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비올라'의 신화적인 영상공간

베를린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비디오설치전

등록 2002.02.22 07:31수정 2002.02.26 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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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미술에서 비디오와 같은 영상매체를 작품의 도구로 사용하는 소위 '매체미술(Medienkunst)'은 끊임없는 기술의 발전을 배경으로 점점 중요한 쟝르의 하나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

그럼에도 다른 전통적인 미술쟝르에 비해 매체미술은 여전히 관객들에게 보다 보편적인 감동으로 다가오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특히 전시장 여기저기에 칸막이로 만들어진 그 어두컴컴한 '비디오방'을 기웃거리며 보통 수 분에서 수십 분에 이르는 한 작품을 끝까지 충분히 소화해내기란 여간 인내심이 필요한 게 아니다. 이는 아마도 필자만의 경험은 아닐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매체미술이 하나의 작품전체를 짧은 순간에 직관적으로 감상할 수 있는 전통적인 회화와도 다르고 또 화려한 티브이광고나 현란한 뮤직비디오의 영상에 이미 길들여진 대중들의 눈을 유혹하기가 쉽지 않은 점에서도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매체미술이 다른 쟝르와는 분명히 다른 방식의 언어를 추구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 다른 언어란 마치 어떤 매력을 느낀 한 그림 앞에 한참동안 사색적인 감상에 빠져드는 것과도 같은 긴 호흡을 필요로 한다. 물론 그 긴 호흡이 지루한 숨쉬기가 되지 않기 위해선 함축적이고 상징적인 영상의 긴장감이 자연스럽게 관객들을 사로잡아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베를린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현재 열리고 있는 '빌 비올라(Bill Viola)'의 비디오설치전(2002년 2월9일 ~ 5월5일)은 약간의 지루함도 느낄 수 없을 만큼 보기드문 영상의 힘을 보여준 전시회라고 할 수 있다.


비올라의 작품세계

제 2회 광주 비엔날레에도 참가했고 현재 매체미술작가로서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는 비올라는 70년대 초엽 뉴욕 주에 있는 시러큐스(Syracuse) 대학교에서 주로 전자매체의 실험을 통해 음향예술(Klangkunst)과 비디오설치(Videoinstallation)를 공부했고 개인전이나 그룹전에서 선보였던 단채널 비디오 작업들은 그를 일약 국제적으로 유명하게 만들었다.


또한 1995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는 미국대표작가로 참여하기도 했고 1997년부터 2000년까지 미국과 유럽의 많은 도시들에서 대형전시회를 개최하였다.

매체미술의 개척자로서 비올라의 작업은 주로 미술사와 영성(Spiritualitaet) 그리고 개념 및 지각심리학적인 질문과의 집중적인 대결 끝에 이루어졌는데 이번 베를린 구겐하임 미술관의 전시를 위해 비올라가 특별히 새롭게 계획한 다섯 개의 디지털 영상작업에서는 자연적인 순환의 과정 속에서 항구적으로 진행되는 탄생과 죽음 그리고 부활이라는 근본적인 주제를 '고잉 포오쓰 바이 데이(Going Forth By Day)'라는 제목 아래 신화적, 서사적으로 다루고 있다.

(비올라에 따르면 이번 전시명은 육체의 어둠으로부터 해방되어 빛으로 충만한 저 너머의 세계로 가는 영혼의 안내서인 고대 이집트의 '사자의 서(死者-書)' 제목을 영역한 것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번 전시의 형식적인 특징은 수 미터에 달하는 커다란 영상을 영사막없이 미술관의 벽에 직접 투사함으로써 벽에 직접 색깔을 바르는 르네상스시대 프레스코화(Freskenmalerei)와 같은 효과를 추구했다는 점에 있다.

이에 대해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의 감독관 '한하르트(John G. Hanhardt)'는 '비록 빌 비올라가 현대미술의 한 장르로서 움직이는 영상작업을 할지라도 르네상스 예술가들로부터 받은 영향과 그들과의 정신적인 친화성은 명백하다'고 전시안내문에 소개하고 있다.

실제로 이번 전시초안에서 비올라는 이테리 파두아에 있는 스끄로벤니(Scrovegni) 예배당을 위한 지오토의 프레스코화를 결정적인 영향으로서 인용하고 그 프레스코화들을 위대한 설치작품이라고 불렀는데 이미 '인간의 도시 (The City of Man. 1989)'나 '인사(The Greeting.1995)'와 같은 비올라의 초기 작품들은 화판화나 폰토르모(Pontormo)의 종교적 그림들의 영향하에서 방향을 잡았고 시간을 초월한 구성과 풍경 그리고 몸짓과 감정들을 주제로 표현했었다.

하나의 방 - 다섯 개의 이야기

구겐하임의 전시공간에 들어서기 위해서 관객은 첫 영상의 빛속으로 들어서야 한다. 전시장으로 들어서는 문을 감싸고 펼쳐지는 그 첫번째 영상 '불-탄생(Feuer-Geburt)'과 왼쪽벽면 전체를 길게 차지하고 있는 '길(Der Weg)'은 마치 묵직하고 약간은 단조로운 배경음악처럼 흐르고 있다.

그리고 전시장 입구와 마주보는 벽면에 걸린 '대홍수(Die Sintflut)'와 오른쪽벽에 나란히 상영되고 있는 '여행(Die Reise)'과 '첫 빛(Das erste Licht)' 에서 크고 작은 사건들이 일어난다

또 무엇보다도 불과 더불어 비올라의 중요한 상징언어 중의 하나인 물이 '길(Der Weg)'을 제외한 4개의 작품에서 모두 중요한 요소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 눈길을 끈다.

이 다섯개 디지털 영상작업의 상영시간은 각각 대략 35분이 소요되는데 미술관이라는 하나의 통일된 공간에서 시작과 끝을 모두 동시에 반복하면서 서로서로 영원한 나선의 돌림노래를 부르듯이 흘러간다.

또 전시장 천정에는 영사기들 외에도 스피커들이 곳곳에 매달려서 음향효과를 더해주고 있다. 이러한 공간에서 관객은 편히 앉거나 누워서 또는 자유롭게 움직이며 전체적인 순환의 일부로서 구성된 각각의 이야기들을 독립적으로 혹은 통일적인 관계속에서 경험할 수 있다.

그럼 이제 다섯개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보자.

1, 불-탄생(Feuer-Geburt)

불인지 물인지 모호하고 짙은 어둠의 세계로부터 한 인간의 형상이 솟아 오른다. 그 육체는 죽음과 부활 사이의 무의식적인 상태 속에서 마치 자궁 속의 태아마냥 부유하고 있다.

강렬한 오렌지 빛깔의 광선들이 출렁이는 수면을 파고들어 지난날 불속에서 사라져간 존재의 여운을 반사하듯 빛들은 산란한다. 인간의 존재는 물 속에서 하나의 길을 찾고 있다. 그는 그의 부활을 위한 어떤 형태와 물질을 찾고 있는 것이다.

2, 길(Der Weg)

하지(夏至)의 아침햇살 속에 숲속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가로지르는 사람들의 끊임없는 행렬이 보인다(이 긴 행렬을 표현하기 위해 3개의 화면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갖가지 인생역정을 가진듯한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그들만의 고유한 속도와 움직임으로 자신의 길을 가고 있다.

행렬은 시작도 끝도 알 수없다. 아무도 돌아오지 않고 그들은 오로지 계속해서 앞을 향해 나아갈 뿐이다. 도대체 그들은 어디서 와서 어디를 향해 가는 것일까? 인간들은 피안과 차안의 중간에서 방황하며 돌이킬 수 없는 역사의 흐름처럼 정처없이 나아갈 뿐이다.

3, 대홍수(Die Sintflut)

일상의 소란과 분주함으로 가득찬 거리 뒤로 깔끔한 돌집이 추분(秋分)의 맑은 빛 속에 서 있다. 거리에서는 소소한 사건들이 일어난다. 가족들이 집을 떠나고 사람들은 각자에게 소중한 무엇인가를 열심히 운반한다.

모든 사람들의 행동들은 조금씩 증폭되는 긴장감 속에 사로잡히고 일련의 경고음들 이후에 거리는 모든 이들의 생존을 위한 노력과 함께 완전히 공황상태로 빠져든다.

갑자기 돌집의 양쪽 창문과 정문을 통해 폭포처럼 물이 쏟아지며 거리 위의 모든 것들을 쓸어가 버린다. 마치 노아의 홍수와도 같았던 순간이 지나자 거리는 다시 고요를 찾는다. 돌집은 파괴되지 않고 여전히 서있고 텅빈 거리는 한낮의 햇살로 빛난다.

4, 여행(Die Reise)

동지(冬至)의 오후, 작은 집 하나가 호숫가 언덕 위에 서 있다(이 집의 구조는 묘하게 뒤틀려 있어서 집 스스로 뿐만아니라 배경의 호수나 섬들과도 원근법적인 시점이 일치하지 않는다. 그래서 마치 원근법이 탄생하기 이전의 회화나 또는 하나의 연극무대를 보는 듯한 느낌을 불러 일으킨다).

이 집안으로 병든 늙은이 하나가 그의 아들과 며느리의 간호를 받으며 침대에 누워있는 것이 보이고 문밖에는 한 남자가 감시를 하고 있다. 그리고 아래 호숫가에는 망자의 소지품들이 차곡차곡 배에 실리고 있다.

시간이 흘러 사그라드는 숨을 삼키는 늙은이와 그의 꿈만을 홀로 남겨두고 아들과 며느리는 집을 떠난다. 그의 수많은 인생의 추억을 간직한 집은 굳게 잠기고 망자는 이제 호숫가에 기다리고 있는 그의 부인 앞에 나타난다. 그들은 신의 축복을 받은 섬으로 가는 배를 함께 타고 떠난다.

5, 첫 빛(Das erste Licht)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난 것이 틀림없다. 바위 앞에 기진맥진한 구조대원들과 넋이 나간듯 파리한 얼굴의 한 여인이 망연히 물가에 서 있다. 황야는 격류에 휩쓸렸고 그 여인의 친구들과 이웃들이 살던 계곡은 물에 잠기고 만 것이다. 그 여인의 아들 마저도...... 희생자를 구하기 위해 구조대원들은 밤새 일했지만 희망은 점점 사라져 간다.

춘분(春分)을 맞이하는 여명이 밝아오는 동안 구조차량은 떠나고 남은 구조대원은 서서히 그들의 장비를 정리한다. 구조대원들과 여인은 이제 조용히 기다리다 잠이 든다. 모두들 잠든 사이 실종된 아들은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오지 않고 물 속에서 떠올라 승천한다. 곧이어 갑자기 한바탕 소나기가 쏟아지자 모두들 잠에서 깨어나 떠난다.

순환 속에서

마지막 장면이 끝나자 잠시 불이 꺼지고 곧이어 다시 첫장면이 시작된다. 관객들은 이 전시장을 쉽게 떠나지 못한다.

그들은 어느덧 춘하추동과 밤낮으로 함께 이어지는 계절과 빛의 순환 속에서 또한 돌집에서 폭포처럼 쏟아지는 물소리와 호수 위로 떠나가는 배의 엔진소리 그리고 소나기 소리 등 긴장감을 잃지 않고 이어지는 음향의 순환 속에서 각자 화면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되어 있는 듯하다.

비올라의 음향, 빛, 공간에 대한 감수성과 서양 및 극동의 예술과 정신성에 대한 깊은 지식은 물론 그의 기술적인 노련함이 함께 흐르고 있는 이 영상들은 관객들을 시간성을 초월하는 영감과 다층적이고 명상적인 관조로 이끌고 있는 것이다.

덧붙이는 글 | 베를린 구겐하임 미술관에서는 수요일과 일요일에 점심식사와 함께 하는 주제발표와 작가와의 대담 및 특별강연 등 이번 전시회와 관련된 많은 행사를 전시기간내내 준비하고 있다. 특히 베를린 구겐하임 미술관은 월요일엔 입장이 무료다.
그래서 필자는 이번 전시회를 두 번이나 보게 되었다. 유명미술관의 무료입장이라는 정책은 잠재적인 미술인구의 저변을 확대하는데 분명히 일조하고 있다.

덧붙이는 글 베를린 구겐하임 미술관에서는 수요일과 일요일에 점심식사와 함께 하는 주제발표와 작가와의 대담 및 특별강연 등 이번 전시회와 관련된 많은 행사를 전시기간내내 준비하고 있다. 특히 베를린 구겐하임 미술관은 월요일엔 입장이 무료다.
그래서 필자는 이번 전시회를 두 번이나 보게 되었다. 유명미술관의 무료입장이라는 정책은 잠재적인 미술인구의 저변을 확대하는데 분명히 일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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