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역기피, 병역비리, 징병거부
요즘 집에 쌓여있는 시사 주간지를 스크랩하고 있는데, 2년 전 이맘때의 기사를 보니 사회가 온통 군 가산점 논의로 시끌벅적했던 것이 기억난다. 왜 지난 이야기를 끄집어 내느냐 하면, 최근에 한 유명 가수가 병역기피 수단으로 국적을 포기한 행위에 대한 논란이 뜨겁기 때문이다. 사실 어디 그 유승준 군만 그런가. 심심찮게 터지는 사회 각계의 병역비리는 이제는 연중행사가 된 느낌마저 있다.
'군 가산점' 논의 당시, 어떤 단체에서는 여자도 군대를 보내라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었다. 사실 대한민국의 남자라면 누구나 군대에 대한 유쾌하지 않은 감정을 갖고 있을 것이다. 그 고생과 시간에 대한 보상으로 얼핏 군 가산점은 당연한 듯 보인다. 그리고 이에 대해 여성운동계에서 주장하는 남녀불평등이라는 논의도 역시 당연하게 보인다.
그러나 병역기피 문제가 됐든, 군 가산점 문제가 됐든 모두가 감정적인 싸움으로 보인다. "나는 갔다 왔는데 너는 왜 안 가냐", "군대를 갔다온 우리가 어찌 미필자(≒여성)들과 같은 대우를 받아야 하느냐"라는 식의 논의는 문제의 본질을 흐리기만 할 뿐이다.
우리 군대가 언제 우리 편이었나?
우리 국민 모두의 무의식 속에 자리잡은 대한민국 국군의 이미지는 민족을 구한 군대가 아니고, 일본 제국주의의 앞잡이들이 이끌었고, 자국민을 학살하는 데 앞장섰고, 국민의 손으로 뽑은 정부를 뒤집어 엎었으며, 민주주의 세력을 탄압한, 그러면서도 강대국 앞에서는 꼼짝 못하고, 엉터리 무기나 사와서 혈세를 낭비하는 괴물 그 자체이다. 벼룩의 간을 빼먹는다는 말처럼 사병들의 부식비를 빼돌리고, 각종 사고들을 숨기기 급급하며, 매맞고 기합받고 오로지 같은 민족에 대한 증오만 키우도록 강요한 그 곳.
상명하복의 논리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제일 편하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도록 길들이는, 남성들의 통과의례인 군대. 오죽하면 일반 사병에게 가장 큰 욕이 "너, 군대 체질이다, 짱박아라"라는 말일까. 물론 이런 부정적인 모습이 한국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유독 우리 사회에서 심한 이유는 바로 민중의 무의식적 역사의식의 반영이 아닐까.
그렇다. 분명 건군 56년간(1946년 국방경비대 창설 기준) 한국의 군대는 다른 나라의 군대보다 더 국민의 바람을 등진 군대이다. 지금도 민속 조사를 위해 지방을 다니다 보면 듣는 말이 있다.
"국방군, 인민군, 미국군(UN군), 중공군 중 국방군이 제일 무서웠다. 그들이 지나가면 닭, 소, 개, 여자 등 남아나는 것이 없었다. 중겅군이 가장 깨끗하다. 우리 마을 여자 손을 강제로 잡은 병사의 손을 그 자리에서 자르는 것을 본 적이 있다."(경기도 양주군 어느 촌로와의 면담에서, 1998)
내가 하고자는 하는 말은 남성들이 군 가산점의 폐지를 억울해 하고, 군에 가기 싫어 국적을 바꾸고, 각 가정에서는 아들을 군대 보내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군대에 대한 안 좋은 기억들 때문이라는 것이다. 남성들에게 군에서 보낸 시간은 가족과 사회와 국가를 지키기 위해 봉사한 자랑스러운 기억이 아니고 청춘을 빼앗긴 악몽으로 인식된다. 거기에 대한 보상을 원하는 것은 당연하다. 한창 일하고 공부할 나이의 장정이 2~3년을 가정경제를 위해, 또 그 가족의 미래를 위해 노력하지 못했으니, 국가가 보상을 해야 한다는 논리는 심정적인 지지를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여자들도 군대를 가게 하라거나, 국적을 바꾸고, 뇌물을 동원하는 것은 소아병적 발상이고, 같은 남자로서 심히 부끄러운 노릇이다.
지난 시절 군대의 진짜 기능을 이해해야
70만 명 가까운 젊은이들을 징집하여 각종 노동에 이용하는 것은 지극히 전근대적 방식이다. 홍수 등 각종 재해가 발생하거나, 농번기에 노동력을 제공하는 것은 긍정적 기능이나, 이런 부분은 정부가 재해 대책을 잘 세우고, 농정을 제대로 하면 군 병력이 나서지 않아도 되는 문제이다.
즉, 과거에 나라가 가난했을 때는 적은 비용으로 실업도 막고, 국가적 공공 사업에 초저임금의 노동력을 활용하는 효율적 방법이 국민개병제라는 뜻이다. 선진국의 경우 대개 모병제를 택하고 가난한 나라들이 개병제를 택하고 있는 것이 그 증거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이제는 20대 초반의 젊은이들이 창의력을 기르고, 세계의 젊은이들과 겨룰 지혜와 실력이 무엇보다 요구되는 시대이다. 그렇기에 징병에 대한 국민적 저항이 날로 커지는 것이다.
최근 신앙을 이유로 입대 거부를 하는 경우가 점차 확산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이 된다. 일부의 젊은이들은 아예 인터넷에 홈페이지를 만들어 모임을 결성하기까지 하는 등 징병제 반대의 목소리는 더욱 커질 전망이다. 징병제를 반대하는 모임(약칭 징반모, anticonscript.org)은 아직 방문객수가 많지 않지만, 나름대로 체계적인 논리를 갖추고 점차 네티즌들의 호응을 이끌어 내고 있다.
군 관련 학계에서도 병력 감축 논의
한편 사회 일각과 군 관련 학계 등에서는 이미 이 문제를 연구하기 시작한 것으로 알고 있다. 한국군사학회의 장지량(전 공군참모총장, 현 한국군사학회 회장)은 지난 1999년 월간 <국방소식> 10월호에서 <한국군의 발전을 위한 제언 - 건군 51주년에 즈음하여 >라는 논문을 통해 "70만 대군에 15조원의 예산을 쓰는 거대조직의 위용을 갖추었지만, 아직도 현대 정보화 사회의 요청에 부응하는 질적인 변화를 수반하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한 바 있다.
한편 동 학회 이선호 부회장(행정학 박사)는 <국방조직의 성장과정과 조직발전의 당면 과제>라는 논문에서 "한국군의 정규군 병력은 약 70만명으로서 북한의 108만명보다는 훨씬 적지만, 전세계 병력(약 2,900만 명)의 약 2.2%를 점하는 엄청난 숫자이다. 다병력 보유국별 순위를 보면 중국(248만명), 러시아(100만명), 미국(137만명), 인도(117만명), 북한(108만명), 한국(69만명)의 랭킹으로서 한국은 세계 제6위를 마크함으로써 경악을 금치 못하게 된다"고 지적하고, "영국(31만 명), 독일(23만 명), 프랑스(31만 명), 일본(23만 명) 등은 한국 보다 적은 병력을 갖고 있으며", "한국은 병력만 많았지 속빈 강정이나 다름없는 군사력"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아울러 무기체계와 각종 장비가 고도화ㆍ현대화하지 못하고, 육군 편중의 불균형이 날로 심각해지는 것은 후진국 내지 정치 불안정 국가의 특징임을 밝히고 있다.
육군이 전체 군의 80%가 넘는다는 것은, 그리고 정규군의 병력이 적정 규모(인구 대비 5%, 즉 23만명 가량)를 훨씬 넘는 무모한 숫자라는 것은 육군이 해군이나 공군 등과 달리 정치성이 강한 군대임을 감안하면, 한국군이 국가 방위용보다는 정권 방어용이 아닌가라는 의심마저 든다.
모병제 통한 군비 절감 및 국방력 강화, 국가경쟁력 강화 논의 시작해야
이런 상황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성적인 논의, 과녁을 정확히 하고 화살을 쏘는 신중함이 필요하다. 군 가산점을 계속 원하는 남자들이나, 남녀불평등을 해소하겠다는 여성들이나, 또는 군대 가기 싫어 갖가지 방법을 동원하고 싶은 사람들(사실은 우리 모두가 그렇다), 신앙을 이유로 병역을 거부한 사람들을 모두 만족시키려면, 그리고 미래사회의 노동의 성격을 고려하고 국가경제의 규모 등을 감안하면, 방법은 단 한가지이다. 그것은 지금의 국민개병제에서 모병제로 바꾸는 길 뿐이다.
개병제에서 모병제로의 전환은 첫째, 현대전의 개념 변화에 따른 당연한 추세로서 한국군을 최첨단화하고, 전력을 극대화함으로써 전쟁억지력을 증강시키며, 둘째, 과도한 국방예산을 적절히 운용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며, 셋째, 남북한 공히 현재와 같은 소모적 군비경쟁을 줄이고 평화 정착을 위한 첫걸음 디딘다는 의미가 있다. 이는 한국의 병력수를 줄여야 북한의 병력수를 줄이라고 할 근거가 마련된다는 뜻으로, 북한이 개혁 개방을 쉽사리 못하고 있는 것은 바로 보수적인 군의 입김이 강하기 때문이라는 인식을 바탕에 깔고 있다. 북한 군부가 가진 힘의 근거가 되는 병력수를 감축하도록 유도하여 북한주민의 군 복무 기간과 군의 총병력수가 줄어들면, 북한체제의 변화는 당연히 변화할 수밖에 없으며, 이를 통해 체제 변화를 유연하게 이끌어 내야 한다.
넷째, 현대사회가 요구하는 다양한 능력을 습득하여 세계인과 경쟁하기 위해서도 2년이 넘는 군복무 기간은 국가와 개인에게 너무나 큰 타격이다. 즉 국가경쟁력 강화의 차원에서도 모병제를 실시해야 한다. 예를 들면 국비유학생을 선발함에 있어 연령 제한을 남녀 공히 같은 나이로 한다면 그것은 큰 모순이다. 현재와 같은 선발 요건에서라면 남성은 여성보다 시험 볼 기회가 2~3회 적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문제를 없애기 위해서라도 징집제도에 관한 논의가 시작되어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모병제 논의가 기밀이라는 이름으로 성역화한 금기의 벽을 허물고, 투명한 사회를 만들어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라는 점이다. 모병제 논의를 위해 투명하고 정확한 정보를 군이 제공하고 국민 모두가 알아야 하며, 그 과정에서 정보민주화가 진행된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이제 모병제에 관한 논의를 사회가 진지하게 시작할 때가 되었다고 본다.
* 이선호 박사의 논문은 인터넷에 공개되어 있습니다. <전문을 다운로드하시려면 이곳을 클릭!>
* 기타 징병제 폐지 관련 각종 매체의 기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월간조선> 1999년 12월호 - 징병제도 폐지확산
<연세춘추> 제1389호(2000년 4월 10일자) - 군복무기간 단축, 나아가 모병제로의 전환을 모색한다
<딴지일보> 2001년 4월 24일자 - 징병제를 폐하라 (1)
<딴지일보> 2001년 5월 9일자 - 징병제를 폐하라 (2)
<딴지일보> 2001년 5월 23일자 - 징병제를 폐하라 (3)
<인권하루소식> 제1909호(2001년 8월 3일자) - "대체복무, 인권개선에 큰몫"
<제주일보> 2001년 12월 7일자 - '軍=男=必' 사회 통념 깨뜨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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