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2002.02.22 17:45수정 2002.02.25 11:02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요즈음은 어떠한지 모르겠는데 예전에 군에 나가면 간절히 바라는 소원이 세 가지 있었습니다. 하나는 배부르게 밥을 많이 먹을 수 있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둘은 잠을 충분히 잘 수 있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셋은 겨울에 춥지 않게 지냈으면 하는 것입니다. 제대한 지 벌써 20년이 되었으니까 지금은 이러한 소원도 많이 변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세 가지 소원에 그 당시 동료들이 자주 말했던 바람이 또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구타가 없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내가 군 생활하던 때는 그렇게 많은 편은 아니었는데 선배들 이야기를 들으니 꽤 심했던 모양입니다.
사회가 민주적으로 변화하면서 그동안 그늘에 가려졌던 진실들이 하나하나 백일하에 드러나고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군에서의 의문사입니다. 군 당국이 발표한 사인이랑 가족과 관계되는 사람들이 제기하는 사인이 달라 제기되는 문제가 적지 않다고 합니다. 그런 소식을 요즈음 들어 가끔 듣고 있는데, 그 때마다 악몽과 같이 군에서 당한 구타가 생각나서 몸이 나도 모르게 떨리곤 합니다.
정확하게 1980년 가을의 일입니다. 일병 고참으로 식기당번 총책임을 맡아 열심히 일하고 있을 때입니다. 나와 바로 밑에 들어온 부하 두 명 등 우리 세 명은 하루에 세 번 정신 없이 30여 개의 식기들을 깨끗하게 닦았습니다. 그것도 바쁜 시간을 쪼개서 하는 바람에 말 그대로 손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빨리 닦아야 했습니다.
어느 날 저녁에 내 위의 한 상병이 몇 시까지 탄약고 앞에 식기당번들을 집합시키라고 말했습니다. 또 한 고참이 식기를 세세하게 검사한 모양입니다. 어쩔 수가 없습니다. 우리 셋은 정해진 시간에 그곳으로 가서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습니다. 이윽고 잠시 뒤에 악명 높은 이 아무개 상병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는 우리들에게 식기당번의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며 군기가 빠져서 그렇다고 꾸짖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가슴을 군화발로 세게 쳤습니다. 우리들은 누구 할 것 없이 뒤로 벌러덩 넘어졌습니다. 지금도 그 아픔의 충격이 생각납니다. 맞음과 동시에 숨이 턱 막혔습니다. '내가 여기에서 이렇게 죽는구나' 하고 속으로 신음하며 넘어졌습니다.
그 해 12월의 일입니다. 멀리 야외훈련을 갔다왔습니다. 소대원들 모두 내무반에 들어와 피곤한 몸으로 잠시 쉬고 있을 때입니다. 우리 일병 고참들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지친 몸을 이끌고 여러 가지 잡다한 일로 바쁘게 움직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하는 일이 일부 고참들 눈에 못마땅했던 것 같습니다.
내무반 가운데 복도에 또 우리들은 무릎을 꿇고 그 몸서리치는 구타를 견뎌내야 했습니다. 우리들은 정신이 멍할 정도로 맞고 나서도 뛰어다니며 일을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잊을 수 없는 일은 1981년 2월의 사건입니다. 상병으로 진급한 지 얼마 뒤에 제주도에서 입대한 신병과 같이 야간 근무를 나갔습니다. 그 당시 우리 소대는 강가 경비를 단독으로 맡아서 밤낮 할 것 없이 여러 초소에 두 명씩 근무를 섰습니다. 낮은 괜찮지만 밤 근무는 견뎌내기가 정말 힘듭니다. 옷을 몇 개나 껴입는지 모릅니다. 신발은 '설화'라고 오늘날의 털신과 같은 것을 신었습니다.
강가로 무장공비들이 침투한다고 하여 우리들은 직접 실탄을 갖고 경계에 임했습니다. 밤에 나가서 보통 3시간 내지 4시간을 서는 관계로 지루하기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춥고 배고프고 졸립니다. 우리 둘은 고향 이야기도 하고, 여자 친구 이야기도 하고, 노래도 조용히 부르면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몸이 더 춥기 때문에 쉬지 않고 계속 몸을 움직여야 합니다. 몸을 좀 덥게 하기 위해 난 신병에게 총검술을 가르쳤습니다. M16 소총에 칼을 꽂고 마주보며 신병이 잘 할 수 있도록 상세하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탄알을 넣은 상태로 총검술을 한 것입니다. 당연히 방아쇠가 안전 위치에 가 있으려니 하고 생각했습니다. 거기에 가 있으면 방아쇠를 눌러도 총알이 나가지 않습니다.
어느 정도 추위가 물러갔다 싶어 총검술을 그만두고 강을 향한 원래의 자리에 놓았습니다. 그 때였습니다. "땅!"하는 소리와 함께 내 총에서 총알이 발사되었습니다. 그 추운 겨울밤에 적막을 깨는 총소리는 유난히 크게 들렸습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입니다. 금방 위병소에서 무전기로 연락이 왔습니다. 두 명 근무자를 보낼 테니 교대하고 돌아오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정신이 아찔했습니다. 오발탄 사고가 얼마나 큰지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다행이다 싶었습니다. 하늘이 나를 도와준 것입니다. 만약에 총검술을 신병과 마주보고 할 때에 방아쇠에 손가락을 넣었더라면 그는 내가 쏜 총알에 목숨을 잃었을 것입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방아쇠가 안전 위치에 가있지 않고 반자동 위치에 가있었던 것입니다. 총을 제 위치에 내려놓으면서 나도 모르게 방아쇠를 당겨 총알이 강을 향해 발사된 것입니다.
소대장으로부터 야단을 맞았습니다. 내무반에 있는 상황실 근무를 서는 고참 병장으로부터도 질책을 받았습니다. 잠이 올 리 만무합니다. 이렇게 간단하게 끝날 일이 아닙니다.
다음 날 아침 식사가 끝난 다음에 식당에 소대원이 모여 오발 사고를 낸 나에 대해 성토대회(?)가 열렸습니다. 더군다나 이등병도 아니고 상병이 그런 사고를 냈으니 그럴 만도 했습니다. 난 군기가 빠졌다는 말을 또 들으며 고참의 구타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야외 화장실 뒤에 가서 구타하는데 긴 장대를 이용하여 때리는 것이었습니다. 소대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상병으로서의 위신을 떨어뜨렸으니 당연히 벌을 받아야 된다고 마음으로 생각했습니다. 이를 악물고 꾹 참았습니다. 그런데 나중엔 너무나 아프고 참을 수가 없어서 고참이 내리치는 그 장대를 잡고 그만 때리라고, 앞으로 잘하겠다고, 절대로 사고 내지 않겠다고 울부짖었습니다.
신문과 시사 주간지나 방송에서 군대에서의 사고 이야기가 나오면 꼭 옛 군대 생활이 떠오릅니다. 33개월 동안 그런 속에서 무사히 군 생활을 마치고 제대한 것이 나에겐 꿈만 같습니다. 그 당시 군 생활했던 사람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대부분 그러한 고통과 아픔을 겪으며 오직 제대 날짜만을 손꼽으며 참고 견디었습니다.
20년이 지난 지금의 군대는 어떠한지 궁금합니다. 초등학교 6학년이 되는 아들녀석이 군에 입대할 무렵이면 또 어떻게 군대가 변화할는지 궁금합니다. 아마 지금은 군에서 구타가 없어졌을 것입니다. 군기를 잡는다는 명목으로 인성을 있는 대로 파괴시키고, 몸을 송두리째 망가뜨리는 구타는 없어졌을 것입니다. 만의 하나라도 아직까지 그런 일이 있다면 군 당국은 명예를 걸고 발본색원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덧붙이는 글 | 이 땅의 젊은이라면 누구나 한번씩은 갔다와야 하는 군대입니다. 군 생활이 신세대에 맞게 많이 바뀌었다고 합니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군인들은 하나같이 환하게 웃는 즐거운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들의 웃음처럼 군 생활도 즐겁고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구타'라는 낱말도 없어지고, 그런 행위도 없어져서 민주국가의 군대다운 모습을 보여주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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