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풍'에 경남 진보진영 '당혹'

민주노동당원마저 지지선언...시민단체 '제팔 제흔들기'

등록 2002.03.31 22:50수정 2002.04.08 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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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내 진보진영과 시민운동권이 선거분위기에 휩싸이면서 심각한 고민과 혼란에 빠졌다. '총선시민연대'를 중심으로 일사불란하게 '낙천·낙선운동'을 벌였던 지난 2000년과 달리 이번에는 시민운동권 전체의 일관된 선거대응방침이 없기 때문이다.

민주노동당을 중심으로 한 진보진영의 고민과 혼란은 좀더 근원적이면서도 구체적이다. 어느 정도 바람이 불 것은 예상했지만 노무현 돌풍이 이렇게 클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당혹스런 민주노동당 =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고 있는 진보인사들의 노무현 지지선언을 바라보는 민주노동당 당직자들의 마음은 당혹스럽다 못해 참담하다. 몇 달 전 전북대 강준만 교수와 노무현 지지를 놓고 주고받던 '비판적 지지논쟁'이 무색해져 버릴 정도다.

실제로 29일 공개된 '경남지역인사 228명 노무현 지지선언' 명단에는 민주노동당이 '믿었던' 사람들이 대거 포함돼 있었다. 심지어 민주노동당 당원도 있었고 후원회원이나 자문교수단의 일원으로 당과 직·간접적 관계를 맺어온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정말 이건 뭔가 크게 잘못된 일이다. 아무리 노풍이 거세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다."

민주노동당 창원 을지구당 당직자의 탄식 섞인 말이다. 그는 "중앙위원회 차원에서 이에 대한 방침을 빨리 정해야 한다"면서 "특히 당원이 타당 후보의 지지를 선언한 일은 명백한 해당행위이므로 당기위원회에 회부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경남도지부 관계자는 "도지부 차원의 입장을 마련한 후 차기 중앙위원회에 이 문제를 안건으로 제출하겠다"고 말했다.


도지사·시장·군수 선거도 고민 = 노무현 돌풍은 지방선거 구도에도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우선 민주노동당 입장에서는 도지사 선거출마를 선언한 김두관 남해군수의 거취에 신경이 쓰이는 눈치다.

김두관 군수는 이미 지난해 연말 민주노동당과 자치연대·시민단체가 공동으로 도지사후보를 추대하는 형식을 요청한 바 있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은 이에 대한 명확한 방침을 정하지 못했고, 다만 정책연합 등의 가능성은 아직도 유효하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노무현 고문이 민주당 후보로 선출될 경우 노 고문을 중심으로 한 정계개편과 함께 도내 지방선거 구도에도 커다란 변화가 점쳐지고 있다. 이 경우 노무현 고문이 도지사 후보로 김두관 군수를 영입하려 할 가능성이 가장 높다는 것이다. 실제로 노 고문은 여러 자리에서 김두관 군수를 공개적으로 칭찬한 바 있다. 지난 20일 창원 인터내셔널호텔에서 열린 김 군수 출판기념회에도 노 고문은 영상메시지를 보내 김 군수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표시했다.

또한 상황전개에 따라선 도내에서 무소속 출마를 준비중인 중량감 있는 단체장 후보들이 대거 노무현 후보와 연대전선을 구축할 가능성도 높다. 이럴 경우 이회창 총재를 중심으로 한 한나라당과 노무현 후보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여당이 경남에서 격돌하는 구도가 된다.

민주노동당이 가장 상상하기 싫은 구도가 바로 이 경우다.

제 팔 제 흔들기 시민단체 = 시민운동세력은 워낙 정치적 스펙트럼이 다양하여 선거에서 일사불란한 전략을 구사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내심으로는 민주노동당이나 사회당을 지지하는 사람도 있고, 노무현 후보를 지지하는 사람도 있다. 또 여성후보의 진출을 위해서라면 한나라당이든 민주당이든 가리지 않겠다는 세력도 있고, 자기단체의 정체성과 맞다면 한나라당과도 연대할 수 있다는 세력도 있다.

또한 낙천·낙선운동이라는 네거티브 전술을 썼던 2000년 총선 때와 달리 이번에는 후보를 직접 배출하는 방식의 포지티브 전술을 쓰는 단체도 있다. 환경운동연합이나 여성단체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민단체들은 아직 대선이나 지방선거에 대한 뚜렷한 방침이 없는 상태다. 공명선거 활동이나 정책선거 유도 등 전통적인 시민운동이야 하겠지만 '후보 배출이냐, 낙선운동이냐'에 대한 명확한 결론이 없다는 것이다.

총선연대 이후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가 새로 결성되긴 했으나, 이 단체에서도 뚜렷한 선거방침은 내놓지 못하고 있다. 이는 결성 과정에서부터 몇몇 단체간 불협화음과 갈등을 겪었던 데다, 참여한 단체 가운데 이미 후보를 배출하기로 한 단체도 포함돼 있어 조율이 힘들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따라서 결국 시민운동권은 이번 선거에서 개별단체의 자율성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바꿔 말하면 '제 팔 제 흔들기식'이 되어버린 것이다.

헷갈리는 시민운동가들 = 사정이 이렇다 보니 시민운동가 중에서도 종잡을 수 없는 정치적 행보를 보이는 사람들도 종종 나타나고 있다. 마산의 한 시민단체 실무책임자로 있던 모 인사는 지난 총선에서 민주당 후보의 선거참모로 일하다 낙선하자 부산의 한 시민단체 실무자로 복귀했다. 그후 그는 김두관 군수가 공동대표로 있는 자치연대 실행위원으로 참여했다가 최근에는 노무현 지지모임인 '노사모'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29일 공개된 노무현 지지선언에도 시민운동가들의 이름이 들어 있다. 김태광 김해YMCA사무총장, 김지란 참교육학부모회 마창진지부장 등이 그들이다. 이밖에도 문화예술계·교수·전문직 등에 시민운동으로 이름이 알려진 인사들이 다수 포함돼 있다. 따라서 적어도 이들이 소속된 시민단체의 경우 낙선운동이나 선거감시운동은 곤란하게 됐다.

진주의 경우 최근 한나라당 시장 후보 공천에서 탈락한 강대승 변호사 때문에 많은 시민운동가들이 곤혹스런 입장을 토로하고 있다. 강대승 변호사는 지난 98년 지방선거 전에 진주환경운동연합 의장을 지냈고, 무소속 진주시장 후보로 출마해 낙선한 후 다시 이 단체의 공동대표를 지냈다. 그는 지난해 11월 1만여 명의 지지자를 이끌고 한나라당에 입당했으나 이번 공천에서 탈락하자 '불공정 경선'을 주장하며 다시 탈당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에 대해 진주지역의 한 시민단체 실무자는 "그가 시민단체 대표를 지낸 인물이라는 점에서 솔직히 당혹스럽고 부끄럽다"면서 "처음부터 무소속 출마소신을 밀고 나갔다면 모르지만, 이제 와서 공천에서 탈락하니 다시 무소속으로 나온다면 누가 좋게 봐주겠는가"라며 답답해 했다.

다른 시민단체 실무자도 "개인적으로는 강 변호사가 누구보다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사람이라고 본다"면서 "그러나 최근 그의 정치적 행보를 보면 기성 정치인들의 행태와 어떻게 다른지 모르겠다"고 털어놓았다.

이와 관련해 민주노동당 마산 합포지구당 주대환 위원장은 "시민운동이나 진보진영에서 선거를 앞두고 혼란을 겪는다는 것 자체가 철학의 빈곤을 드러내는 것"이라면서 "이 시점에서 운동가들의 철학과 노동자의 계급의식을 다시 한번 진지하게 정립해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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