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택·이은봉 지천명에 삶을 깨닫다

신작시집 <나무> <내 몸에는 달이 살고 있다>

등록 2002.03.28 17:49수정 2002.03.28 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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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孔子)는 나이 오십을 일컬어 지천명(知天命)이라 했다. 애써 버둥대지 않아도 절로 '하늘의 이치를 깨닫게되는' 나이. 몇 해 전 허위허위 지천명의 고개를 넘은 '섬진강'의 시인 김용택(54)과 목전으로 다가온 지천명을 맞게 될 '좋은 세상'의 시인 이은봉(49)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시집을 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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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 이은봉(좌)과 김용택. ⓒ창작과비평

중년의 고갯마루에서 흐르는 강을 보며 편안히 뒷짐진 채 한 걸음 물러서서 세상과 인간을 보는 시선의 넉넉함. 자신이 발붙이고 사는 땅에 대한 가없는 애정이 시의 행간마다에서 흠씬 묻어나는 2권의 '품 넉넉한' 시집을 읽는 밤은 행복하다. 김용택의 <나무>와 이은봉의 <내 몸에는 달이 살고 있다>(창작과비평).


서로 다른, 그러나 꼭 같은 깨달음

두 시인의 이번 시집 속을 공통적으로 관통하고 있는 단어는 '달관'과 이와는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니는 '열정'. 세상사 희노애락(喜怒哀樂)과 남의 힐난에 쉬이 흔들리지 않을 나이에 이른 사람 특유의 '넉넉한 관조'와 아직도 남아 있는 열 여덟 문학청년의 정신으로 쉼 없이 시를 쓰는 '문학을 향한 정열'이 동시에 담겨있다는 이야기다.

방향을 달리하는 듯하지만, 결국엔 같은 이야기를 하고있는 두 사람의 아래 진술은 이를 증명한다.

'눈감았다 뜨면 세상, 나무 다 보인다. 검게 빛나는 밑동이며 줄기, 우듬지며 잔가지까지도... 나도 한 소식했다보다, 하고 피식 웃는다... 제멋대로 빛나는 것들. 한 소식? 그런 것이 있었나, 싶다'(이은봉).

'시란, 시인이란 무엇이냐? 솔숲을 찾아든 햇살 속, 허공을 가르며 눈부시게 내려오는 솔잎 하나 오! 오! 눈부신 자유, 나는 아직 두려움을 모른다'(김용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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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은봉의 <내 몸에는 달이 살고 있다> ⓒ창작과비평
단순히 사물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의 내면을 읽는 것이 시라면, 읽어낸 사물의 내면을 언어로 재창조하는 것이 시인이라면, 30년에 육박하거나, 그 세월을 넘어서는 그들의 시력(詩歷) 즉, 세상에 대한 관심과 연구는 충분히 '한 소식' 혹은 '큰 깨달음'을 줄 만도 하다.

그런데도 '한 소식이란 게 있기나 했었나'라고 애써 눙치며 물러서는 이은봉의 태도를 보라. 이것을 '달관' 외에 무엇이라 이름할까?


자식들 학비와 겨울을 넘길 보일러 기름 값과 하루하루가 다른 건강상태를 걱정하기에도 빠듯한 오십넷의 나이에 겨울 솔숲을 거닐며 새삼 발견한 햇살 한 줌에 저렇듯 감동할 수 있다니. 일곱 살 아이처럼 한 문장에 느낌표를 2개나 쓰다니.

그렇다. '시인' 김용택을 두렵게 만드는 건 '어느 날부터 내가 시를 쓰지 못하게 된다면'이라는 상상뿐이다. 그 외 세상 어떤 것도 그를 두렵게 하지 못한다. 이것이야말로 맑은 '열정'이 아니고 무엇이랴.

그래서 그들은 이런 노래를 부른다

김용택과 이은봉의 '달관'과 '열정'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이번 시집들. 어떤 시는 매우 짧고, 어떤 시는 지루할 정도로 길다. 그러나 결국 그들의 노래는 하나의 종착점을 향해 날갯짓하고 있다. 아래 시들을 보자.

꽃 피우지 못해도 좋다//손가락만큼 파랗게 밀어 올리는/메추리알만큼 동글동글 밀어 올리는//혼신의 사랑//사람들 몇몇. 입 속에서 녹아/약이 될 수 있다면//꽃 피우지 못해도 좋다//열매부터 맺는 저 중년의 생/바람불어 흔들리지도 못하는
-- 위의 책 중 '무화과'(이은봉)

시를 쓰다가/연필을 놓으면/물소리가 찾아오고/불을 끄면/새벽 달빛이 찾아온다/내가 떠나면/꽃잎을 입에 문 새가/전 산을 넘어와/울 것이다
-- 위의 책 중 '시를 쓰다가'(김용택)


인용된 두 시는 이은봉과 김용택 아니, 이 땅 시인들이 지향하는 삶이 어떤 것인지, 어떤 불가사의한 힘이 시를 만들어내는 것인지를 자명하게 보여준다.

탐욕의 독을 품은 아름다운 꽃보다는 병든 사람의 입에서 약으로 녹아 사라질지라도 '무화과'처럼 살고 싶고, 그런 마음을 품고 사는 시인에게 시는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꽃잎을 입에 문 새'가 가져다준다는 참으로 순박하고, 순진한 믿음. 그 먼지 끼지 않은 순수성이 속절없이 늙을 수밖에 없는, 그러나 그 늙음 속에서 깨달음을 얻어 가는 두 현자(賢者)의 생을 지탱한다.

그들의 깨달음은 시집 곳곳에서 여러 가지 형태를 띠고 나타난다.

이은봉의 경우 '발자국' '바다 1' '꽁치' '송아지처럼' 등의 시를 통해 세상사에 현혹된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 새들과 알몸임에도 부끄러워하는 법이 없는 '바다'처럼 살고 싶다는 열망을 드러내고, 해지면 어미소를 찾는 '송아지'처럼 마침내 인간이 넋을 기대고 쉴 곳은 고향(혹은, 모성)뿐이라는 것을 조근조근 속삭여주고 있다.

해 지고 어스름 내리면, 새들은 왜 모두 날개를 접고 집으로 돌아가는 걸까.../해 지고 어스름 깔리면, 새들은 왜 모두 날개를 접고 새끼들 곁으로 돌아가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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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용택의 <나무> ⓒ창작과비평
김용택은 '세한도', '봄바람에 실려가는 꽃잎 같은 너의 입술', '잠시 빌려 사는 세상의 집들이 너무 크지 않느냐' 등 호흡이 긴 산문시를 통해 자연과 공생하기를 거부하고, 개발과 발전 일변도로만 치닫는 천박한 인간의 욕심을 점잖게 꾸짖고 있다.

최근 한국시단에 '붐'처럼 등장한 생태시(혹은, 환경시)의 영향을 받은 것도 같은데, 앙상한 주장이나 성급한 구호가 아닌 생활이 차곡차곡 담겨 있는 시편들이라 울림이 크고도 깊다. 우스꽝스런 사투리로 쓰여진 그의 시를 보면서도 마냥 웃을 수만은 없는 이유는 뭘까? 개발중심주의가 위협하는 인간의 생존이 그만큼 위험수위에 왔다는 반증?

방학이어서 시골집에 혼자 와서 혼자 뒹굴뒹굴 논다. 아침밥 먹고 조금 있으면 점심밥 먹고 조금 있으면 저녁밥 먹는다. 날이 조금 훤해지면 서리가 하얗게 깔린 아침 강변을 존나게 달려도 본다... (이런 적요하고 아름다운 섬진강의 풍광을 위협하는 것은 뭔가?)... 야, 근디, 너그들, 정말이지, 어디까장 올라가서 나무를 베어 넘기고 땅을 파뒤집고 길을 뜯어고칠래. 그 지랄을 언제까지 할 것이냐. 엉! 그 일이 끝이 있을 것 같냐? 아, 아, 시는 망했다...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시인으로 남아달라

평론가 남진우와 유성호는 김용택과 이은봉의 시집에 '삭막한 세상에서 우리가 망각해버린 리듬과 멜로디를 상기시키는 아름다운 음악'이라는, '비극적 역동성이 낡아가는 우리 시대에 깊은 서정적 충격을 주고있다'는 고급스런 칭찬의 말을 붙였다.

명민한 평론가는 물론 아니고, 눈밝은 독자에도 미치지 못하지만 <좋은 세상> <섬진강> 등 두 시인의 시집을 어린 시절부터 읽어온 기자도 부탁 하나 정도는 해도 되겠지.

느린 어투와 굼뜬 당신들의 몸놀림을 세상이 조롱하더라도 결코 시를 버리지는 말아달라는 것. 지천명에 이르러서야 당신들이 깨달은 세상의 이치, 그 작은 부분이나마 쉬지 않고 우리들의 귀에 속삭여 달라는 것.

시인이여, 어차피 그대들이 지향해온 생이란 모두가 우러러보는 '거산태목(巨山太木)'의 삶이 아니라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자신이 뿌리내린 삶의 터전을 지키는 하찮은, 그래서 더 아름아운 '섬진강 버들붕어'같은 삶이 아니었던가.

나무

김용택 지음,
창비, 2002


내 몸에는 달이 살고 있다

이은봉 지음,
창비,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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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신라 여자> <아름다운 서약 풍류도와 화랑> <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등의 저자. 경북매일 특집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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