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민의 시선이 19일 방한한 부시 미 대통령의 일거수일투족에 쏠려있는 가운데 작금의 한미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경제뉴스 하나가 그 뒷켠 그늘에서 조용히 기지개를 켰다. 19일 늦은 오후 8시에 보도 된 SBS 뉴스 가운데 한 꼭지인데, 여기 소개한다.
"현대자동차는 오늘(19일) 미국차 백대를 사주기로 미국 업체와 조인식을 가졌습니다. 한 대 5천만 원대에서 사서 그 반값인 2천5백만 원대에 택시업자에게 판다는 것입니다. 대당 2천5백만 원씩의 손해를 감수하는 셈입니다. 날로 거세지는 미국의 통상압박에 대한 대응책이라지만, 반발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SBS 8시뉴스, '미국차 사주기'정책…국내업계 반발, 2002.2.19)
정부가 미국의 완성차를 구매해서 대신 판매해주기로 했다고 한다. 이는 미국의 통상압력을 피하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이해된다. 지난 한 해 60만대의 자동차를 미국에 수출한 바 있으니 정부로서도 미국의 요구를 마냥 거절하기는 어려웠을 터. 그렇다 하더라도 이번 일은 크게 잘못됐다는 느낌이다.
완성차를 구매해서 팔아주는 일은 국제적으로도 관례가 없는 일이다. 일본의 경우, 미국과 통상마찰이 심화됐을 때 자동차부품을 판매해 줌으로써 고비를 넘겼다. 게다가 통상문제에는 무엇보다도 선례가 중요한데, 수요가 없는 외국차를 억지로 사줌으로써 향후 통상정책에 큰 부담으로 작용할 수 밖에 없게 됐다.
미국의 억지주장에 당당히 맞서 할 말을 하지 못하는 정부의 줏대없는 자세도 문제다. 미국은 이전부터 자국차의 한국내 판매부진이 한국정부가 책정한 높은 관세율 때문이라고 공공연하게 비난하며, 현행 8%인 관세율을 2.5%로 낮추라는 등 내정간섭적인 발언을 일삼아 왔다.
그러나 똑같은 관세를 적용했지만 올해 유럽차 판매량은 50% 이상 늘었고, 미국 차는 3.4% 줄어들었다. 이는 미국이 주장하듯이 미국차의 판매부진이 관세율 때문만은 아니라는 증거다. 게다가 국내 자동차 관세율은 유럽 자동차보다도 2% 낮다. 더 이상 낮아지면 한국 자동차의 경쟁력 자체가 위태롭게 된다.
IMF 이전 국내 수입차시장에서 2대 중 1대 꼴의 점유율을 보였던 미국산 자동차가 지난해 5대중 1대 꼴 이하로 뚝 떨어진 것은 차체가 커서 연비가 떨어지고 유럽차보다 마케팅 능력이 뒤지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또한 외환위기 이후 미국차의 딜러망이 흐트러진 데다 유럽차에 대한 인식이 상대적으로 좋아진 것과도 관련이 있다.
정부는 이러한 점들을 미국에 일깨워 줘야 한다. 한국에 모든 책임을 뒤집어 씌우고 자신의 결함은 회피하는 미국의 오만방자한 패권주의를 마냥 묵인하고 허용해서는 안된다. 상거래에도 도가 있는 법. 수요도 없는 완성차를 언제까지 대신 판매해 줄 것인가?

(동아 1면, 2002.2.20)
미국의 통상압력은 자동차 이외 모든 품목에 걸쳐 전방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부시의 '악의 축' 발언 이후 한국민들이 한반도의 전쟁과 평화 가능성에 목숨 걸고 있는 사이, 미국은 그 뒤에서 한국의 두 손, 두 발을 다 묶고 쌈지돈을 털어가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듯한 인상이다.
지난달 말과 이달 초에는 정부 수립 이후 최초로 미국산 쌀 3만t이 공식 수입되어 태평양을 건너왔다. 국내 쌀 뿐만 아니라 수입 쌀 재고(132만석)까지 남아도는 상황에서, 정부는 미국산 쌀을 수입해 주기 위해 쌀 수입물량의 입찰 조건을 'US NO.3' 규격에서 'US NO.1' 규격으로 바꾸어야만 했다.
이 모든 게 한편으로 건스모크를 피워대면서 다른 한편으로 통상압박을 가하고 있는 '불량국가' 미국을 무마하고 달래기 위한 꽃다발공세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미국산 수입 쌀은 향후 술, 과자, 떡, 라면 등 식품가공용으로 사용될 계획이라고 한다.
미국은 또한 수입철강품목에서도 한국 정부에 강력한 압박을 가하고 있다. 자신의 결함을 약한 나라에 뒤집어씌워 불평하는 버릇은 여기서도 그대로 반복된다. 미국의 철강회사는 30%가 파산 직전이고, 철강가격이 20%나 떨어진 상태로 알려져 있다. 미국 철강산업이 회생하기 위해서는 과잉생산설비를 해소하는 등 뼈아픈 구조조정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데도 미국은 연일 "외국산 저가철강제품 때문에 미국 철강업계가 산업피해를 보았다"는 식으로 한국을 물고 늘어지고, 나아가 포철의 민영화 홍보, 이른 시일 내 한보철강 매각(혹은 퇴출) 등 내정에 속하는 잡다한 문제까지 거론하며 한국 정부를 압박하고 있다.
미국은 또 유전자조작농산물(GMO식품:Genetically Modified Organisms) 표시제도 완화, 의사의 약 처방 근거가 되는 '보험급여기준'을 정할 때 다국적 제약회사들의 의견을 반영, 기간 통신에 대한 외국인 지분 제한을 49%에서 51%로의 확충, 스크린쿼터 완전철폐 등 한국민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요구사항들을 무차별 토해내며 올코트 프레싱을 가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미국의 파상공세에 맞서 정부는 민족의 자존과 이익을 지킬 의무가 있다. 완성차를 구매해서 대리 판매하고, 룰을 바꿔가면서까지 미국산 쌀을 수입하는 대미 저자세. 굴욕외교는 지난 날로 이미 족하다. 한반도 평화를 마국에 저당잡히고 있는 약소국의 입장이라 발언권에 한계가 있다지만 그래도 할 말은 해야 한다. 정부는 이제라도 미국에 당당하게 대처해 주기 바란다.
한반도 상공에 전운을 감돌게 했던 호전적인 부시가 최전방에 위치한 도라산역을 방문해 평화를 노래했다. 20일자 국내 각 일간지 만평들은 하나같이 이러한 모습을 전하면서 그 옆에 김대중 대통령이 F15기 구매계약서에 침통하게 서명하는 그림을 그려넣었다.

(경향신문, 2002.2.20 만평)
부시가 한 입으로 전쟁을 농하고 다른 한 입으로 평화를 노래한 것이 결국엔 미국의 군산복합체를 살찌우기 위한 포석임을, 또한 부시가 '악의 축'과 공존하고 있는 이 땅을 부러 찾은 까닭이 10조원대에 달하는 전투기판매에 있음을 뉘 모를까.
만약, 다중의 짐작대로, 부시가 F15 전투기 판매에 성공한다면, 그는 미 정부가 이전부터 가해왔던 일련의 대한 통상압력 시리즈에서 가장 크고 빛나는 승리를 거두는 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에게 대미굴욕사의 한 장을 더하는 아픈 기억으로 남게 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위 기사는 <하나리포터>에 실렸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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