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2002.02.24 20:26수정 2002.02.25 01:18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20여 일 전에 아내와 같이 집 뒷길로 산책을 나갔습니다. 산을 끼고 길이 나있고 긴 둑도 있어서 전형적인 시골길을 연상하는 곳인데, 한 시간 정도 바람 쐬기엔 안성맞춤입니다. 돌아오는 길에 성당에 다니는 교우 집을 방문하여 차 한잔 마시려고 그곳으로 발을 옮겼습니다.
교우의 집이 가까워지는데 반갑게도 길목에서 그 교우를 만났습니다. 아직 유치원에 다니는 딸과 같이 어딜 다녀오는 모양인 것 같습니다. 그는 웃으며 냉이를 캐 가지고 오는 거라고 말했습니다. 얼마나 냉이와 흙 냄새가 좋은지 시간 가는 줄 몰랐다고 합니다. '냉이'라는 말에 봄이 오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습니다.
한 열흘 전에 또 그 곳으로 산책을 갔습니다. 둑길을 걸어갈 때에 아내의 발걸음이 늦어졌습니다. '웬일인가'하고 봤더니 밑을 유심히 쳐다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더니 나에게 "여기 냉이가 아주 많네요"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시골에서 태어났고 거기에서 초등학교를 마쳤지만 부끄럽게도 냉이가 있는지 없는지 난 잘 모릅니다.
아내는 여러 군데를 보며 "다음에 날이 좋을 때에 와서 캐야겠다"고 말했습니다. 난 그 말을 들으며 봄이면 거의 먹게 되는 맛있는 냉잇국을 머리에 떠올렸습니다.
오늘 11시 미사 후에 남자들이 모여서 일을 해야 한다는 전화를 어제 단장으로부터 받고, 오늘도 9시 미사 후에 성당에서 직접 들었기 때문에 안 갈 수가 없었습니다. 집에서 잠깐 낮잠을 자다 일어나 츄리닝 차림으로 편하게 성당에 걸어갔습니다.
15분 정도 걸어가는 길인데 눈앞에 보이는 논에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짚을 갖고 뭔가를 하기도 하고, 넓은 논에 뭐를 태우는지 연기가 위로 솟아오르는 광경도 보였습니다. 참새들이 가는 길가에 있는 나무 위에 앉았다가 하늘로 날아올라갔습니다. 날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습니다. 바야흐로 봄이 올해에도 어김없이 찾아왔습니다.
성당에 정해진 시간보다 늦게 갔기 때문에 아무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모두들 식당으로 간 모양입니다. 마을에 있는 큰 식당이 다른 곳으로 옮기는 관계로 탁자와 의자를 성당에서 쓸 수 있도록 주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일은 바로 그것들을 옮기는 것입니다.
식당이 멀기 때문에 그냥 성당에서 차가 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곧 자가용 한 대가 들어왔습니다. 성당 일을 보는 관리인입니다. 그는 나를 보고 퍽 반가워했습니다. 곧 짐을 가져올 것인데 미리 짐을 놓을 장소를 치우려고 빨리 왔다는 겁니다.
그는 성당에 가면 교우들이 몇 명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답니다. 그래서 그들과 같이 일을 하려고 한 것입니다. 다행히 나라도 있었으니 망정이지 없었으면 큰일날 뻔했습니다. 성당에 늦게 가서 기다렸던 것이 오히려 잘한(?) 일이었습니다.
그와 같이 일을 했습니다. 그는 감성이 참 풍부하고 재미있는 말을 잘 쓰는 교우인데, 나를 보고 오늘은 '완연히' 봄 날씨라고 했습니다. '완연히'를 강조하며 내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오늘은 그 낱말을 써야만 제격입니다. 겨울은 저만치 물러갔고 봄이 어느덧 우리들 곁을 찾아왔습니다.
세 시간 가량 일을 했습니다. 의자와 탁자의 양이 엄청났습니다. 처음 가본 교우들은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도저히 할 수 없을 것 같았답니다. 300여 개에 달하는 의자와 60여 개의 탁자이니 그럴 만도 했을 것입니다. 그것을 10여 명 되는 남성들이 한 것입니다.
2층에서 들고 내려오고, 그것을 차에 싣고, 성당까지 가지고 와서 내려놓고, 또 그것을 차곡차곡 쌓아올리고. 우리들은 계속 몸을 움직였습니다. 평소에 육체적 일을 거의 하지 않은 나는 무척 힘들었습니다.
그 불가능하다고 느꼈던 일을 다 끝내니 마음이 그렇게 홀가분할 수가 없었습니다. 단장의 차를 타고 집에 왔는데 아내와 딸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들녀석은 밖에서 친구들과 깡통차기를 신나게 하고 있습니다. 궁금했습니다. 딸을 데리고 시장에 갔으려니 생각했습니다.
몸을 씻고 잠깐 쉬려고 하는데 아내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거실로 나가봤습니다. 아내와 딸의 얼굴이 따뜻한 봄 날씨만큼이나 환하고 예쁩니다. 뭐했냐는 나의 물음에 아내는 미소지으며 냉이 캐 가지고 오는 길이라고 했습니다.
아내의 한 손에는 큰 비닐이 들려 있었습니다. 그 비닐을 들추는 순간, 냉이 냄새가 진하게 풍겨났습니다. 냉이는 비닐 가득히 들어있었습니다. 그 냄새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내는 내가 그 곳으로 올 줄 알았다고 합니다. 성당 일이 끝나면 분명히 그 곳으로 산책하려니 생각했답니다. 그렇게 많이 일하지 않았더라면 아내 말대로 집에 와서 그 곳으로 갔을 것입니다. 그러면 아내가 친구랑 딸이랑 냉이 캐는 모습을 봤을 텐데 그러지 못한 것이 아쉬웠습니다.
아내는 싱크대에 냉이를 놓고 반 가량은 냉장고에 넣었습니다. 집안 전체가 냉이 냄새로 가득 찼습니다. 우리 집에도 봄이 찾아왔습니다. 아내와 딸이 따뜻한 봄볕을 쬐면서 쪼그리고 앉아서 열심히 캔 냉이가 봄을 가져다주었습니다.
냉잇국 끓이는 냄새가 안방까지 풍깁니다. 내가 좋아하는 냄새입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딸의 정성이 가득 담긴 냉이 냄새입니다. 아버지도 맛있게 드실 것입니다. 나도 아내도 그리고 두 아이도 오늘 저녁은 맛있는 냉잇국을 먹으며 새봄을 만끽할 것입니다.
다음 번에 아내와 같이 냉이 캐러 가려고 합니다. 냉이를 캐러간다기보다 그 분위기가 좋아서 가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몇 개는 직접 캐보려고 합니다. 이번에는 잘 살펴서 잡풀을 뽑지 않고 꼭 냉이를 찾아서 캐보겠습니다. 내 손으로 냉이를 캐서 봄 냄새를 실컷 맡아보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 냉잇국을 먹어야만 봄이 진짜로 온 것 같습니다. 냉잇국 냄새가 바로 봄을 알리는 냄새입니다. 아내와 딸이 앉아서 냉이를 캐는 모습을 생각하니 절로 웃음이 나옵니다. 얼마나 아름답고 정겨운 모습이었을까요. 다음 번에는 나도 아들도 다같이 냉이 캐러 가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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