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 국민경선 과정에서 이인제 후보가 노무현 후보에 대해 색깔공세를 펴고 있다. 긍정적인 측면도 분명 있다. 족벌신문들이 이인제 파동으로 흥행은 끝나고 대립이 격화돼 판이 유지될지 의문이라고 짐짓 재를 뿌리는 와중에, 다시 국민들의 관심을 불러올 수 있는 효과가 있을 수 있으며, 검증작업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로운 쟁점을 제기하고 검증을 한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도록 자제력을 발휘할 필요는 있다. 객관적 사실에 근거하지 않거나 과장해서 상대를 곤경에 빠뜨리고자 하는 정략적 접근은 경계해야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상대에 대한 검증작업과 병행하여 자신의 비전을 제시하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비전 제시는 없고 상대를 모략하는 전략으로 일관할 때는 공멸 이외에는 얻는 게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노무현 후보가 파업현장에서 한 연설내용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노 후보는 이에 대해 성실하게 답변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과격하고 파괴적인 사회주의 세력이니, 당의 좌경화를 막겠다느니 하는 식으로 빨간 칠을 하겠다는 발상은 바람직하지 않다.
매카시는 이 수법으로 상원의원을 한번 더 해먹었지만 끝내는 몰락하고 말았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서강대 박홍 전 총장도 한 때는 매카시즘적 주사파발언으로 재미를 보았지만, 그 때 스스로 채운 족쇄를 풀지 못해 다시 총장이 될 수 있는 길을 봉쇄당했다.
이인제 후보는 노동부 장관을 하던 93년의 일을 되돌아보기 바란다. 현대자동차의 노사분규가 심각하게 진행되던 때 이인제 장관은 '무노동 부분임금'을 주장했다. 이 밖에도 대단히 파격적인 주장들을 내놓았다. 재계와 수구신문들, 타 경제부처 장관들, 당의 반대에도 굴하지 않고 소신을 밀어부쳤다. 이인제 장관은 파괴적인 사회주의 과격세력이었을까?
정치경제학 이론에서 임금은 노동의 대가가 아닌 노동력가치에 대한 지불이다. 이 이론에 따른다면 파업으로 인해 노동을 하지 않은 것이 임금을 지불하지 않는 근거가 될 수 없다. 이 장관의 소신이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었을까? 아니었을 것이다. 이 장관이 무노동 부분임금을 강하게 밀어부친 배경은 사회주의 이론이 아닌 대법원 판례였다. 파업기간에 대해서도 최소한의 생활급을 보장해주어야 한다는 판례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조선일보는 이 장관을 색깔론으로 공격했다. 몇 가지 기사들을 보자.
"노조의 정치활동을 허용하는 문제가 정부쪽에서 검토중인 것으로 보도되었다. 이인제 노동부장관은 올해 정기국회에 제출할 노동관계법 개정안에서 이 문제를 검토중이라고 밝힘으로써 정부 노동정책의 중요한 변화가능성을 시사했다. 그는 또 제3자의 노조활동 개입금지 조항도 현실에 맞지 않는다고 보고 이를 폐지할 생각임을 밝혔다. ···다시 말해서 보다 개방적인 노동법규가 나와도 아무런 부작용이 없으려면 노와 사의 성숙성이 한차원 더 높아져야 하리란 요청이다. 불법쟁의, 일탈적 투쟁방식, 과격주의적 노동운동 노선, 그리고 사쪽의 부당노동행위 등이 다같이 자제되어야 하겠다는 것이다."(1993년 5월7일자 사설, '노조의 정치활동')
"최근 노동정책의 변화와 방향선회가 급속도로 이루어져 주목된다. 이인제 노동부장관은 그동안 각종 노정관계 발언과 노동행정 지침변경을 통해 이같은 정책변화를 주도했다.
이 장관이 취임직후 사용자의 부당 노동행위에 대해 과거와는 다른 강경자세를 보인데 이어 잇따라 밝힌 해고근로자의 복직추진, 인사경영권의 단체협상 부분인정, 무노동 일부임금지급, 해고효력을 다투는 근로자의 조합원 신분보장 등은 하나같이 기존의 노동정책과 관행을 뒤엎는 획기적이고 충격적인 것들이다."(1993년 5월26일자 사설, '이인제 노정')
"아무리 개혁이라지만 노사관계의 기본골격을 뒤엎기에 충분한 정책을 외부는 차지하고, 내부검증도 생략한 채 불쑥 내놓은 듯한 「인상을 준」 장관, 실세 장관의 「개혁 아이디어」라니까 꿀먹은 벙어리인양 무턱대로 따랐다가, 뒤늦게 외양간을 손질해 보려는 실무진들…. 이들이 엮어낸 파문의 한가운데에는 혹시라도 「개혁 관료주의」가 싹트고 있는 게 아닐까."(1993년 5월29일자, 기자수첩「부분임금제」)
이것은 빙산의 일각이다. 이인제 장관의 새로운 노동정책에 대해 조선일보는 재계의 입장을 대변하면서 끊임없이 흠집을 냈다. 이를테면 과격하고 급진적인 정책이라는 비판이었다. 그러나 이 장관의 정책은 이념적인 지향성이 있는 게 아니라 지극히 현실에 충실한 정책들이었다.
결국 무노동 부분임금은 유보되었고, 이 장관도 연말 개각에서 한완상 부총리와 함께 경질되고 말았다. 이에 대해 조선일보는 "한완상 부총리와 이인제 노동부 장관의 퇴진에서 김 대통령의 보수지향을 점치는 시각도 있다"(12월22일자 해설기사)며 환영의 뜻을 나타냈다.
이인제 후보는 당시 가졌던 정책들에 대해 지금은 어떤 생각일까? 그게 바로 노동자가 주인 되는 세상의 모습은 아닐까? 조선일보를 필두로 한 수구신문들의 이념공세를 견디지 못하고 신념이 좌절되고 날개가 꺾였던 이인제 후보가, 바로 그 신문들의 성향에 편승하여 인위적인 보혁대결구도를 형성하면서 색깔공세를 펴고 있는 것이다. 93년의 그 참신했던 정책으로 경쟁을 하면 안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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