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오래간만에 소위 정치인이 한 말을 듣고 "옳거니"하는 탄성을 지른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JP가 미국 NBC 방송 투나잇쇼를 진행하는 레이 레노에 대해 "남의 나라에 대해 최소한의 예의도 갖추지 못한 고얀 놈"이라고 한 발언이다.
지난 9.11사건 이후(테러라는 미국 입장에서 나온 용어를 사용하고 싶지도 않다) 솔트레이크 동계올림픽을 거치면서 반미감정은 그 어느 때보다 고조된 상황이다. 하지만 그것은 오직 힘없는 국민의 분노일 뿐 이 나라를 책임지고 있는 사람이나 체육계의 수장이라는 사람은 분노는커녕 국제적인 행사를 자국의 이익에 이용하려는 미국의 극단적인 이기주의를 '성공적 올릴픽'이라고 칭송했다는 소식이다.
홍일식 님은 "한국인에게 무엇이 있는가"라는 저서에서 우리 조상의 굴욕적인 대 중국외교를 비난하는 현세대에게 그것은 사대주의가 아니고 강대국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기 위한 고도의 외교술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 말을 곧이곧대로 다 받아들일 수 없지만 그래도 옛 조상 중엔 당시 최강국이었던 중국을 선제공격하고 중국을 통일한 대 제국 수나라의 멸망에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한 고구려의 영양왕과 중국 최고의 황제에게 첫 패배를 안겨주었던 연개소문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렇다고 힘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인 현대의 우리가 조선의 광해군 아니 소현세자와 같은 기민한 외교력이나마 제대로 발휘하고 있는가? 또한 조선은 국호마저 명나라의 승인을 받아야 할 처지였다. 조선이 두 개의 국호를 명나라에게 보고하고 명나라가 선택하는 형식인데 누가 봐도 사대주의의 극치라고 볼 수밖에 없지만 조선이 명나라에게 올린 국호는 '화령' 과 '조선'이다.
화령이란 무엇인가? 바로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의 고향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한나라를 건국한 사람의 고향이름을 따서 국호를 정한 예는 찾기 힘들다. 따라서 명나라가 당연히 '조선'이라는 국호를 정해준 것은 당연하다. 조선은 이점을 이용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형식은 명나라가 국호를 정해준 것이지만 실제적으로는 조선 스스로가 국호를 정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럼 지금의 우리는 이런 실리조차 제대로 챙기면서 미국을 섬기고 있는가? 결론은 물론 아니다. 실리를 챙기는 것도 미국이고 어른대접을 받는 것도 미국이다.
'김영사'하면 통속적인 소설만을 연상하는 생각을 바꾸게 한 최근 주목받는 소장 역사학자 이덕일이 쓴 오국사기(五國史記1~3권)의 극히 일부 내용만을 살펴보자.
중국을 통일한 수문제가 영양왕에게 협박조의 국서(왕위를 빼앗을 수도 있다는 내용도 포함된)를 보내자 이듬 해 서기 598년 영양왕은 일 만 명의 기병을 이끌고 질풍같이 요서 지역을 공격했다.
물론 전면적인 침략전쟁이 아니고 다분히 시위적이고 수나라를 자극하고 수비체계를 잘 갖추어서 침략하는 수나라를 섬멸하려는 의도였지만(물론 이 의도는 대성공을 한다) 이 나라를 호령하는 집권층에 이런 기개를 가진 인물이 있는가?
이 후 수나라는 30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략하지만 영양왕은 30만 대군중 10에 8,9를 죽였고 이때부터 중국은 "고구려 원정길은 곧 죽음이다" "고구려 원정길에서 억울하게 죽지 말자"라는 늪속으로 빠지게 된다.
그러나 영양왕 죽음 이후 요즘 정치인과 비슷한 성향을 가진 영류왕이 즉위하면서 과거 초강대국을 상대로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던 고구려인들의 기개는 위축된다.
영류왕은 비굴한 외교로 일관했으며 심지어는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전사한 수많은 고구려군의 유골을 모아 만든 기념탑인 경관을 당나라의 요구로 파괴한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전쟁은 많은 사람을 죽이게 하니 당나라에게 허리를 굽혀 평화를 유지하자는 영류왕의 주장과 "우리는 힘이 아닌 상대방의 자비에 의존하는 화친은 참된 평화가 아니옵니다"며 절규하는 연개소문은 동시에 양립할 수 없는 존재임에 분명했다.
절치부심 끝에 영류왕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은 연개소문은 수나라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주도면밀하게 전쟁을 준비한 중국 최고의 황제 당태종을 안시성에서 무너뜨린다. 비록 당나라에게 저자세 굴욕외교로 일관한 신라에게 백제와 고구려는 멸망했지만 영양왕과 연개소문의 배포와 기개(연개소문은 무식하게 무력만 추종하는 인물은 아니었다)가 사무치게 그리운 요즘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고 필자는 연개소문은 굴욕적인 외교를 하는 지배층을 무력으로 몰아내자는 것은 아니다. 미국의 한 주가 아닌 독립된 국가로서의 최소한의 자존심은 지키고 살자는 것이다.
이번 동계올림픽에서 한국은 일본이나 러시아와 더불어 편파판정으로 인해서 피해는 같이 받았지만(특히 우리나라가 심했다) 일본이나 러시아는 흡족하지는 않으나 적절한 사과를 얻어냈다. 하지만 한국은 '복수를 절대로 하지 않는 나라'다운 면모와 '성공적인 올림픽'이라는 외교적 아부로 김동성 선수의 4년간의 피나는 노력을 미국 티비쇼의 조롱거리로 상납했다.
사실 서울올림픽 때도 우리는 편파판정의 덕을 톡톡히 봐서 세계 4위에 오른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그 편파판정의 희생양을 우리의 텔레비전쇼에서 조롱거리로 삼지는 않았다.
이런 미국의 오만한 태도는 반드시 가시적이고 실제적인 응징이 되어야 하며 정부는 더 이상 비굴한 저자세외교를 그만 두어야 한다. 우리가 미국의 덕을 얼마나 많이 보고 사는지는 잘 모르고 그런 비굴한 저자세외교를 하는 지도층의 고뇌(?)를 미처 헤아리지 못하지만 우리 국민은 원치 않는 방식이다.
오국사기 (전3권)
이덕일 지음,
김영사,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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