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일 새벽 4시. 철도를 비롯 공공기업 노조가 민영화 반대를 필두로 연대파업을 시작했다. 특히 철도를 중심으로 파업의 효과가 곧바로 가시화 되기 시작했다 한다.
간혹 듣던 철도파업이 시작된 것을 안 것은 동대구역에 도착해서였다. '아, 오늘부터였구나'. 내가 바쁘긴 바빴나보다. 서울에 일이 있어 올라갔다가 밤차로 내려오는 길이었다. 동대구역에서 두 시간여를 기다려 포항으로 가는 통근열차를 타려하니, 파업 때문에 통근열차가 경주 까지밖에 운행을 못한다는 것이었다. 덕분에 간만에 시외버스를 타고 목적지인 포항에 도착했다.
환승역인 동대구역엔 새벽 3시가 조금 안되어 도착했었다. 첫 통근열차는 5시 15분 출발. 두 시간을 넘게 역에서 기다린 셈이었다. 그러나 나를 불편하게 했던 것은 오랜 기다림도, 시외버스를 타러 20여 분을 걸어야 했던 것도 아니었다. 동대구역에 막 도착했을 때는 없던 전투경찰들이 새벽 3시가 조금 지나자 역 안에서 사열하는 게 아닌가? 그러고보니 담배를 태우러 역 앞 광장에 나갔을 때 '폭력경찰, 찬탈현장'이라고 써 붙인 테두리 안에 농성장이었던 것으로 보이는 천막들이 심하게 부서져 있었다. 벌써 몇 달 전부터 봐 왔던 농성장이었다. 새 농성장은 그 옆에 마련되어 있었다. 전투경찰들은 곧 3명씩 조를 지어 역 내외 여기저기에 자릴 잡았다. 그 중 가운데 하나는 큰 방패를 들고 서 있었고 양쪽의 둘은 1미터가 넘어보이는 긴 몽둥이를 들고 있었다. 여느 때 볼 수 있었던 방범봉(?)하곤 그 길이가 확연히 차이가 났다. 그러고보니, 전에 대우노동조합 파업을 진압하던 장면을 인터넷을 통해 봤던 것이 기억났다.
역 앞 안내게시판에서 공고문을 보았다. 국회에서 법안이 심의 대상으로조차 상정되지 못한 가운데, 파업을 강행하는 것은 불법이라는 것이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이지? 파업은 국회에서 논의되는 사안에 한해서만 할 수 있다는 것인가? 어떻게 그런 논리가 가능한지 지금껏 내가 배워왔던 것으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아마도 내가 봤던 글은 한참 전에, 파업 예고 후 얼마 안되었을 때 써 붙인 글이었나보다. 지금 인터넷 등을 통해 보도된 것을 보니, '민영화는 이미 법안이 국회에 넘아가 있는 만큼 협상대상이 아니라 노정교섭은 불가하고 개별 교섭이 있을 뿐'이라고 박용석 노동부 장관이 말했다 한다. 무엇으로 시작하든 항상 정부의 입장은 같다.)
뒤에는 예전에 서울지하철노조 파업 때 언론에서 일제히 내던, '시민의 발을 볼모로' 하는 파업은 '폭력'이며 '불법'이라는 류의 이야기였다. '국민의 발, 국민의 동력, 시민의 편리한 삶을 볼모로 한 불법파업을 전개하고 있다.' '필수공익사업의 파업은 용납될 수 없다.' 지겹다. 아침 나절에 포항에 도착해서 KBS 방송을 통해 본 이한동 국무총리의 '경고' 운운하던 '호소문'도 이런 것이었다. 파업 주동자들은 '현행 공무원법에 따라 엄벌할 것'이라고. 다른 노조원들도 '직장'으로 복귀하면 '정상을 참작'하겠으나 그렇지 않으면 역시 '공무원법'에 따라 '불이익'이 갈 것이란다. '필수공익사업'을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으로 바꿔 '효율'을 추구한다더니, '민영화' 한다더니, 그래도 아직 공무원법은 살아있나보다.
'불법'이라. '불법'이니 '강경대응'을 해야겠고 그러니 전투경찰을 미리 파업현장마다 배치한다. '불법'을 행하는 '범법자'들은 경찰이 대응해야하지 않겠는가. 파업으로 빈 자리는 각 현장의 비노조원들과 간부, 퇴직자뿐 아니라 군인들까지 동원하여 메꾼다. 파업에 찬성하는 사람들도 있고 반대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공공이익을 위한 산업을 민영화한다는 것은 막아야 한다는 파업의 정당성에 대한 이야기는 잠시 접고자 한다. 그 이야기는 나 말고도 많은 이들이 충분히 이야기하였다고 생각한다. 난, 정부가 '불법'이라 규정한 대상에 대해 '동원'되어야 하고 '명령' 받아야 하는 개인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아까 말했다시피 동대구역에서 난 커다란 방패와 길다란 몽둥이를 든 채 위협적으로 배치된 전경들을 보아야했다. 그 불편한 공기 아래 난 저들이 '명령을 받아 동원되었다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그들은 '자기의지'와는 상관없이 특정대상의 주장에 '반대'를 넘어서 '묵살'까지 해야 하는 입장이라는 것이다. 흔해 말하듯, 파업을 몽둥이와 방패로 진압하는 군경 하나하나가 무슨 잘못이냐는 것이다. 그들은 단지 말 그대로 '하수인'에 불과하다.
'대한민국의 건장한 남아들'은 일정 나이가 되면 군복무를 해야한다고들 한다. 의무경찰이라는 제도 역시 군사훈련을 받고 국가의 명령체계에 철저히 예속된다는 점에서는 일반 군복무와 다를 바 없다. 징병제에 의해서 군복무를 하거나 의무경찰이 된 이들은 자신의 뜻이 아닌 타인에 뜻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 그 '타인의 뜻'은 '국가의 뜻'으로 불리운다. 이로서 '국방의 의무'를 이행하는 것은 전 국민을 위하는 것으로, '명예로운 것'으로 추앙된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보자. 우린 '국가'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개인'이 모여 그 각 개인의 권리와 이익을 최대한 보장하기 위해서 설정한 것이라는 점에서 인정한다.
만일 각 개인의 권익이 보장되지 않을 경우, 그 국가권력을 '독재'라 칭한다. 그리고 독재권력은 백성의 힘으로 거부해야 마땅하다는 것이 중등 국정교과서에서조차 인정하고 있는 역사적 경험이자 대전제이다. 만일, 군에 편입되는 문제가 군대라는 조직에 그 뜻을 동의하고 자신의 결정권을 맡기는 제도라면, 즉 강제징집이 아닌 모병제라면 문제는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우린 '강제'로 징병되는 것이기에 우리 자신의 뜻을 본인의 순수한 의지에 따라 맡긴 적이 없다. 그리고, 군대나 경찰에서의 명령체계가 국가를 구성하는, 혹은 군대나 경찰 인력을 구성하는 개개인의 뜻이 합의되어 결정되지도 않는다. '일방적인 명령'에의 '무조건적인 복종'만이 있을 뿐이다.
즉 '국가를 위한' 일이라 하지만, (심하게 말하자면,) 여기서 '국가'는 단지 '그들만의 국가'일 뿐이다. 과연 '국가에의 충성'을 자신의 가치로 생각하고 순수한 의미에서 그 뜻에 동의하여 군복무를 하는 인원이 대체 얼마나 될까?
우린 교과서 등을 통해 민주사회란 토론과 합의를 통해 전 구성원 개개인의 의견을 존중하여 의사를 결정해 나가는 과정이라 아이들에게 가르친다. 그러나, 현실은 이율배반적이다. 우리 개개인의 의사를 존중하여 군복무의 여부를 결정하지도 않고, 국가란 권력에 예속되어 자신의 의지에 따라 '명령'을 따를 것인지 거부할 것인지 결정하지도 못한다. 국가니 민족이니 하는 개념이 전 국민에게 요구되기 시작한 건 근대 이후라는 역사적 사실을 떠올릴 때도 '공익'위해 '국가에 충성'한다는 미명은 당위성을 잃는다.
귀족에게만 요구되던 '충성'의 계약이 평민들에게 요구되기 시작할 때도 평민은 지배계급의 뜻에 참여할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 결정할 권리가 없었다. 이 점에서 강제징집의 현실은 봉건사회나 이후의 전체주의적인 사회와 다를 바 없다. 오늘 파업에 동참하여 목소리를 내더라도, 내일은 그 파업을 '불법'이라 규정지은 자들의 뜻에 따라 방패와 몽둥이를 동료들에게 휘둘러야 한다. 우린 우리의 의사를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남에게 맡겨져야 한다는 것이 징병제의 현실인 것이다.
지금 현재 기존 질서를 지키려는 자들은 강제징집에 대한 거부에 대한 문제를 '특정 종교'라는 차원 하에서만 묶어두려 하고 있다. 많은 이들은 인권이란 이름을 마치 '동정'의 차원에서 다루려고 하는 듯한 인상을 풍긴다. 그러나 민주사회의 기본 전제는 99명이 1명의 의사를 일방적으로 무시하지도, 99명을 위해 1명의 희생을 요구하지도 못한다는 것이다.
인권이란 것은 그 무시당하고 희생당하는 1명의 기본 권리를 지켜야 한다는 당위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다면 이 사회를 우린 '전체주의(파시즘)'이라 칭해야 마땅하다. 개인의 의사를 존중하고 합의를 통한 공동체의 질서를 결정하는 것이 민주사회의 기본질서라는 측면에서 징병제의 문제는 다뤄져야 한다.
징병제 내에서의 비민주성이란 군대 내 구타나 인권모독의 개별적인 차원을 넘어선다. 우리나라가 '민주국가'라는 헌법의 제 1원칙을 존중할 때 징병제는 분명 모순을 안고 있다. 징병제의 문제는 기본적인 민주사회의 원칙을 따져봄으로서 시작되어야 한다. 이것은 대한민국이란 국가의 정체성과 헌법의 기본질서에 관한 문제이다.
징병제를 '국방의 의무'라 명명하는 것도 재고되어야 한다. 민주사회에서의 의무란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공동체를 구성하는 각 개개인이 합의한 상태에서 결정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징병제는 '논의'된 적 조차 없다. '국방의 의무'가 존재할 가치는 인정하더라도, 그것이 '강제징집'일 당위는 없다. 모두가 가야한다면 군대나 의무경찰 내에서의 각 개개인이 명령을 거부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해야 한다. 군대나 경찰 조직의 특성상 '명령에 대한 거부'가 불가능하다면, 각 개인의 의사를 무시하고 모두에 대해 군인이 되도록 요구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 모두가 인정하는 바, 이 사회는 민주사회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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