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깊고 골 깊은 인물의 고장 산청 땅을 찾아
"두류산 양단수를 예듣고 이제 보니/ 도화 뜬 맑은 물에 산영 조차 잠겼어라/ 아희야, 무릉이 어디메냐 나는 옌가 하노라"
율곡 이이가 '조선조 유일한 딱 한 사람의 진정한 선비'라 평했던 남명 조식은 열일곱 번을 답사한 끝에 찾아낸 무릉도원의 땅 산청을 이렇게 노래했다. 산천이 출중해서인지 예로부터 안동과 쌍벽을 이루며 경상 우도 학맥을 형성 인물의 고장이라 불려온 산청 땅을 몇 번의 망설임 끝에 찾던 날은 봄비가 그치고 산허리마다 수묵화 같은 안개가 자욱했다.
산청을 찾는 가장 빠른 방법은 88고속도로를 타고 대구 쪽으로 가다 함양 분기점에서 최근 개통한 대전-통영간 고속도로로 바꿔 타는 길일 것이나, 남원시 인월 나들목에서 88고속도로와 작별하고 60번 국도를 이용하기로 했다. 뱀사골과 달궁에서 발원, 실상사 앞을 지나면서부터는 수량이 제법 도도해진 엄천강을 우측에 끼고 달리는 60번 국도의 아름다운 강변 풍광을 만끽하기 위해서다.
산청읍 못 미처 금서면 매촌리에서 60번 국도를 버리고 산청군을 남북으로 종단하는 59번 국도를 타고 남으로 방향을 잡으면 천왕봉에서 산청군 웅석산으로 이어지는 아슬아슬한 밤머리재를 넘게 된다.
밤머리재 정상에서 잠시 차를 멈추고 바라보는 삼장면과 저 멀리 덕산까지 이어지는 시원한 조망과 남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지리산의 겹겹한 능선과 덕천강 지류가 한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지리산은 그 넉넉한 품 속에 이름만으로도 가슴이 설레는 대원사 계곡과 내원사 계곡을 비롯한 중산 계곡과 거림골을 안고 기다리고 있다.
몇 번을 찾아도 다시 가고픈 절집 대원사
사람이 남긴 자취 가운데 가장 오랫동안 남아 있는 게 있다면 그것은 아마 길일 것이다. 그 길을 통해 사람을 만나고 역사를 만나고 자연을 만나면서 헤어짐과 만남의 인연을 맺으며 우리는 살아간다.
여행을 참 좋아하는 선배가 나에게만 귀띔해준 바에 의하면 대원사 길은 아무하고나 가지 말라고 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거든 그 길을 함께 걸으며 사랑을 고백하라고 했다.
잉크빛보다 더 푸른 계곡물이 하얀 포말로 부서지는 완만한 계곡 양쪽으로 굴참나무 신갈나무 서어나무가 우거진 활엽수림과 조선 소나무 중에서도 가장 아름답다는 아름드리 금강송이 어우러진 대원사까지 30여 분의 행복한 산책길은 정말 아무하고나 오고 싶지 않을 만큼 매혹적이었다. 특별한 사람과 인연이 깃들인 아름다운 길 하나쯤 가슴에 묻고 사는 것도 괜찮으리라 생각했다.
유홍준은 이 계곡을 조선 제일의 탁족처라고 했으나 난 그 깨끗한 계곡물에 차마 발 담그기조차 민망했다. 매표소에서 내려 대원사까지의 2km 그 호젓한 아름다운 산책길을 마다하고 자동차로 5분만에 오르는 호모사피엔스의 조급함이 안쓰럽고 안쓰러울 뿐.
해방 전후의 혼란과 한국전쟁을 겪으며 대원사는 철저하게 파괴되어 이렇다할 유물 하나 없는 조촐한 절집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그 정갈하고 단아한 분위기만으로도 찾는 이를 결코 실망시키지 않으리라.
대원사에서 잊을 수 없는 것은 원통보전 뒤편에 자리잡은 장독대다. 전라도 독들과 달리 형태와 어깨선이 떡 벌어진 모습이 보는 이로 하여금 장골의 기개를 느끼게 하는 장독대에 봄 햇살이 가득하다. 대원사는 그 청정하고 맑은 분위기로 몇 번을 찾아도 좋은 절집이다.
무릉도원의 땅 덕산 땅에도 봄볕이 가득
산청에는 산이 높고 골이 깊어 강도 많다. 중산리 계곡과 거림골 물이 대원사 계곡과 내원사 계곡에서 흘러온 물과 합류하여 산청땅을 동서로 횡단하며 덕산을 축복받은 땅으로 만든 덕천강. 그 강가에 조선조의 진정한 선비 남명 조식이 덕산에 들 때 갓끈을 씻었다는 탁영대(濯纓臺)란 글씨가 남아 있다.
이곳은 중산리계곡에서 흘러온 물과 대원사계곡에서 흘러온 물이 만나는 지점으로 남명 조식이 노래한 양단수다. 덕산 땅을 찾아낸 남명은 마침내 61세에 이곳 덕산에 정착해 산천재를 열고 경의학(敬義學)을 몸소 행하며 가르치다 이곳 산청 땅에서 72세로 생을 마감했다.
남명의 가르침을 받은 많은 선비들은 훗날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분연히 일어나 싸웠다. 남명 문하에서 궐기한 의병장만도 곽재우(郭再祐)를 비롯하여 50여 명에 이르렀으니 퇴계(退溪)로 대표되는 영남좌도의 사상이 낙동강을 중심으로 경북 안동에서 형성됐다면 지리산에서 발원한 덕천강은 영남우도를 대표하는 사상을 낳았다 하겠다.
남명이 덕산에 정착하면서 가르침을 폈던 산천재에는 지금 산수유와 매화가 이제 막 벙글고 있었다. 구곡산, 웅석봉 줄기와 세석평전의 능선이 감싸안고, 중산리와 대원사의 물이 합쳐지는 이수삼산(二水三山)의 무릉도원도 이제는 개발과 자본의 물결을 피해갈 수는 없는 모양이어서 덕천강과 덕산 언저리도 이제 어수선하다.
육백 번도 더 넘게 봄을 맞고 있는 단속사지 정당매
웅석산이 만들어낸 만만치 않은 산세와 그 가운데 들어앉은 넓은 들판. 그 넓은 분지의 한 가운데 단속사지는 자리잡고 있다. 전해오는 말로는 절집을 한 바퀴 돌아보면 어느 새 새 미투리 한 켤레가 다 닳았다고 하며 공양 때 쌀 씻던 물로 10리 밖까지 미쳤다고 하나 지금은 3층 석탑 두 기와 당간지주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동·서 삼층석탑은 전형적인 신라 석탑으로 각 부분의 비례와 균형이 알맞아 안정감이 있고 돌을 다루는 수법 또한 정연하다. 한국 석탑 문화의 황금기인 8세기 중엽에서 약간 내려와 지리산 산간 지방까지 파급된 8세기 후반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수작이다.
삼층석탑 바로 뒤편 마을 입구엔 고려말 강회백이 단속사에서 공부하며 심은 매화 한 그루가 있는데, 그후 그가 정당문학이라는 벼슬에 이르렀다고 해서 이 매화를 정당매라 부르고 있다. 또한 우리 나라 최고의 식물재배 및 품평서로 알려진 <양화소록>에서 강회백의 손자인 강희안이 이러한 내용을 증언하고 있어 실로 족보를 지닌 우리 나라 최고의 매화라고 할 수 있다.
육백 번도 더 넘게 봄마다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는 매화 앞에서 나의 존재는 너무 왜소하고 남루했다. 이제 막 벙글기 시작한 매화 송이 앞에서 까마득한 피안의 세계를 넘나들며 난 자리를 뜰 수 없었다.
여행의 마무리
산청은 깊다. 깊은 만큼 역사와 유물도 많다. 지리산 자락의 내원사, 중산리, 거림 계곡 같은 숨겨진 비경이나 가락국 최후의 왕릉으로 알려진 구형왕릉과 황매산의 <단적비연수> 촬영세트에 대해선 아직 언급도 못했다. 또한 산청의 인물 문익점과 유의태 그리고 성철스님 대해서도 소개하지 못했다. 산청의 역사와 산청의 맛, 산청의 정신, 산청의 은밀함을 모두 담기엔 1박 2일의 일정이 너무 빠듯했으리라.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