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터리 교육행정은 학생과 학부모에게 '근거리배정 준수'라고 적힌 붉은 띠를 동여매게 만들었다. 2차 배정이 발표된 지 이틀이 지난 18일. 경기도 교육청으로 들어가는 정문은 경찰이 굳게 지키고 서 있었고, 경기도교육청 별관 3층과 4층 강당은 학부모와 학생 1300여 명으로 발 디딜 틈이 없이 가득 메워져 있었다. 이들의 분노는 시간이 지났지만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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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거리 배정 준수'라고 적힌 붉은 띠를 머리에 묶은 학부모들과 학생들 ⓒ 오마이뉴스 박수원 |
'근거리 배정 준수'
3층 강당 앞에서 만난 김정애(44, 안양구 동안구 평촌동) 씨는 자신의 이야기를 거침없이 풀어놓았다.
김 씨의 아들은 1차 배정에서 버스를 두 번 갈아타야 하는 의왕시에 있는 정원고등학교로 배정받았다. 그렇게 해서 2차 배정된 곳이 군포시에 있는 용호고등학교.
"두 곳 모두 근거리 원칙에 어긋나는 배정입니다. 용호고등학교는 1시간 30분이 걸린다고 하더군요. 아직 가보지도 않았습니다. 물론 아이는 오늘 예비소집에도 참석하지 않았구요. 저는 개인적으로 평준화를 반대하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수가 평준화가 좋다고 하니 거기에 따랐습니다. 그렇데 이게 뭡니까. 실업계에서 떨어진 학생들이 집에서 가까운 인문계 고등학교에, 그것도 명문고에 배정 받고 열심히 공부한 아이들은 교통편도 없는 학교에 다녀야 하고 이게 말이 됩니까?"
김 씨는 이날 아침 교육청이 발표한 전학 가능 방침에 대해서도 '말장난'이라고 반박했다.
"생각해 보세요. 어느 교장이 몇십 명의 학생이 한꺼번에 전학을 가도록 허락하겠어요. 2차 배정을 하려면 똑바로 해야지 잘못된 내용을 가지고 그대로 뺑뺑이를 돌렸으니 엉망이 됐죠. 상처받은 아이들 가슴에 소금을 친 셈이지요. 제대로 안 되면 캐나다에 유학 보낼 생각입니다."
18일 오후 5시. 그야말로 강당은 아수라장이었다. 학부모들은 성남, 안양, 수원, 고양 등 권역별로 나누어 앉아 대책회의를 진행했지만 여기저기에서 고성이고 오가고 의견은 쉽사리 모아지지 않았다. 어떤 중재안도 이 자리에 모인 학생들과 학부모들을 모두 만족시킬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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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기도 교육청의 엉터리 행정을 꼬집은 대자보ⓒ 오마이뉴스 박수원 |
강당4층에서 3층 대책회의를 지켜보는 한 무리의 남학생들이 있었다. 성남시 분당구 송림중학교 학생들. 2차 배정 후 송림중학교 인문계 지원 65명 학생 가운데 14명이 판교에 있는 낙생고등학교로 재배정이 결정됐다. 판교에 위치한 이 고등학교에 가기 위해서는 대부분 집에서 1시간 30분이 소요된다.
이들은 모두 지원학교를 17-18지망까지 써서 학교에 제출했다.
"담임 선생님께서 적어도 5지망 안에는 배정될 거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런데 결과는 15지망 이후 학교에 배정 받았어요."
송림중학교 3학년 김준석(16, 성남시 분당구 야탑동) 군은 "정말 답답하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말이 평준화죠. 몇 년 동안 서열화가 계속될 거예요. 그리고 이렇게 멀리있는 학교에 다니는 건 평준화의 기본 취지에서 맞지 않아요. 공부해서 실력대로 고등학교를 선택하는 게 낫지…. 고등학교 배정을 신의 손에 맡기는 꼴이지요."
평준화 정책 때문에 정작 자신들은 '평준화'의 혜택을 받지 못한 이 학생들은 한결같이 비평준화를 선호하고 있었다. 엉성한 행정이 결국 교육정책 전반에 대한 불신을 불러온 셈이다.
"비평준화가 훨씬 좋아요"
4층 강당에 친구와 앉아 있던 매향중학교 3학년 박희수(15, 수원시 팔달구 남향동) 군. 이야기를 시작하자 답답한 듯 가슴을 주먹으로 쳤다. 그는 1차 배정 때 20분 정도 걸리는 창현고등학교에 배정됐다가 2차 때 버스를 세 번 갈아타야 하는 영신고등학교로 배정됐다.
"다시 배정 받고 너무 허탈했어요. 교무실 가서 막 울고 난리를 쳤지요. 평준화한다면서 '평등' 원칙이 지켜지지 않은 것 같아요. 정말 받아들이기 힘들어요."
박 씨는 친척이 있는 충청도로 아예 학교를 옮겼다가 원하는 곳으로 전학을 할 생각까지 하고 있다.
"저희가 실험용 생쥐도 아니고, 이러다가 대학 못 가면 교육청이 책임져 줄 것도 아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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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책회의가 진행됐지만 의견은 쉽게 모아지지 않았다 ⓒ 오마이뉴스 박수원 |
교육청 강당에서 만난 학부모들과 학생들은 뭔가 배정에 '비리'가 있는 것 같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불신은 곳곳에서 소문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1차 배정 이후 교육청 앞에서 데모한 사람들은 모두 원하는 곳으로 재배정시켰다고 들었다", "컴퓨터가 하지 않고 손으로 골라냈다", "교장들이 제비 뽑아서 데려가게 만들었다"는 등 확인되지 않은 설이 난무했다.
컴퓨터 프로그램 오류로 인해 1차 배정 때와 달리 다른 학교에 배정된 인원은 수원, 성남, 안양(군포, 의왕, 과천 포함), 고양 등 수도권 4개 지역 3만7467명 가운데 7721명. 이들 가운데 2100여 명이 자기가 지망한 학교 가운데 후순위에 배정됐고, 이 때문에 1차 보다 먼 거리에 배정받은 경우가 많았다.
16일 재배정 발표 이후 "더 이상 변동은 있을 수 없다"던 조성윤 경기교육감은 18일 사과문 발표와 함께 전격적으로 사임을 표명했다. 경기도 교육청은 기존 입장과는 달리 "일부 원거리에 배정된 학생들의 불편을 덜어주기 위해 입학 후 전학을 허용하겠다"고 밝혔지만 이 약속이 현실적으로 지켜질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경기도 교육청 홈페이지는 지금 폭주상태다. 2002년 2월 18일 방문자 수가 10만 명을 넘어 섰고 자유게시판에 항의글이 빗발치고 있다.
22일부터 교육부 특별감사가 진행돼 책임자가 처벌된다 하더라도 당장 새학기부터 학교 현장에 혼란은 불 보듯하다. 일년 앞, 아니 한달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교육청을 바라보며 '교육백년대계'(敎育百年大計)를 외쳐야 하는 우리들의 현실이 서글프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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