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의 모든 '정치헌금'을 금지해야

<경제포커스> 금권정치-정경유착을 청산하는 길

등록 2002.02.25 23:00수정 2002.02.26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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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라의 정치판은 돈판이라고 곧잘 말한다. 그도 그럴 것이 노태우-전두환 전직 대통령이 재임시에 청와대에 대형금고를 설치하고 재벌한테서 돈을 마구 끌어모았고, 그래서 구속되기도 했다.

그 규모가 수천억원씩에 이르나 그들은 그것을 정치자금이라고 말했다. 정치권에는 돈이 흔해서 그런지 수천만원, 수억원도 떡값이라고 부른다. 이른바 정치자금이라는 돈은 사용처가 모호하고 투자효과도 불분명하니 거래단위가 큰 모양이다.

대형부정사건이 터지면 꼭 떡값이라는 말이 등장한다. 검찰도 정치인이 먹는 돈을 떡값이라는 말로 그 의미의 중대성을 호도하곤 했다. 명백한 수뢰죄를 떡값이라고 선처하고 기업인에게는 증뢰죄를 면제해주곤 했다. 뇌물죄의 가벌성을 임의로 희석해온 것이다. 이것은 정치권에는 검은 돈의 거래가 많다보니 누구는 처벌하고 누구는 처벌하지 않을 수 없다는 소리로도 들린다.

금권정치의 뿌리는 5.16 군사쿠데타에서 찾을 수 있다. 정치군인들이 총칼로 정권을 강탈했으나 국민적 지지기반이 취약했다. 정통성, 합법성이 결여된 정권을 유지하자니 필연적으로 무력과 금력에 의존하게 됐다. 권력기관을 동원하여 반대세력을 무참하게 제거했으나 거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공갈과 협박으로 설득이 안되면 금력을 동원하여 매수하거나 회유했다. 정권유지를 위한 방책으로 채찍과 당근을 두 손에 들고 번갈아 휘둘렀던 것이다.

군사정권은 왜곡된 정치체제에 대한 국민적 반발을 경제치적을 통해 무마하려 했다. 그래서 경제제일주의를 채택했던 것이다. 그것까지는 좋았으나 정권유지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산업자본을 축적하다는 명목으로 소수의 거대재벌을 강제적으로 육성했다.

산업정책이 정치적 흥정의 대상이 되었고 정책지원이 거점산업에 집중됨에 따라 실수요자의 선정, 대형공사의 발주 등을 둘러싸고 특정기업에 정상적(政商的) 특혜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여기서 정치지금을 필요로 하는 권력과 부당이득을 노리는 금력의 이익이 합치된다. 그래서 정경유착을 근거로 하는 금권정치(plutocracy)의 시대가 개막된 것이다.

전경련이 22일 정기총회를 갖고 올해 실시될 지방선거, 대통령 선거를 명목으로 부당한 정치자금을 내지 않겠다고 공식으로 결의했다. 법에 따르지 않은 불투명한 정치자금은 제공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 말을 뒤집어 보면 과거에는 정치권에 음성적인 정치자금을 개별적이든, 집단적이든 지원했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인정한 셈이다. 그것이 자발적 헌금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말이다. 재벌총수의 집합체인 전경련의 이 같은 의지표명은 그 부담이 무시할 수 없을 만큼 과중하다는 뜻으로도 풀이된다.

전경련의 이 같은 선언은 기업의 경영환경이 크게 바뀌었음을 나타낸다. 개방체제 아래서 정치자금을 내봤자 세제-금융-정책특혜를 얻는 데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뜻한다. 국내에서도 외국기업과 경쟁하는 상황에서 정치권력이 특정기업에 특혜를 주는 것이 용이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기업경영의 투명성이 강조되고 있어 회계기술상 비자금을 조성하기도 쉽지 않다. 또 내부고발자를 염두에 두어야 하고 주주와 노조의 압력도 만만찮다. 시민단체의 감시-견제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도 정치자금은 부당이득을 기대한 성격이 강하기도 하지만 일부 기업들은 생존비용으로 인식되어 왔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정치권이 의식변화를 보이지 않자 전경련이 공동방어 차원에서 이번에 선언을 내놓았다고 해석된다.

정치자금은 제도적이든 비제도적이든, 양성적이든 음성적이든, 대부분이 미래의 부당이득을 매개로 하여 그 수수관계가 암묵적으로 이루어진다. 정치자금은 은밀성을 좋아하는 속성을 지녀 그 정체를 파악하기란 용이하지 않다. 다만 그 규모가 엄청나리라는 짐작만이 가능하다.

대통령 선거 때마다 융단폭격하듯이 쏟아붓는 선거자금을 보면 정치자금이라는 명목으로 얼마나 많은 돈을 조성하는지 알 만하다. 그런데 그 출처는 대부분이 기업이라고 보면 틀림 없다.

현행법에는 당원의 당비, 국고보조금, 후원회를 통한 한정된 후원금, 선관위를 통한 한정된 기탁금 이외에는 일체의 정치자금 수수가 금지되어 있다. 당비에 관해서는 규제가 없다. 하지만 일반 당원이 당비를 부담하는 경우는 거의 없는 것이 한국정치의 현실이다. 다만 고위당직자에게 할당되나 그 액수는 미미한 수준이다.

후원회는 개인 또는 법인으로 하되 후원횟수와 기부금액에 제한을 두고 있다. 기탁금도 개인과 법인에 따라 별도의 한도를 두고 있다. 후원회는 기업인이 야당에 돈줄을 대려면 위험부담을 각오해야 하는 맹점을 지녔다. 그래서 한나라당은 기업들이 법인세의 1%를 정치자금으로 기탁하도록 의무화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여기서 기업의 정치헌금에 관해서 심각하게 생각할 점이 있다. 그것이 양성적이든, 음성적이든 말이다. 기업의 헌금은 자금력-조직력을 가진 이익집단에 자연인과 마찬가지로 정치적 발언권을 부여하는 결과를 낳는다.

기업의 헌금은 그 형태에 상관없이 1인1표를 원칙으로 하는 보통-평등선거에 정면으로 위배된다. 국민의 대표성을 훼손하는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미국 연방선거운동법은 기업을 비롯한 단체의 정치헌금을 금지하고 있다. 또 기업이 내는 정치자금은 생산원가에 전가되어 종국에는 소비자가 부담한다. 일반 국민이 자기의사와 상관없이 정치적 반대자에게 헌금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참정권을 침해하는 행위에 해당한다.

기업이 음성적인 정치자금을 마련하려면 비자금을 조성해야 하는데 이것은 회계조작을 통해 탈세를 해야만이 가능하다. 이렇게 만들어진 정치자금은 반드시 반대급부를 요구하기 마련이다. 이런 정치자금이 문제가 되는 것은 비공개성에 따른 비도덕성에 있다.

양성적인 정치자금이라도 기업헌금은 경제정책의 수립-집행과정에 개입하여 경제질서를 왜곡시키는 문제를 안고 있다. 나아가서 금권정치의 폐단을 낳아 정치발전을 저해한다. 따라서 기업의 정치헌금은 어떤 형태이든지 금지하는 것이 옳다.

한국처럼 부패구조가 고착화한 나라에서는 정치권력이 돈을 끄는 강력한 자력을 발산한다. 따라서 기업들은 정상이윤보다 변칙지출을 통한 부당이득이 기업의 존망을 좌우한다고 믿는다. 여기서 정경유착이 이루어진다. 금력과 권력이 결탁하여 정경유착이 이루어지고 국가의 경제정책이 정치적 흥정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자유경쟁이 지켜지지 않는 정치체제에서는 기업이 경기변동 이상으로 권력이동에 민감하게 반응하는데 이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밑도 끝도 없이 터지고 있는 이른바 '게이트'라는 권력형 부정사건도 그 근저에는 검은 돈이 오가는 음습한 정치풍토에서 배태한 것이다.

음성적 정치지금은 국민의 정치의사와는 배치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따라서 정치자금이 선거결과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선거공영제의 실시가 시급하다.
▲시사평론가 김영호 씨 ⓒ 권우성
선거비용-관리의 공영화만이 공정경쟁을 보장하고 신참진입을 촉진하여 정치개혁을 이룩할 수 있다. 정치자금의 투명성만이 금력과 권력의 밀월시대에 종막을 고할 수 있는 것이다.

최근 미국에서도 정치자금을 개혁하자는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엔론파문'으로 충격을 받은 미국 하원은 얼마 전에 7년 동안이나 질질 끌어오던 정당헌금 개혁안을 통과시켰다. 한국 국회도 몸싸움, 입씨름으로 소일하지 말고 전경련에 응답할 자세를 갖추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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