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들어 중앙일보의 '변신'이 화제다. 홍석현 회장의 '대선 불개입' 천명, 과감한 가판 폐지 결정, 조선일보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사회적 의제(아젠다) 설정 기능 선점, 그 중에서도 압권이었던 예산 1% 대북 지원 주장, 그리고 국회의원과 대선주자를 대상으로 한 '노선 대해부'에 이르기까지 중앙일보는 과거의 보수지로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파격과 실험을 거듭하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노력에 힘입어 중앙일보는 구독자 수나 열독률 부분에서 수위를 달리던 조선일보가 주춤한 사이 그 턱 밑에까지 육박해왔으며, 대선이라는 대목을 만난 올해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구태를 버리지 못한다면 신문 시장의 선두로 부상하는 일이 어렵지 않으리라는 관측도 있다.
이에 대해 종래 중앙일보에 대해 비판적이던 진보 인사들조차도 긍정적인 걸 보면 획기적이며 의미 있는 시도임에 틀림없는 것 같다. 허나 손석춘 한겨레 여론매체부장과 김동민 교수의 논쟁에서도 할 수 있듯 이에 대해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도 분명 존재하고 있다.
실제 중앙일보는 새해 들어서도 강위석 씨의 '은밀한 반시장 혁명' 등을 통해 삼성 재벌의 부당한 경영 행태를 옹호해 왔고, 홍은희 논설위원의 '유승준 쇼크'에서는 그의 선택을 존중하는 여유로움을 보이라고 주문하고 있다. 그뿐인가. 한완상 부총리의 학력 철폐 발언이 물의를 빚었을 때에는 '學歷'과 '學力'을 분간하지 못하는 무지(?)를 드러내기도 했다.
오늘(2/2)자 사설 "뉴욕타임스 사장의 '내탓이오'"에서는 "상대를 깎아 내리고 발목 잡는" "무슨 재판" 등으로 조선일보 민간법정을 위시한 언론개혁 운동을 "깎아 내리고" "발목 잡는" 태도를 보여주었다.
국회의원들의 노선에 대한 조사에 있어서도 계량화한 수치가 보-보 구도인 우리나라 정치를 보-혁 구도로 비춤으로써 진보정당의 입지를 어렵게 만들고, 이념의 인플레와 이에 기반한 "색깔론"으로 번질지도 모른다고 걱정한다면 지나친 기우일까.
김상택 만평이나 '왈순아지매' 등 만화는 현 정권에 대한 악의적인 비아냥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명사들의 회고록 격인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에 연재되고 있는 김경회 씨의 '격동의 시절 검사 27년'에서는 서경원 방북 등 이슈가 된 사항들에 대해 '정치검찰'로서의 과거에 대한 반성보다는 변명과 책임 회피로 일관하고 있다.
특히 정치적으로 예민한 사항인 차기 대선과 관련해 오해를 살만한 대목이 있어 간단히 옮겨본다.
검사장실에 들어선 김(영삼) 총재는 "나의 정치적 고향인 부산의 검사장을 예방하러 왔다"고 말문을 열었다. 서로 인사를 한 다음 한참 이야기가 무르익을 무렵 나는 당시 통일민주당에 입당해 부산진구에서 출마한 N씨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 사람의 생각과 행동은 통일민주당의 이미지와 이념, 그리고 총재님의 뜻과도 맞지 않는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느냐"고 물었다. N씨가 부산과 울산의 각종 노사분규 현장에 나타나 활동하던 때의 일을 상기하면서 꺼낸 말이었다.
그러자 김 총재는 "글쎄 말입니다. 그 사람이 너무 튀고 있는 것 같아 내가 여러번 주의를 주었고 김광일 의원한테도 주의를 주라고 말했습니다"라고 맞장구를 쳤다.(1월 24일자)
총체적으로 보아 중앙일보의 최근 보도 태도는 뚜렷한 정치적 소신에 의한 것이라기 보다는 시류에 편승하여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태도 그것이며, 경제적으로는 기회의 평등을 고려하지 않은 무조건적이고 완전한 자유주의를 주장하며 거대 자본의 이해를 대변하고 있다. 교육에서도 이러한 보도 태도는 큰 차이가 없기에 평준화에 반대하며 공정성 보장 여부가 불투명한 '자유 경쟁'을 소리높여 외치고 있다.
최근 언론계의 계몽 군주론을 둘러싼 논쟁이 한창이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통치자의 선의에 기반한 군주제는 위험하다. 러시아의 어느 계몽 군주가 나름대로는(!) 선정을 베풀다가 아나키스트들의 폭탄 테러를 당하고 화가 나 피의 숙청과 반동 정치를 자행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계몽 군주제는 대안이 될 수 없으며 그보다는 평균적인 사람들의 총의가 제도적으로 보장되는 방안을 강구해야 할 것이다.
물론 하루 아침에 모든 것을 바꿀 수는 없으며 계몽 군주라도 잘한 것은 잘했다고 인정해야 하지만, 끊임없는 감시와 견제가 필요한 시점에 한 마리 제비를 보고 봄이 왔다고 착각하는 우를 범하는 일은 없어야 하겠다.
덧붙이는 글 | 오승진 기자는 인권, 언론, 교육, 역사, 가요, 스포츠 등에 관심을 가지고 글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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