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모 방송국의 9시 뉴스를 보다가 흠칫 놀란 일이 있었다. 연예 정보 프로그램도 아닌, 쇼프로그램도 아닌 9시 뉴스에서 아이돌 스타인 한 여가수의 소식이 전해졌다. 아무리 뉴스가 상당 부분 show화 되어서 이젠 뉴스에서 연예인의 소식을 전해듣는 것이 그다지 놀랄 만한 일은 아니라고 하지만, 아직까지 9시 뉴스에 등장하는 연예인의 이름은 조금 낯설다. 더군다나 마약사건, 혹은 사고소식이 아닌 개인적인 활동에 대한 소식이라니.
<한국가수 보아 일본 앨범차트 1위>
일본에서 인기를 누리고 있는 한국 출신 소녀가수 보아(BoA.15)가 일본 음반차트 1위를 차지했다. 보아의 앨범 `리슨 투 마이 하트(Listen to My Heart)"는 25일 공개될 예정인오리콘 차트에서 정상에 오른 것으로 밝혀졌다. 한국 가수가 일본 앨범 차트에서 1위를 기록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중략) / 2002년 3월 19일 연합뉴스
그날을 전후하여 각종 스포츠 신문, 연예 정보 프로그램은 가수 "보아"에 대한 뉴스로 떠들석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의 일본 오리콘 차트의 정상 차지는 한국인으로서 처음으로 이루어낸 쾌거였다. 단순히 다른 나라 가요 차트의 1위 석권이라는 의미 외에, 일본의 가요 차트 1위 석권은 우리 나라 국민들에게는 또 다른 의미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래서였는지 다른 가수들의 해외 활동에서의 성과보다 보아의 1위 소식은 더욱더 떠들썩하게 보도되었다. 이 뉴스가 나가고 난 후 며칠이 되지 않아, 보아와 관련된 새로운 뉴스 하나가 신문지면에 등장한다.
SM 엔터테인먼트가 일본에서 활동중인 하이틴 여가수 보아로 인해 상당히 짭잘한 로열티 수익을 올릴 것으로 전망된다. 회사 관계자는 21일 "지난 13일 일본에서 발매된 보아의 일본판 첫 정규앨범 "Listen to My Heart"가 20일 오리콘차트 주간 앨범 판매 부문에서 정상을 차지했다"며 "현재까지 50만장 정도가 팔린 것으로 추정돼 로열티 수입이 급증할 것으로 기대된다"고 밝혔다. 회사측에 따르면 보아로 인한 로열티 수입은 앨범판매량이 50만장일 경우 10억원, 1백만장이면 20억원 정도다. 이에 따라 올해 에스엠의 매출과 순이익 규모는 기존 예상치인 4백20억원과 50억원을 훨씬 웃돌 가능성이 높아졌다. / 2002년 3월 29일 한국 경제
이 많은 일들을 정말로 그 15세의 어린 소녀가 다 이룬 것일까. 외모에서 풍겨 나오는 성숙한 이미지와 다듬어진 가창력은 15세라는 그녀의 어린 나이가 믿겨지지 않게 한다. 일본 오리콘 차트의 1위 자리를 따내고, 자신이 몸담고 있는 기획사에 몇 십억에 가까운 로열티를 가져다준 그녀를 보고 있자면, 한편으론 안쓰럽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그녀의 1위 기사가 나오고 채 열흘이 되지 않아 SM엔터네인먼트의 수입급증에 대한 기사가 나오는 것은, 예상하고 있었던 사실이지만 씁쓸한 웃음을 짓게 한다. 사람들이 보아의 성공을 보면서 "보아, 참 행복하겠다"라고 생각하지 않고, "SM 돈 많이 벌겠네"라고 생각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사실 SM엔터테인먼트의 일본을 향한 첫 번째 프로젝트는 3인조 여성그룹 SES였다.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라, 일본말을 현지인처럼 구사하는 멤버의 존재는 괜히 구색 맞추기 위함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SES는 일본에서는 기대 이하의 인기를 얻는 데 그치고 만다. 그리고 나서 SM 엔터테인먼트가 일본을 향해 두 번째로 쏜 화살이 바로 "보아"였고, 그녀의 성공은 이미 신문상에 보도된 대로 SM엔터테인먼트에게 큰 수입을 가져다주었다. 우리는 머지않아 보아의 성공을 발판으로 SM 엔터테인먼트가 준비한 제2, 혹은 제3의 보아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보아의 성공은 기획사가 오랜 기간을 준비하여 어린 소년 소녀들을 발굴, 소위 "키우는" 이유를 알 수 있게 해준다. 이것은 굳이 SM엔터테인먼트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도 수많은 엔터네인먼트사에서는 신인들을 위한 오디션이 열리고 있고, 그곳에 참가하는, 또 발탁된 사람들의 대부분은 10대 청소년들이다. 연예인이 되고 싶어하는 청소년들은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너나할 것 없이 대형 엔터테인먼트사로 몰린다. 그들은 자신의 꿈을 담보로 대형 기획사와 계약을 맺는 샘이다. 그도 그럴 것이, 연예인으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기획사의 지원 없이는 힘들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기획사의 힘은 막대하다.
최근 몇 년간 연예계를 주름잡았던, 혹은 주름잡고 있는 스타들 -HOT, 젝스키스,핑클 ,조성모, GOD, SES, 신화, Click-B 등 - 은 모두 연예계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몇몇 기획사의 "작품"들이다. 그들은 "작품"이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소속사의 기획에 의해 이미지 메이킹을 되고, 앨범을 내며, 방송 활동을 한다.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그들의 데뷔가 기획사의 손에 의해 이루어지듯이, 그들의 은퇴마저도 기획사의 의해 행해진 다는 것을 어느 누구도 부인하기 힘들 것이다. 몇 년 전 만해도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HOT와 젝스키스는 인기의 산꼭대기에서 한발짝 내려오려는 순간 느닷없이 팀 해체를 선언했고, 예상대로 그들의 소속사에서는 HOT와 젝스키스의 뒤를 이을 만한 신인그룹들이 그들의 해체가 무섭게 등장하기 시작했다.
HOT의 해체는 멤버들간의 계약 연장 문제가 소속사와의 갈등을 빚으면서 씁쓸한 여운을 남기었다. 당시 소속사로부터 공평하지 못한 대우를 받아 소속사를 이전한 HOT의 전 멤버들이 만든 그룹, JTL의 노래 가사 속에서 기획사의 횡포에 얼룩진 10대의 꿈을 읽을 수 있다. (물론 이 가사가 구체적으로 특정인물을 지칭하고 있지는 않다.)
어! 요놈 봐라! 또 돈독에 올라 어린양 머리 위에 올라 해대던 짓 아직도 해 정신 못 차린 놈들 들어봐! .....(중략) 어린 시절 내 한 몸 받쳐 살아왔던 꿈같던 후회하기조차 없었던 나날들 정이 어쩌구 저쩌구리 하던 놈 다 내 앞에서 사라져.....(중략) 하염없이 내리던 내 눈물조차 받아주지 않던눈물조차 없는 너의 모습에 또 다시 우리와 같이 마음 아파할 많은 아이들 다신 이런 일 일어나지 않기를 또 다시 슬픈 현실에 맘 아파하지 않기를..
- JTL 1집 수록곡 "놀아나는 아이들" 中 -
보아의 성공은 그녀의 가창력과 음악성만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그녀의 음악적인 역량 뒤에는 그것을 부각시키기 위해 철저하게 계산하고 기획을 한 엔터테인먼트사의 노력이 숨어 있다. 물론 10대들의 재능을 발굴하고 그들의 실력을 갈고 닦아준 기획사의 역할은 아쉽게 묻혀져 버릴 수 있는 인재들을 세상 밖으로 끌어낸다는 의미에서 충분히 가치 있다.
하지만 하나의 스타가 탄생하는 순간, 자신들의 꿈을 걸고 한 시작한 게임에서 패배해 눈물 흘리는 수많은 10대들이 있다는 것은 보이지 않지만 자명한 일이다. 그리고 지금은 인기의 절정에 닿아 있는 스타들도, 그들의 몸값이 떨어지는 순간 주저 없이 무대에서 내려와야만 하는 순간이 있음을 지켜보는 팬들도, 또한 그들 자신도 알고 있다.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한 댄스그룹의 멤버가 어느 프로그램의 셀프 카메라 속에서 한 이야기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이제, 내려갈 길이 보이는 듯 해요." 다음 타자는 또 누가 될 것인가. 대형 엔터테인먼트사가 재능 있는 인재를 키우는 것인지, 돈벌이가 될만한 아이템을 키우는 것인지. 그 답을 알면서도 많은 청소년들은 이 순간에도 자신의 꿈을 담보로 대형 기획사와 예정된 게임을 하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방송전문 웹진 zime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http://zime.fbc.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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