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7년 악명높은 '비판적 지지'로 민중의 염원을 저버린 보수야당추종주의는 전국연합 결성과 작년 범국민대책회의 그리고 지금 전국연합 대통령선거 방침논의에 이르기까지 민중의 계급적·정치적 진출이 급박하게 요구되는 정세에도 아랑곳없이 고색창연한 후진성을 끈질기게 고수하고 있다. - [이제 민중이 정치의 주역으로 나서야 할 때입니다] '오세철' 中에서
92년 대선은 오세철 교수에게는 가장 큰 변화를 준 사건일 것이다. 교수위원회 위원장일 때부터 다른 교수들과 함께 대선을 준비, 선거 때 선거대책위원회 위원장을 맡은 그는 그 이후로도 계속 활발한 사회활동을 하고 있다. 현재는 민중연대 공동대표를 맡고 있고 교수노조 활동을 하고 있다.
92년 대선에서 오세철 교수는 백기완 선본의 선거대책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당시 선거 공탁금은 1억 원이었다. 현재도 그렇지만 10년 전 1억 원은 정말 큰돈이었다. 여러 단체에서 돈을 모았지만 공탁금을 만들기에는 상당액이 부족했다. 심지어 전셋집을 빼서 그 돈을 보내주는 사람까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TV연설에서 백기완 후보와 오세철 교수가 지지금을 보내줄 것을 부탁하는 이야기를 했다.
그 방송이 나간 이후로 선본 사무실에 있던 여러 대의 전화기는 모두 불이 났다. 비록 큰 돈은 아니지만 지지해주는 수많은 시민들이 보내준 지지금은 그렇게 한푼두푼 후보등록하고 선거운동까지 할 수가 있을 정도로 모였다.
대선 치러낸 것 그 자체가 성과
오세철 교수는 '독자적 민중후보'를 내세운 92년 대선에 3가지 의미를 둔다. 첫째로는 소련 동구 사회주의의 몰락으로 인한 세계적인 사상적 동요가 있었으나 이것은 국가 사회주의 모델의 몰락일 뿐 사상 자체가 무너진 것이 아님을 알릴 수 있는 계기였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는 노동운동이 대중적으로 발전해 정치운동으로 한 단계 올라설 수 있었다는 것을 든다. 세 번째로는 남한 변혁운동에서 민족주의자들과 선을 긋게 된 것이다.
"선거를 통해 조직적으로 좌파를 통합하는 것이 목적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민중회의와 사회당 추진위만이 함께 하는 소통합이 된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진보정당추진위원회는 같이 하지를 못했다." 그래도 선거 이후에 선거강령 자체가 국가보안법에 위반이 될 정도로 제대로 된 이야기들을 할 수 있었던 좌파강령, 후보강령을 통해서 제대로 된 선전선동 한 것을 성과로 생각한다고 오 교수는 기억한다. 그리고 이러한 흐름은 현재 민주노동당, 사회당 등의 진보정당운동으로 이어지고 있다.
'민중회의'의 건설
91년, 백골단에 의한 명지대 강경대 학생의 죽음으로 전 운동세력들은 분노로 가득 찼다. 연세대에 모여서 '강경대 투쟁'을 전개해 나갔다. 그 곳엔 좌파, 민족주의 진영은 물론 김영삼과 김대중도 와서 함께 했다. 노태우 정권의 폭력탄압은 더해만 갔지만, 집회마다 모이는 사람은 수천에서 수십만 명으로 늘어만 갔다. 그러나 그것은 처음으로 지자체선거가 열리기 전까지 뿐이었다.
김대중, 김영삼을 비롯한 보수세력은 대중투쟁이 밑으로부터 정권과 대결했는데도 불구하고 선거 일정이 다가오며 모두 빠져나가 버렸고, 남은 것은 민중당뿐이었다. 이때 오세철 교수는 선거를 보이콧하자는 의견을 냈지만 당시 민중당의 헤게모니세력이었던 인민노련은 민중당도 지자체선거에 참여해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이렇게 민중당은 '선거냐 투쟁이냐' 하며 내부적인 논쟁이 있었다.
91년은 소련 및 동구 등의 현존 사회주의 국가가 몰락하면서 이념적인 동요가 심각했다. 사회주의의 몰락으로 여긴 많은 이들이 운동을 계속해야 하는지 그만두어야 하는지로 엄청난 혼란에 빠졌다. 운동진영 내 변절하는 사람도 있었고, 노선이 변화되는 경우도 있었다. 민중당 역시 이런 상황에 쌓여있었기 때문에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념적 동요가 있었고, 선거에 대한 입장의 차이가 있었음에도 투쟁이 아닌 선거주의로 가게 됐어. 결국 교수위원회와 젊은 동지들이 민중당을 탈당하게 됐지. 그 당시 젊은 동지들은 지금 모두 사회당에 지도부로 있지." 이런 과정을 거쳐 이들은 이후 '운동진영 내 합법 개량주의 반대, 근본 변혁'을 내걸고 민중회의를 건설하게 됐다.
독자후보가 나오게 되기까지
92년 민중의 대통령 후보를 낼 수 있었던 데는 87년 대선 이후 민중당에서 민중회의로 이어지는 전사(前史)가 있었다. 민중당 건설시기는 군부독재시절이었고, 모든 세력이 합법화되는 시기가 아니었다. 비합법과 합법이 함께 하는 그것이 독자적 정치세력화를 공개적으로 시작하는 민중당의 역사다. 그러나 이런 독자적인 노선이 운동을 하는 모든 이들에게 환영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민족주의 운동진영은 민주와 반민주 전선을 강조하였고, 또 다른 전선을 그어서는 안 된다며 독자적 정치세력화에 대해서 반대했다.
"민중당 건설을 주도한 좌파진영은 민족주의 진영에서 말하는 민주와 반민주 전선 역시 중요하게 여겼지. 그러나 노동과 자본, 보수와 진보라는 대립전선이 더 중요했어. 우리는 그 당시 민주세력이라고 불리었던 김대중이나 김영삼은 보수세력이라고 규정했고. 좌파입장에서는 그들은 오히려 보수에 가까웠고, 노동 계급적 입장을 가진다고 보기 어려웠으니까. 그래서 노동자민중의 정치세력화의 필요성 중요하다고 여긴 것이지."
87년 대선 당시 민족주의 진영은 김대중 후보를 비판적으로 지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대중은 92년 대선에 또다시 후보로 나오려고 했기 때문에 김대중을 지지했던 민족주의 운동진영에게는 민중당 건설이 곱게 보일 리 없었다. 민중당 창당을 비판했던 민족주의 운동진영은 다수였던 반면 민중당을 건설하려는 좌파운동진영은 소수에 불과했다. 그러나 비판을 받아들이고 함께 하기엔 너무도 달랐다.
87년 대선에는 민중후보가 나왔으나 '단일후보론'에 밀려 중도 사퇴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92년엔 사퇴하지 않고 끝까지 하는 민중후보가 되어야 하고, 독자적 정치세력화를 가져야만 했다.
이런 뜻을 가지고 있던 민중회의, 사회당추진위원회, 진보정당추진위원회, 전국노동단체연합 등은 '민중대통령후보 선거대책본부'를 만들었다. 좌파는 여전히 운동진영 내 소수파였고, 92년도 대선에도 김대중이 후보로 나왔다. 여전히 전국연합 중심의 민족주의 진영은 김대중을 지지하며 "새로운 독자후보를 세우는 것은 표 깎아먹기"라며 "대동단결을 해치는 소수분자들"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선거대책본부에 가입된 단체들의 회원만 1만여 명이 됐고, 선거에서 1백만 표의 득표는 무난할 것으로 보일 만큼 그 영향은 대단했다.
92년 대선 결과, 1.0% 238,648표 득표
오세철 교수는 "많은 사람들이 낮았던 득표율을 가지고 비판을 한다. 단일후보로 했으면 득표율이 높았을텐데 독자후보를 내서 오히려 득표율을 분산시켰다고 한다. 그러나 득표율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대선 자체에 나가는 것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을 한다"고 말했다. 끝까지 자신들의 생각을 굽히지 않았던 이런 모습들이 현재 진보정당을 만들어가는 바탕이 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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