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4일 한국개발연구원(KDI)이 내놓은 '비전 2001' 과제를 두고 교육, 노동계를 중심으로 격렬한 논란이 일고 있다. 그런 가운데, KDI에 대한 완전히 상반된 인식을 보여주는 2개의 글이 조선일보와 진보적 일일매체 중 하나인 <일일문화정책동향>에 실려 흥미로움을 던져주고 있다.
KDI는 박정희 군사독재 시절에 성장가도를 달리기 위해 설립되어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등 굵직한 경제개발 프로젝트를 실질적으로 만들어 낸 최고의 국책연구기관. 이번 KDI의 '비전 2011'도 경제개발을 취지로 한 것이다. 하지만, 한국경제개발연구원이 아닌 이상 '경제성장 지상주의'만을 고집해서는 안 된다는 비판이 차츰 거세지고 있는 형편이다.
이번에 씌인 두 글은 같은 보고서를 두고 서로 상반된 인식을 보이고 있다는 점 뿐만 아니라, 이런 비판을 둘러싼 견해가 서로 충돌하고 있다는 점에서 재미있다. 조선일보의 경우 '경제성장 지상주의'에 동의하면서 '분배'보다는 '성장'을 우선시하는 대표적인 우익보수주의 일간지이기 때문에 당연히 환영한다는 입장을 나타내고 조심스럽게 현실 실천가능성을 타진하는 입장을 나타내고 있다.
이에 반해 <일일문화정책동향>은 성장 위주의 경제지상주의가 삶의 황폐화와 인간적 가치의 상실로 이어졌던 지난 역사를 상기시키며 KDI 같은 국책연구기관이 패러다임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독자들이 직접 비교해 보길 바라는 마음에서 두 글을 전제한다.
[사설] KDI의 문제의식을 환영한다(2002-02-16 <조선일보> 2면)
한국개발연구원(KDI)주도하에 국책 ·민간 연구기관들이 공동으로 작성한 ‘2011 비전과 과제 ’보고서는 우리 사회 각 분야에 걸친 현안과제와 해결방안을 비교적 충실히 제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선 평가해줄 만하다. 특히 기존 정부정책의 틀에 구애받지않고 민간부문의 참신한 아이디어를 대폭수용해 국가의 중 ·장기 진로설정을 위한 새로운 접근법을 제시하고 있는 점이 눈에 띈다.
이번 보고서의 두드러진 특징은 모두 19개 부문에 걸쳐 다양한 이슈를 다루면서도 시장경제와 민간자율의 원칙을 일관되게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 경제논리에 충실한 대안을 모색한 탓에 기존 정부정책이나 사회관행과 충돌하는 경우가 적지 않아 이를 정책에 반영하는 데는 상당한 어려움이 예상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보고서는 고교 평준화 정책 혁파와 수도권집중 억제정책 포기, 은행주식보유한도 규제 철폐 등의 파격적인 제안을 내놓았지만 이에 대한 사회적 합의 도출이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고교 평준화 정책을 둘러싼 최근의 사회적 논란에서도 드러나듯이 아무리 논리적 타당성을 지닌 정책이라도 ‘국민정서 ’의 벽을 넘지 못할 경우 이를 실행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정년(停年)연장과 퇴직금제 폐지, 연금제도 개혁, 정부부처의 지방 이전(移轉), 공공요금현실화 등의 방안도 사회적 논란의 소지가 많아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있는 사안들이 아니다.
더욱이 정권 말기를 맞아 이같은 민감한 이슈들을 풀어나가는 데 필요한 정치적 리더십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이번 보고서에 대해 ‘현실성을 결여한 아이디어 모음집 ’에 불과하다며 폄하(貶下)하고 있다. 또 역대 정권의 유사 보고서처럼 ‘청사진 제시 ’에 그친 채 결국 사문화(死文化)할 것이라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2011 비전 ’이 제기하고 있는 이슈들은 우리나라가 장기적으로 도약하기 위해 반드시 다뤄야 할 문제라는 점에서 이를 폐기처분하는 것은 엄청난 국가적 낭비가아닐 수 없다. 물론 기존 정책을 마무리하는 것도 벅차보이는 현 정권이 이번 보고서에서 제시하고 있는 새로운 정책과 노선을 추진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결국 이는 차기정권의 과제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보고서가 제기한 새로운 문제의식과 접근법을 사회적 공론의 장(場)에 부쳐 차기정권이 이번 연구의 성과를 자연스레 넘겨받을 수 있도록 여론을 수렴하는 것은 지금부터라도 서둘러야 할 일이다. 이것이 현 정권이 맡아야 할마지막 중요한 과제다.
[논평] 한국개발연구원(KDI), 패러다임 바꿔라(2002-02-19)
지난 14일 발표된 KDI의 '비전 2011' 보고서를 두고 이런 저런 비판들이 쏟아지고 있다. 가장 핵심적인 비판은 KDI가 여전히 20세기를 주름잡았던 낡은 경제지상주의 패러다임에 매몰돼 있다는 것이다.
경제지상주의는 분배보다는 성장을 우선시함으로써 개인적·집단적 차원에서 부의 양극화를 가져왔다. 뿐만 아니라, 삶의 질적 측면보다 양적 측면을 더 중시하고, 인간적 가치보다 자본적 가치를 우선시함으로써 삶을 황폐화시켰으며, 무분별하게 환경을 파괴하는 등 여러 가지 폐해를 낳은 바 있다.
20세기 후반부터 경제지상주의 논리가 지니는 이러한 폐해를 극복하고자 하는 인류의 노력이 다양한 차원에서 눈부시게 전개되기 시작했다. 참여와 자치를 통해 부와 권력의 분배정의를 실천하려는 민중·시민운동, 인간적 가치를 찾으려는 교육운동, 삶의 질적 조건들을 변화시키려는 문화운동, 인간과 환경의 조화를 되찾기 위한 환경운동 등이 그것이다.
20세기 후반 NGO들을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전개된 이러한 운동들이 인류평화와 번영을 위해 절실한 움직임으로 받아들여짐에 따라, 이제는 국가기구(GO) 차원에서도 인간적 질서와 문화적 가치를 회복하려는 노력이 점차 확대되고 있는 추세이다.
이런 점에서 이번 KDI의 '비전 2011' 보고서는 우려와 걱정을 낳기에 충분하다. 문화뿐만 아니라 교육, 노동, 복지 등 인간적 가치를 지녀야 할 대부분의 분야에서 오로지 경제적 성장을 위한 도구적 과제들만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이는 미국 중심의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부합되는 내용들이라는 점에서 더 큰 우려를 낳고 있다.
물론 처음부터 경제발전을 목적으로 한 보고서였다는 점에서 일견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지만, 최소한 각 분야가 지니는 독자성과 경제적 특수성은 고려돼야 했다. 예컨대 기부금 입학제의 단계적 허용을 권고하는 보고서의 내용은 공교육을 포기하겠다는 선언과 크게 다르지 않으며, 고용 유연화를 권고한 것은 국제금융자본과 다국적 자본의 이익을 보장함으로써 민중의 고통을 외면하려는 것과 같다.
우리는 지난 50년 간 성장을 위해 숨가쁘게 달려왔다. 그 과정에서 충분한 빵을 얻었지만, 빵의 평등한 분배에 있어서는 실패했다. 공평하게 빵을 분배하는 법과 제도적 장치를 합리적으로 마련하는 정치시스템 창출에 있어서도 실망스런 결과를 낳고 말았다.
물질적 삶은 윤택해졌지만, 정신적 삶은 빈곤해졌다. 물질적 삶이 윤택해졌다고는 하지만, 빈부의 차는 나날이 커져가고 있고, 문화는 황폐해져 있으며, 교육 또한 비정상적인 행태를 보이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현실을 감안할 때, 21세기의 초반에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할 중·단기적 과제는 경제논리보다는 부와 권력의 분배정의와 인간적 가치의 회복을 위한 계획의 수립에 있다고 판단된다. 후진적인 정치, 양극화된 부, 황폐화된 삶을 다시 정상으로 되돌리려는 노력 여하에 국가의 백년, 천년 명운이 달려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KDI를 포함한 모든 국책연구 기관은 이러한 점을 인식하고, 낡은 20세기 경제중심 패러다임을 시급히 버려야 할 것이다. 문화분야 과제 또한 경제논리에서 벗어나 삶의 질을 제고하는 데 방향을 맞춰야 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쏟아지는 비판이 KDI 무용론으로 통일될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국민의 삶을 보다 풍요롭고 윤택하게 하지 않는 국책연구기관이란 차라리 없느니만 못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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