었지만, 내가 제대할 때까지 그와 같은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제대하면서 나는 그 '전통'을 후배들에게 물려주었다. 그들이 그 전통을 온전히 계승했는지 어땠는지는 모르겠다.

여담이지만, 그 야밤의 '빳따'가 빌미가 되어 하마터면 내가 군법에 회부될 뻔한 사건이 있었다. 그러니까 그 일이 있고 며칠 후 나는 무슨 특수교육을 받으러 한 달 가량 부대를 떠나 있었는데, 그 사이 우리 부대 역시 동해안으로 수영훈련을 떠났다.

문제는 수영복을 입은 우리 내무반원들의 허벅지가 온통 시퍼런 데 있었다. 대번에 헌병대 요원의 눈에 띄었다. 명백한 구타의 흔적. 헌병대에선 한 건 올렸다고 판단(당시엔 또 '구타금지' 지시가 하달됐었다. 어기면 군법에 회부되는), 내무반원들을 일일이 불러 조사를 하게 되었다. 내가 그곳에 있었더라면 불문곡직 경을 칠 사안이었다.

그런데 전 내무반원들이 한목소리로 조사에 응했다. '우리 내무반장은 잘못이 없다. 자율적인 내무반을 만들려고 했는데 우리가 그걸 수용하지 못한 탓이다.' 이런 식으로 나를 변호해주었고 몇몇은 눈물로 호소하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무슨 생각이었는지는 몰라도 헌병대에서도 더 이상 문제삼지 않기로 했고, 그런 일이 있었다는 걸 부대 주임상사가 교육수료 후 자대로 돌아온 내게 소상히 일러주었던 것이다. 콧등이 시큰해지는 얘기였다.

훌륭한 전통은 의외로 작은 행동에서 비롯될 수 있다. 고참에게 얻어맞았을 때의 그 고통과 모멸감을 나만큼은 졸병한테 물려주지 말아야지. 전임자에게 자존심 구겨가며 어렵사리 배운 업무였지만 나만큼은 후임자에게 살뜰히 가르쳐주어야지. 선배들이 강요한 권위에의 굴종을 나만큼은 후배들에게 내세우지 말아야지. 이런 작은 실천이 훌륭한 전통을 창출하는 것 아닐까. '며느리 늙은 게 시어머니'라고, '분풀이'를 대물림하려는 인색한 마음만 접는다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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