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쉰들러 '치우네'를 아십니까?

중국과 일본에 유태인들이 살고 있는 사연

등록 2002.02.06 16:08수정 2002.03.04 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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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투아니아 제2의 도시 카우나스에 가면 '제9요새'라는 곳이 있다.
제정 러시아가 리투아니아를 점령한 후 러시아 영토의 서쪽 끝을 지키던 요새로 처음 지어진 이 건물은,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독일인들이 유태인들을 학살하던 곳으로 소련시절에는 비밀경찰들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람들을 처형하던 곳으로 사용되어온 비극의 장소이다.

현재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참상을 잘 보여주는 다양한 자료들이 전시된 기념관으로 부활되었다. 학살과 추방 등 전쟁 당시의 참혹한 상황을 잘 보여주는 전시물들이 주제별로 잘 정리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우리 같은 동양인의 눈길을 끄는 곳은 한 일본인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전시되어 있는 한 전시실이다.

스기하라 치우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리투아니아에서 근무한 일본영사이다. 한국에서는 그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아는 사람들에게는 그래도 좀 알려진 인물이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영화화하여 유명해진 독일의 쉰들러처럼, 수 천명의 유태인들을 나치 집단수용소의 불구덩이에서 구해낸 영웅이다. 일본이 침략과 학살만 자행한 것이 아니라 다른 한곳에서는 수 천명의 유태인들을 구해냈다는 것 때문에, 일본은 그나마 자신들이 당시 저지른 일을 만회할 만한 구석을 가지고 있다.

스기하라 치우네가 리투아니아로 부임해온 당시는 빌뉴스를 포함한 리투아니아 남부를 폴란드가 불법점령한 상태였으므로, 카우나스가 리투아니아의 임시수도였다. 스기하라는 핀란드 헬싱키 영사 업무를 마치고, 1939년 바로 이 카우나스에서 일본영사로 근무하면서 소련과 독일의 상황을 시시각각 일본에 보고하는 업무를 부여받았다.

1939년 8월 독일과 소련이 맺은 불가침조약의 결과로 소련은 폴란드와 발트3국에서의 영향력을 보장받게 되었고, 그 후 소련 정부는 1940년 7월까지 리투아니아 내 모든 해외주재공관은 자국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일본영사관과 덴마크 영사관만이 20일의 연장허가를 받고 카우나스에 남아 있게 되었다.

세계사를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그 당시는 독일과 소련이 서로 폴란드와 발트3국 사이에서 땅따먹기를 즐기면서 유럽을 통째로 구워먹으려 하던 참이었다. 독일이 먹을 수 없게 되어 있었던 폴란드를 독일이 낼름 삼켜버리고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다.

나치의 만행을 피해 동으로 동으로 쫓겨 폴란드에까지 이른 유태인들은 독일의 확장을 피해 필사의 고비를 넘겨가며 리투아니아의 국경을 넘게 되었다. 그러나 독일의 리투아니아 점령이 거의 확실해옴에 따라 나치의 진출에 공포를 느낀 유태인들은 그들이 생존할 수 있는 곳을 찾아나서게 되었고, 그들이 마침내 결정한 곳은 당시 덴마크령이었던, 남미의 수리남과 카라카스였다.

카우나스에 있던 덴마크 영사는 유태인들이 그곳으로 안전하게 피신할 수 있도록, 원할 경우 비자를 발급해주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문제는 유태인들이 시베리아를 건너 그곳에 도달할 경우, 당시 일본령이었던 만주땅과 일본열도를 지나가야 하므로, 소련은 일본의 통과비자를 받을 경우에만 소련 영토 통과를 허용하겠다고 밝혔다.

이 이야기를 들은 스기하라는 일본정부에 통과비자를 낼 수 있는 허가를 신청했지만, 일본정부는 그의 비자발급을 허용하지 않았다. 일본 통과비자를 받기 위해서 카우나스 일본영사관으로 매일 줄을 이어 밀려드는 유태인들을 보다못한 스기하라는 일본 정부의 허락도 없이 통과비자를 발급하기 시작한다.

1940년 7월 31일부터 8월 28일까지 29일 동안 스기하라 영사는 그의 부인과 쉬지 않고 비자를 발급했다. 하루에만도 비자를 300장 이상을 발급했다고 하니 일반적으로 한 달 동안의 영사 업무를 하루에 치른 셈이다.

그에게서 일본비자를 받은 유태인들은 소련을 통해서 리투아니아를 떠났고, 그런 방법으로 그가 구한 인명은 공식적으로 6천 명이 넘는다. 마지막으로 베를린을 향해 떠나는 날까지도 쉬지 않고 비자를 발급했고, 마침내 기차가 출발하는 순간 창 밖으로 비자 발급 스탬프를 한 유태인에게 건네주어 더 많은 유태인들이 구원을 받았다고 한다.

이 글을 읽는 많은 독자들은 문득 이런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수리남과 카라카스는 멕시코 옆에 놓인 지역인데 포르투갈에서 배를 타고 가지 않고, 왜 그들은 하필 시베리아를 건너가려고 했을까! 나도 한때 그런 바보 같은 생각을 안 해본 것이 아니다. 그 당시의 형국도를 보면, 폴란드로부터 포르투갈까지 서유럽의 모든 국가들은 나치 파시즘 반유대주의 등으로 인해 유태인을 보면 당장 잡아죽일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포르투갈에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가는 것이 더 빠르고 안전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거의 자살행위와 같다.

그러므로 가장 안전한 길은 시베리아를 지나 만주를 거쳐 알래스카를 통해 북미를 횡단하여 수리남에 이르는 길이었던 것이다. 과연 이것이 가능한 여정이었을까? 스기하라가 구한 유태인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지만, 일본을 통해 아니면 그 당시의 일본령이었던 당시의 만주를 통과하여 남미로 갔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스기하라의 비자를 받아 시베리아를 통과한 유태인들은 샹하이와 일본 고베에서 일본 정부의 보호를 받으며 오래 오래 행복하게 살았다고 한다.

물론 전쟁이 끝난 후 그 험란한 여정을 되밟아 유럽으로 돌아간 사람들도 있지만, 상당수 일본과 중국에 정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럽이나 이스라엘로부터 그렇게 거리가 먼 일본과 중국에까지 유태인들이 정착하여 살고 있게 된 사연에는, 그 스기하라라는 인물의 이야기가 숨어 있다.

우리나라에는 정착해 살고 있지 않는 유태인이 없는 것으로 보아, 당시 그들이 우리 조선팔도는 밟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분명 스기하라가 발급해준 일본비자를 받아들고 두만강을 건너 조선땅에 들어온 사람도 있었을텐데. 마침내 제 발로 '일본땅'을 밟게 되어 얼마나 기뻤을거나… 만약 그 당시 아시아로 밀려든 유태인들이 우리 조선팔도에 정착을 할 수 있었다면 지금의 우리 모습은 많이 달라져 있을까?

동유럽에서 스기하라의 이야기를 통해 일본의 이미지를 홍보하는 일은 비교적 빈번하다. 특히 리투아니아의 경우 그 스기하라의 이야기 때문에 일본의 이미지가 상당히 좋다. 그러니 동유럽에서 이번 월드컵 공식명칭이 '일본 한국 월드컵'으로 불리는 것도 이해가 안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앞뒤가 다른 일본의 모습을 싸잡아 욕을 해대며 이 좋은 말하는 기사를 마치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았지만, 스기하라는 정작 일본의 그런 군사적 팽창야욕을 심하게 비판해온 사람 중 하나이다.

일본령 만주에서 외무부직을 맡아 근무를 하던 당시에도 일본이 중국인들에게 저지르는 만행을 보다 못해 그에 대한 반항의 표시로 외무부직을 자진으로 사임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스기하라 자신은 전형적인 일본의 사무라이식 교육을 받으며 일본에 충성하도록 교육 받은 사람이었지만, 중국에 있는 동안 그리스 정교로 개종을 하는 등 그 당시 일본인들이 보기에 이단적이 일을 많이 한 사람 중 하나이다. 이 스기하라라는 사람 하나만 두고 이야기할 때는 그 당시 일본이 한 일을 쓸데없이 떠올리고 싶지 않다.

정말 스기하라는 자신의 미래와 직업, 가족들 모든 것을 잃을 각오를 하고 일본 정부의 허락도 없이 통과비자를 발급했다. 말하자면 일본을 배반한 셈이다. 그러므로 일본도 스기하라 이야기를 할 때는 일본을 연결지어서 홍보를 해서는 안되고, 스기하라가 유태인들에게 한 일을 이야기할 때 그들이 중국과 한국에 저지른 일도 알게 해야 한다. 스기하라는 일본에 좋은 일을 해주기 위해 그 많은 유태인들을 구한 것이 절대 아니다.

스기하라의 이름 치우네는 리투아니아 사람들이 발음하기에는 지나치게 어려워 리투아니아의 유태인들은 그를 셈포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내가 아는 바로는 일본한자를 읽는 데는 뜻으로 읽는 것과 음으로 읽는 것이 있는데, 치우네와 셈포는 같은 한자의 두 가지 다른 음가라고 한다. 그리고 스기하라가 성이므로 원칙적으로 하면 스기하라 치우에가 맞지만, 리투아니아 현지에서는 치우에 스기하라 아니면 셈포 스기하라로 알려져 있다.

스기하라는 외무직에서 물러난 이후 한번도 자신이 한 일에 대해 밖으로 이야기한 바가 없었지만, 1969년 우연히 그가 구출한 한 유태인이 그를 발견하여 그의 행적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1985년 예루살렘의 야드 바솀 대학살 추모 연구 기념관(Yad Vashem Martyrs Remembrance Authority)에 의해 '민족 중 정의로운 인물'로 선정되었다.

덧붙이는 글 | 필자의 홈페이지를 방문해 보세요. http://my.netian.com/~perkun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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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석 기자는 십수년간 발트3국과 동유럽에 거주하며 소련 독립 이후 동유럽의 약소국들이 겪고 있는 사회적 문화적 변화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다양한 저술활동을 해오고 있다. 현재는 공식적으로 라트비아 리가에 위치한 라트비아 국립대학교 방문교수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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