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미들의 반란" 그 10시간의 드라마

<현장> 외환은행 '마라톤 주총' 관전기

등록 2002.03.30 08:18수정 2002.04.03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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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여연대 경제개혁센터 김상조 소장(왼쪽 화면 속)과 김경림 외환은행장(오른쪽) ⓒ 오마이뉴스 김시연

외환은행 주주총회는 각본 없이 진행된 한 편의 '드라마'였다. 주연은 외환은행 소액주주들이 맡았고 조연은 외환은행 임직원들과 대주주, 그리고 총연출은 소액주주운동을 이끌어온 참여연대였다.

3월29일 오전 10시경 주주총회가 열린 서울 명동 외환은행 본점 4층 강당은 200여 명의 주주들과 은행 임직원 뿐 아니라 많은 취재진들로 붐볐다. 그동안 삼성전자 등 대기업 주총에서 소액주주의 힘을 과시해온 참여연대가 올해는 외환은행에 집중하겠다고 '선전포고'까지 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관련기사]

[2002년 2월28일] '통과의례'로 전락한 삼성전자 주총 /김시연 기자

이른 아침 회사를 찾은 주주들을 가장 먼저 맞은 건 입마개를 한 수십 명의 외환은행 노조원들이었다. 이들은 1층 로비와 4층 주총장 입구에서 각각 '관치금융 철폐 낙하산 인사 반대'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침묵시위를 벌였다. 외환은행 노조는 최근 임기 1년여를 앞둔 김경림 행장의 사임이 '낙하산 인사'를 예고하고 있다며 강하게 반발해왔다.

"점심은 물론, 저녁식사까지 준비하겠다"

▲ ⓒ 오마이뉴스 김시연
"주주번호 87번, 김상조입니다."
경영진의 영업보고가 끝나자 손을 불끈 든 참여연대 경제개혁센터 김상조(한성대 교수) 소장은 이날 참여연대의 주총 참석 이유를 밝히는 것으로 첫 포문을 열었다.


김상조 교수는 "외환은행이 그동안 어려움을 겪은 원인은 대우, 현대 등 대기업 관련 부실 여신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대규모 부실의 원인과 사후 대책의 문제를 철저히 밝혀 경영 투명성을 갖추도록 해야 한다"고 밝혔다. 또한 "관치금융과 낙하산 인사 의혹이 제기되고 있는 상황에서 능력 있고 시장에서 신뢰받는 행장을 선임해야 한다"면서 이사들에게 행장 선임 과정에서 투명성 보장을 요청하기도 했다.

이날 주총 의장을 맡은 김경림 외환은행장은 참여연대측 소액주주 대표들을 의식한 듯 "하루종일 걸려도 좋으니 하고 싶은 질문은 모두 하라"면서 "오늘 점심식사는 물론이고 필요하면 저녁까지 준비해 놓겠다"며 일찌감치 멍석을 깔았다.


참여연대-'총회꾼' 맞대결 눈길

▲ '총회꾼'에 의해 발언이 가로막힌 김상조 교수가 허탈한 표정을 짓고 있다. ⓒ 오마이뉴스 김시연
이날 외환은행과 참여연대의 논리 대결 못지 않게 눈길을 끈 것은 이른바 '총회꾼'과 참여연대의 맞대결이었다. '총회꾼'이란 기업 주총장에서 회사나 특정 대주주의 편에 서서 반대 의견을 제기를 막고 빠른 의사 진행을 유도하는 이들을 말한다.

이날 주총에서 여론을 의식한 회사측이 참여연대측을 '배려'해 비교적 발언기회를 많이 준 반면 총회꾼들의 방해는 더욱 도드라졌다. 하지만 참여연대측 역시 15명의 전문가들이 한꺼번에 참석, 숫적으로 밀리지 않으면서도 사전 역할 분담을 통해 총회꾼들의 방해에도 예정된 질문을 계속 이어갔다.

참여연대와 총회꾼들의 첫 격돌이 시작된 건 점심식사를 위한 휴회를 앞둔 낮 12시경. 참여연대 김상조 교수, 김석연 변호사 등이 돌아가며 질문을 계속하자 '총회꾼'들은 참여연대측 발언 도중 의사진행발언 등을 요구해 맥을 끊거나 "이제 그만하라"며 야유를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의 면면은 지난 2월 삼성전자 주총 현장에서 기자가 직접 목격한 '총회꾼'들의 멤버 구성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현대계열사 청문회장 방불

▲ 참여연대측 소액주주 대표들이 각종 도표를 동원해 질문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김시연

외환은행이 현대건설, 현대상선, 하이닉스(옛 현대반도체) 등의 주거래은행으로 현대계열사 구조조정 과정에서 채권단을 대표해온 탓에 이날 주총장은 '현대 청문회장'을 방불케 했다.

참여연대는 우선 현대계열사 부실 여신을 '고정 이하 여신'이 아닌 요주의 여신으로 분류한 것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다. 참여연대 김상조 교수는 "고정이하 여신비중보다 요주의 여신 비중이 크다는 것은 지금 당장은 부실채권으로 인정되진 않지만 향후 전환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향후 외환은행의 건전성과 수익성에 위험을 가져올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김경림 행장은 "자산건전성 여신 분류는 은행의 고유 권한"이라고 밝히고 "대신 요주의 여신도 최저 충당금 2%를 훨씬 상회하는 20~30%선에서 충당금을 쌓는 등 특별관리하고 있다"고 밝혔다.

또한 현대건설 자구계획이행 과정에서 현대 대주주인 정몽헌 회장 일가가 그 책임에 상응하는 손실을 부담했는지 집중적으로 따졌다. 김상조 교수는 "자구이행 전후로 이뤄진 현대계열사간 주식이동으로 정몽헌 일가의 지배구조는 지주회사만 바꿔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면서 "결국 정몽헌 일가에 부담시키지 못한 손실이 외환은행으로 이전돼 주가하락을 가져온 것이 아니냐"고 지적했다.

이에 외환은행측은 "당시 정 씨 일가가 소유하고 있던 현대계열사 주식을 전액 감자시키는 등 대주주의 책임은 모질게 물었다고 생각한다"면서 "하지만 주식 매각하는 것만 체크했지 누가 사는지까지는 파악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현대계열사 구조조정과 정몽헌 회장 책임 문제에 대한 참여연대의 질문이 계속되자 대주주측은 노골적인 거부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일부 소액주주 역시 "참여연대가 주주입장 보다 시민운동 차원을 앞세우고 있다"면서 회사 주가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며 반감을 나타내기도 했다.

이에 김상조 교수는 "외환은행 어려움의 근본 원인은 현대의 부실 때문이라는 점에서 그 부실원인과 사후 대책 문제점을 지적하는 건 주주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면 맞섰다.

이밖에 일부 소액주주들은 현재 외환은행이 중심이 돼 해외 매각을 추진중인 하이닉스의 '독자 생존'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새 이사회 의장은 전임 행장 자리?"

▲ 표결로 이어진 정관 변경안. ⓒ 오마이뉴스 김시연
정관 변경안에서는 이사회 의장 자격을 둘러싸고 논란이 벌어졌다. 문제가 된 부분은 '사외이사'만이 이사회 의장을 맡을 수 있게 한 기존 조항을, 사내이사나 은행장 등도 의장을 맡을 수 있도록 조정한 부분. 이에 대해 참여연대 김상조 교수는 이번 정관 변경이 이번에 사임한 김경림 행장을 이사회 의장에 앉히기 위한 사전 정지작업이 아니냐는 의혹을 강하게 제기했다.

참여연대 김석연 변호사는 "기존 정관은 행장과 이사회 의장이 반드시 분리되고 사외이사만 의장을 맡게 해 이사회 운영이 내부 경영진으로부터 독립성이 보장되는 반면 새 정관은 이러한 분리원칙이 허물어져 이사회 독립성을 해칠 우려가 있다"며 해당 조항을 제외한 정관 변경안 통과를 요구하는 '부분수정동의안'을 제기했다.

결국 표결로까지 이어지긴 했지만 우여곡절 끝에 수정동의안에 찬성하는 사람만 투표하는 방식을 채택했고 결국 이날 참여한 2억8천만주 가운데 24만7천주(0.08%)만이 찬성해 결국 원안이 수정없이 통과됐다.

노-사-주주 "투명 주총 만족한다"

▲ 참여연대측 소액주주 대표가 현대계열사 문제에 관해 질문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김시연

"이것으로 오늘 주총을 모두 마칩니다. 꽝! 꽝! 꽝!"
결국 이날 오전 10시에 시작된 주총은 10시간의 마라톤 회의 끝에 저녁 8시20분경이 돼서야 끝났다. 이 기록은 98년 13시간30분을 기록한 삼성전자 주총에는 밀리지만 금융기관 주총 사상 역대 최장기록이다.

"주총이 끝나면 바로 행장직에서 물러나게 돼 있어 일부러 시간을 오래 끌었다."
김경림 행장은 주총 결과에 만족한 듯 뼈있는 농담과 함께 폐회 직전 김상조 교수 등 주주들에게 주총 소감을 듣는 여유를 보이기도 했다.

주총을 마친 김경림 행장은 소감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참여연대의 참여로 많은 의문이 풀려 회사의 투명성 제고와 대외 신인도 향상에 큰 도움이 됐다"면서 "다른 회사 주총에도 영향을 미쳤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오늘 참여연대를 상대로 선방한 것 같느냐는 질문에는 "선방이 어디 있나. 우린 이해 관계가 같다"고 답해 참여연대측과 대립 구도로 비치는 것에 대해서는 거부감을 나타냈다.

이날 주총을 끝까지 참관했던 외환은행 노조 김지성 위원장 역시 "외환은행 스스로 투명 경영과 주주가치 극대화를 위해 노력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며 이번 주총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최근 외환은행장 '낙하산 인사' 의혹과 관련 "이제 겨우 흑자 기조에 들어섰는데 무소신 무검증 낙하산 인사가 들어와 외환은행을 나락을 떨어뜨리는 것을 가만히 볼 수는 없다"면서 "참여연대나 우리나 애사심에 기반한 활동"이라고 강조했다.

주총장을 떠나던 김상조 교수는 "은행은 신용기반 회사여서 자칫 무책임한 문제 제기가 영업에 큰 타격을 줄 수 있기 때문에 발언을 자제하는 등 많이 조심스러웠다"며 어려움을 토로했다. 다만 정몽헌 회장의 손실 분담 과정에서 외환은행이 최소한의 역할조차 못했다는 점을 상기시키며 경영진들의 임무 소홀에 대한 아쉬움을 나타내기도 했다.

참여연대-코메르츠방크, 서로 "실망했다"

▲ 드로스트 외환은행 부행장. ⓒ 오마이뉴스 김시연
이날 주총에서 보여준 대주주 코메르츠방크측을 대표한 드로스트(Manfred Drost) 외환은행 부행장과 참여연대 사이의 팽팽한 긴장 또한 눈길을 끈 대목이다. 드로스트 부행장은 자신을 직접 겨냥한 질문이 아니어도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통역을 통해 답변하는 적극성을 보였다.

하지만 오후 6시경 정몽헌 현대 회장 책임 문제가 참여연대에 의해 계속 거론되는데 발끈한 드로스트 부행장은 "오늘 참여연대 주총 참석에 큰 기대를 했는데 이건 정도에서 벗어난 것 같다"면서 "이번 주총을 계기로 특정 개인(정몽헌 회장)에게 책임을 지우려는 것 같은데 그렇게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참여연대측을 직격적으로 비판했다.

이에 참여연대 김석연 변호사는 "(코메르츠방크측의 태도가) 오히려 실망스럽다"며 "지난 감자 과정과 같이 모든 주주가 손실을 입는 일이 반복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부실책임을 엄중히 따져야 한다는 우리 생각"이라며 바로 맞받아쳤다.

김상조 교수는 주총이 끝난 뒤 "선진 은행경영법을 가르칠 것으로 기대했던 코메르츠은행이 오히려 대주주의 방패막이 되고 지배구조 개선에도 적극적인 노력이 없는 것 같다"며 아쉬움을 나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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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사회부에서 팩트체크를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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