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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펠자동차회사 외국인노동자들의 친선다과회 장면. 오른쪽줄 가운데 동양인이 최태호 씨다. |
이역땅의 풍물쟁이 최태호 씨
다음 날 새벽, 아직도 ‘어둠의 자식들’이 준동하고 있는 대도시 프랑크푸르트의 고층빌딩군을 뒤로 하고 루우르지역 보쿰에서 목회활동을 하고 있는 송병구 목사의 주선으로 이미 취재 일정이 잡혀 있는 최태호 씨를 취재하기 위하여 빠른 기차에 몸을 실었다.
오펠자동차회사에서 교대제근무를 하고 있는 최태호 씨는 오후 한 시 무렵에 출근을 해야 하기 때문에 출근 전에 취재를 마쳐야 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보쿰까지 늦은 기차로는 다섯 시간, 빠른 기차로는 약 두 시간 반이 걸린다.
기차의 행로는 다행히도 한 폭의 수채화처럼 아름다운 라인강변을 따라 이어지고 있어서 지친 기자의 심신을 달래주었다. 기자는 자연에 관심이 많은지라 여행시에는 언제나 동반자 역을 충실히 해내는 소형 망원경을 꺼내 조금씩 봄의 입김을 뿜어내고 있는 강변의 초목들에게 렌즈의 초점을 연신 맞추면서 철마와 동행했다.
철마가 대성당으로 유명한 쾰른에 다다랐을 때 라인강 철교 한 축에 경이롭게도 ‘태극기가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직경이 3미터는 됨직한 대형 태극기였다. 얼마 후에 거행되는 쾰른축제를 축하하는 만국기들의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었다. 기자는 만감이 교차했다. 한 편으로는 흐뭇하기도 했지만 또 한 측면에는 슬픈 여운이 가슴을 치고 들어왔다. ‘남북단일기가 휘날리는 날이 빨리 와야 할텐데’하는 안타까움의 여운이었다.
아픈 마음을 안고 보쿰역에 도착하니 최태호 씨가 그다지 여유롭지 못한 시간을 쪼개어 꽤 먼거리를 달려서 마중나와 있었다. 우리는 최태호 씨 집으로 가는 자동차 안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본격적인 취재에 앞서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는 일종의 ‘몸풀기’라고나 할까? 차 안에서 기자는 기꺼이 최태호 씨의 취재원이 되어주었다. 최태호 씨는 기자에게 이것저것 궁금한 것을 물어왔던 것이다.
최태호 씨 집에 도착, 취재의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그는 자기 아들 중 하나가 현재 베를린 어느 회사의 견습노동자로 있는데 견습기간 동안 임금을 단 한 푼도 못 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말이 견습이지 사실상 견습노동자들도 일반 정규노동자들과 똑같은 강도의 일을 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무임금이라니. 무노동 무임금은 그렇다치고, 당연히 유노동 유임금이 상식적으로 어울리는 것이 아닌가. 비스바덴에서 취재를 했던 조진환 씨 회사의 경우는 견습노동자라 하여도 호봉수에서 차이가 있을 뿐 임금은 동일노동인 경우에 정규노동자와 차이가 없다고 했었다.
기자는 최태호 씨의 말을 듣고 선진국 독일도 부분적으로 일부 주에 따라서, 그리고 일부 영세사업체 등에는 해당기관이나 노조의 입김이 미처 미치지 못하는 틈새를 악용하여 분명히 노동착취를 하고 있다는 단서를 포착했다.
최태호(55) 씨는 1976년에 역시 광부로서 독일에 첫 발을 디뎠다. 간호사 출신 부인과의 사이에 아들 둘을 두고 있으며 현재 보쿰지역 한인회장과 우리민족의 얼을 지키고자 노력하고 있는 ‘민중문화모임’의 대표를 맡고 있다.
그도 대다수 독일교민의 1세대와 마찬가지로 찢어지게 가난했던 삶에서 벗어나고자 돈을 벌기 위해 3년의 계약기간으로 이곳에 왔다가 눌러앉은 전형적인 노동자 출신이다. 30년 가까운 이국생활에서 털어놓을 애환이야 왜 없을까마는 최태호 씨는 개인적인 애환은 뒤로 미룬 채 분단조국의 걱정과 교포 2세, 3세 즉, 후진들에게 어떻게 하면 우리의 전통문화를 고스란히 되물림해줄 수 있을까에 골몰하는 빛이 역력했다.
최태호 씨는 광부로서의 계약기간 3년을 마치고 선배의 추천으로 1979년 오펠자동차회사에 프레스공으로 입사했다. 프레스 일이 육체적으로 힘은 들었지만 천길 지하의 탄광생활에 비하면 천국이었노라고 당시를 회상하며 환히 웃었다. 그 당시 오펠에서는 ‘카데트’라는 새로운 자동차 모델을 개발했는데 새 모델 생산을 위한 인원이 턱없이 부족해서 쉽게 취직이 될 수 있었다고 한다. 지난 세기 80년대 한참 줏가를 올렸던 대우자동차의 르망이 이름만 바꾼 카데트 모델이다.
당시 대우자동차에서 30명 정도의 기술자와 중간간부들이 카데트 제원에 대한 교육을 받기 위해 오펠자동차에 파견되었는데 그때 씁쓰레한 일화 한 토막이 있었단다.
어느 날 콘베이어벨트 고장으로 그 부서의 작업조가 대기하면서 쉬고 있었다. 그냥 쉬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은 신문을 보기도 하고, 동료들과 잡담을 나누거나 간단한 운동을 하면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는데, 이를 목격한 대우자동차 직원들이 부서 책임자에게 질문을 했다. ‘왜 휴식시간도 아닌데 노동자들을 놀리느냐. 다음 작업에 필요한 부품운반을 시키거나 하다못해 주변 청소라도 시키는게 좋지 않느냐’는 요지였단다.
독일인 책임자 왈, "청소부나 운반노동자들은 따로 있다. 이 사람들의 임무는 콘베이어벨트가 돌아갈 때 하자가 없도록 하는 일이다. 각자는 각자의 임무만 충실히 하면 된다. 따라서 콘베이어벨트가 다시 작동될 때까지 잠시 휴식을 취하는 게 무엇이 문제인가. 당신 나라에서는 어떤지 몰라도..."라는 책임자의 말에 대우직원들이 할 말을 잃어버렸다고 한다.
또 한 가지 씁쓰레한 입맛을 느끼게 하는 실례를 들어보자. 지난 세기 70년대를 전후로 해서 상당수의 한국인들이 광부로 독일에 왔다. 당시 한국인 광부들은 독일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라 독일어 구사능력도 거의 없었다. 따라서 탄광주나 독일인 관리자들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거나 다른 애로사항이 있어도 개인적으로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해주고자 당시 한국정부에서는 한국인 노무관과 통역을 파견했다. 따라서 그들은 당연히 한국인 광부들을 대변해서 여러 애로사항을 해결해 줄 책무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국인 노무관과 통역들은 한국인 광부들을 대변하기는커녕, 오히려 탄광주 편에 서서 광부들의 자치활동을 방해하고 광부들의 애환과는 배치되는 통역을 수시로 했으며 때로는 "고분고분하지 않으면 한국으로 강제 송환시켜 버리겠다"고 협박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물론 광부들 편에 서서 성실하게 근무했던 노무관과 통역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 동안 기자가 만나본 상당수의 탄광노동자들의 입에서 한국인 노무관과 통역을 칭찬하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 비스바덴의 조준환 씨도 그들을 강하게 비판했었다. 오랜 옛날부터 관리들 구석구석에 깊숙히 침투해 있어서 연연세세 전통처럼 이어지고 있는 독버섯, 악의 축, 이름하여 사대주의 근성! 오호, 통재라!
최태호 씨는 입사 당시 ‘프락티쿰’즉, 견습노동자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1년 계약의 정식근무자로 채용되었다. 기자는 이번 취재와 그 동안의 경험을 통해서 독일은 기업에 따라서 견습사원제도를 채택하는 경우도 있고 아예 견습사원제도가 없는 기업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예를 든다면 획스트화학회사는 견습사원제도를 채택하고 있는 반면에 오펠자동차회사는 채택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또한 견습사원제도를 채택하고 있는 회사라 하더라도 견습기간 동안 유노동 무임금, 즉 일반노동자와 똑같은 일을 시키면서 임금을 한 푼도 지급하지 않은 회사가 있는가 하면 일반노동자와 같은 수준의 임금을 지급하는 기업도 있고, 일부만 지급하는 기업도 있다는 것이다.
최태호 씨와 조진환 씨가 좋은 대비를 보여주는 예이다. 그리고 최태호 씨의 아들처럼, 그리고 기자의 경험과 주변 외국인들의 경우처럼 유노동 무임금인 기업도 있다는 것이다. 덧붙인다면 독일노동자들은 대부분 임금을 시간급으로 받고 있다. 예를 들면 한 시간에 천 원을 받는 노동자는 하루 8시간 근무를 하면 8천 원을 받는다. 따라서 개인 사정상 조퇴를 하거나 결근을 하면 이에 해당되는 시간만큼 임금은 삭감되는 것이다.
최태호 씨는 입사 후 서너 차례의 계약기간 갱신 과정을 거쳐 입사 후 8년차부터는 평생 근무를 보장받았다. 즉, 정년 퇴임 때까지 법에 저촉되는 특별한 잘못이 없는 한 회사는 최태호 씨를 해직시킬 수 없는 것이다.
독일은 산별노조제도를 채택하고 있는 나라인데 노조의 힘이 대단히 막강하다. 따라서 노조가 결성되어 있는 기업의 노동자들은 독일 현지인은 물론 외국인노동자라 하더라도 노조를 통해 매우 강력하게 보호를 받는다. 이런 기업에서는 표면적으로 외국인노동자를 차별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러나 노조가 없는 중소기업의 경우는 또 달라진다. 이에 대해서는 후반부에 상세히 취재해 보기로 하자.
최태호 씨의 답변도 조진환 씨와 거의 대동소이했다. 23년 동안 오펠자동차회사에 근무하면서 외국인이기 때문에 회사측으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은 기억은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일자리에 있어서 독일인들보다 힘든 일을 할당받는 경우는 있다’는 단서를 붙였다. 그리고 간혹 독일인 직원들이 개인적으로 외국인노동자를 무시하거나 조롱하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이런 경우도 노조를 통해 해결이 가능하단다.
최태호 씨는 기자의 거듭되는 질문에 ‘개인자격의 독일인들과 다툼은 가끔 있다’고 하면서 그것은 주로 한국의 정세에 기인한 다툼이라는 것이다. 즉, 옛날 개발독재시절에는 한국의 인권상황, 억압, 그리고 경제적 후진성 때문에 무시를 당하기도 했는데 88올림픽 이후, 그리고 차범근의 활약 등으로 그런 것은 많이 희석되었단다.
이 부분에서 기자는 한 가지를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최태호 씨로부터 독일인들이 한국인을 무시하는 이유 중의 하나로 조국의 분단상황을 종종 지적한다고 했기 때문이다. 말인 즉슨, ‘우리는 오래 전에 통일을 이루어서 지금은 동서독이 잘 살고 있는데 당신들은 왜 아직까지 같은 민족끼리 총뿌리를 겨누며 아귀다툼을 하느냐?’는 것이었다.
여기서 기자는 그런 인식을 가지고 있는 독일인들에게 역질문을 해야만 했다.
"당신들은 이른바 통일이든, 합병이든 어쨌거나 지금은 한 나라가 되었다. 벌써 1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런데 지금 당신들의 현실을 보자. 동독인들은 서독인들이 자신들을 무시하고 차별대우한다고 불만이 많다. 또 서독인들은 동독인들이 자신들의 밥그릇을 빼앗아 간다고 역시 불만이 많다. 동독인들이 일자리를 찾아서 서독 땅에 오면 대부분 오래 견디지 못하고 동독으로 돌아가 버린다. 이유는 서독인들이 그들을 무시하고 ‘왕따’를 시키기 때문이다. 같은 형제들도 포용 못하는 당신들이 어찌 남의 나라 분단현실을 이유로 한국인을 무시하고, 또 진정으로 외국인에 대한 차별이 없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겠는가?"
물론 대부분의 독일인들이 이런 생각을 갖고 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최태호 씨도 이런 인식을 가지고 있는 독일인은 소수라고 했다. 그러나 독일도 외국인들에게 좀더 개방적인 주가 있는가 하면 바이에른주처럼 대단히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주가 상존한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바이에른주 이야기는 나중에 상세히 다루어 보기로 하자.
취재를 마치면서 마지막으로 기자는 최태호 씨에게 이번 특별취재의 주제와는 상관없이 한국정부나 조국의 형제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보라고 권했다.
최태호 씨는 침통한 표정으로 조용히, 그리고 침착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현재 독일에는 동백림사건을 비롯, 여러 정치적인 문제로 그리운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있다. 이들을 대할 때면 안타까움과 함께 서글픈 심정이 앞선다. 분단상황의 후과가 더 이상 길어져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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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펠자동차회사 노동자들의 근속 25주년 표창 장면. |
최태호 씨는 오래 전부터 우리 전통문화를 독일인들에게 알리는 일을 해 왔다. 풍물놀이가 그것이다. 처음에는 요란한 소리 때문에 주변 독일인들의 항의를 받기도 하고 심지어는 주민들의 신고로 경찰이 출동하는 사태까지 간 적도 있었지만 최태호 씨와 ‘민중문화모임’ 회원들의 노력으로 그들을 이해시키는 단계를 넘어 많은 호응을 받고 있으며 지방교육청의 지원으로 풍물놀이를 맘껏 펼칠 수 있는 방도 하나 무료로 확보했다. 민중문화모임 회관이 그것이다. 민중문화모임은 단순히 풍물놀이에만 그치지 않고 이 지역 교민들의 사랑방 구실도 하며 2세 교육에도 많은 신경을 쓰고 있다. 현재 교민 2세들이 풍물놀이를 전수받아 활발히 활동하고 있기도 하다.
이런 모임을 주도하고 있는 최태호 씨에게는 한 가지 걱정이 있단다. 그의 말을 경청해 보자.
"광부와 간호사 출신이 주축을 이룬 교민 1세들이 이젠 50대 후반이거나 60대로서 현재 연금을 받거나 머지않아 대부분 연금생활자가 된다. 이전에는 돈을 벌어 일부를 한국의 가족들에게 송금했다. 그리고 아이엠에프 때는 외화가 부족한 한국경제에 조금이라도 기여하기 위해 노력도 했다. 그러나 연금을 받게 되면 수입이 거의 절반으로 줄어든다. 이제는 1세들이 전통문화계승 등 2세교육을 위해 활동하고 싶어도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제약이 많을 것 같다. 낡은 장비를 교체해서 2세들에게 좀더 신바람나게 전통문화를 물려주고 싶은데 어려움이 많다. 또한 옛날 김영삼 씨가 대통령 시절, 교민들에게 교민회관 건립 지원을 약속했지만 함흥차사였다. 이젠 말로만 끝나는 말잔치는 신물이 난다. 2세 교육을 위해서라도 조국의 지각있는 분들이 지원을 좀 해 주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기자는 충심으로 최태호 씨의 작은 소망이 이루어지길 빌면서 출근 시간이 임박한 그와 아쉬운 작별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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