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책방에서 찾은 한 권의 '보물'

<진실을 영원히 감옥에 가두어 둘 수는 없습니다>

등록 2002.03.27 22:40수정 2002.03.28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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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렇게 일찍 나가?"
어제 오전, 아내가 가방을 들고 집을 나서는 내게 물었다. 평소보다 한 시간쯤 이른 시간에 출근을 하니 이상하게 보였던 것이다.
"헌책방에 들러 <거꾸로 읽는 세계사>를 사려고. 모레 독서토론 있거든."
나는 딸아이에게 뽀뽀를 하면서 대답했다.

"그 책 책장에 있잖아?"
아내가 현관으로 따라나오며 말했다.
"얼마 전에 조카한테 줬어."
아내가 다시 놀랍다는 듯이 물었다.
"그런 책도 읽고 토론해?"
"응. 중학교 권장도서래."


문득 지난 주 목요일 학원에서 있었던 독서토론 시간이 떠올랐다. 토론을 마치고 나서 아이들에게 "다음에는 역사 공부를 했으면 싶은데 읽고 싶은 책 있어요?" 하고 물었다. 그러자 한 아이가 대뜸 "<거꾸로 읽는 세계사>요" 하고 대답했다.
'<거꾸로 읽는 세계사>라고?'
나는 아이의 말에 깜짝 놀랐다. <거꾸로 읽는 세계사>는 학창시절 드레퓌스 사건이며 중국의 대장정이며 베트남 전쟁의 진실 따위를 알게 해준 책이기 때문이었다.
"학생, 어떻게 그 책을 알게 됐죠?"
"전에 어떤 선생님이 소개해 주셨어요. 학교 권장도서 목록에도 나와 있는 걸요."

지하철 동대문 역에서 내려 붐비는 사람들을 헤치면서 걷다 보니 헌책방 골목이 나타났다. 대학교재며 사전 따위를 파는 서점을 지나 단행본을 파는 책방에 이르렀다. 책방 앞에는 겨우 사람 하나 들어갈 틈만 남겨놓은 채 책들이 내 키보다 더 높이 쌓여 있었다. '사막에서 바늘찾기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사려는 책이 있나 살펴보기 시작했다.

"뭘 찾으세요?"
책방 아저씨가 듣기 좋은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나보다 너댓 살 위로 보이는 아저씨는 서글서글한 눈을 갖고 있었다.
"<거꾸로 읽는 세계사>요."
아저씨는 "어디서 본 것 같은데.." 하면서 책을 찾기 시작했다.
책방 아저씨가 책을 찾는 동안 책방 안을 꼼꼼 살펴보았다. 철학 에세이, 닥터 노먼 베쑨, 인간 주은래.... 학생시절 읽었던 책들이 눈에 들어왔다.

'아니...'
나는 책을 한 권 한 권 살펴보다가 눈길을 멈추었다. 창작과비평사에서 나온 <진실을 영원히 감옥에 가두어 둘 수는 없습니다>가 눈에 띄었기 때문이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하고 외치며 분신자살한 청년 전태일의 일대기가 담긴 <전태일 평전>의 저자요, 전두환 정권이 저지른 천인공노할 '부천서 성고문 사건'의 변론을 맡았던 인권변호사 조영래의 칼럼과 변론문 등이 담겨 있는 책이었다.

책틈에서 어렵사리 <진실을 영원히 감옥에 가두어 둘 수는 없습니다>를 꺼내 들었다. 책 표지에는 지금은 고인이 된 조영래 변호사 사진이 있었다. 사진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힘겨웠던 학창시절 그의 글을 읽고 용기와 희망을 얻은 일이며, <진실을 영원히 감옥에 가두어 둘 수는 없습니다>를 책장에 소중히 간직한 채 이따금 꺼내 읽었던 일이며, 지난해 말에 장차 변호사가 되고 싶다는 예비법대생에게 <진실을 영원히 감옥에 가두어 둘 수는 없습니다>를 빌려준 일들이 떠올랐다.


"여기 있습니다."
책방 아저씨 목소리에 나는 옛 생각에서 벗어났다. 고개를 들어보니 아저씨가 <거꾸로 읽는 세계사>를 내게 건네고 있었다. 88년에 나온 초판본으로 꽤 낡은 책이었다.
"개정판은 없나요?"
아이들과는 개정판을 읽고 독서토론을 하기로 되어 있었다.
아저씨는 좀더 찾아보고 나서는 "없는데요." 하고 말했다.

"얼마죠?"
<진실을 영원히 감옥에 가두어 둘 수는 없습니다>를 아저씨한테 건네며 물었다.
아저씨는 책을 슬쩍 보더니 말했다.
"이천원 주세요."
나는 두말 않고 책값을 지불했다. 그리고 <거꾸로 읽는 세계사>를 아저씨한테 건네며 말했다.
"개정판을 못 구하면 다시 올게요."
"그러세요."
아저씨 목소리에는 싫은 기색이 조금도 묻어 있지 않았다.
책방을 몇 군데 더 둘러보았지만 <거꾸로 읽는 세계사> 초판본은커녕 개정판도 찾을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먼저 들렀던 책방으로 다시 발길을 돌렸다.


지하철 안에서 <진실을 영원히 감옥에 가두어 둘 수는 없습니다>를 바라보았다. 마치 천만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귀한 '보물'을 얻은 듯했다.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기는 동안 내 마음은 서서히 역사의 부름앞에 부끄럽지 않고자 했던 학창 시절로 되돌아갔다. 행복한 헌책방 나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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