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17일 오전 9시30분 여의도 민주당사 지하 1층 강당. 9시로 예정된 민주당 지도부와 소속의원 연석회의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고, 분위기는 침울하고 냉랭했다. 6·13 지방선거 참패 수습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모인 자리. 사회를 맡은 이낙연 의원이 세 번째 안내방송을 했다.
"노무현 대통령 후보께서 곧 도착하실 예정입니다. 도착하시면 시작하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의원들 사이에서 작은 소란이 일었다. "그냥 시작해요!" "왜 안 와!" 뒤쪽에 앉아 있던 안동선 의원이 단상 쪽으로 걸어나오며 회의를 빨리 시작하라고 항의 섞인 건의를 하자 맨 앞줄에 앉아 있던 한화갑 대표가 웃으며 말렸다. 결국 10분 뒤 노 후보가 도착하지 않은 상태에서 연석회의는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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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 6월 17일 여의도 민주당사 강당에서 열린 민주당 지도부와 의원 연석회의에 참석한 민주당 의원들이 침울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 이날 노무현 후보의 도착이 약간 늦어지자 작은 소란이 일 정도로 노 후보의 리더십은 도전을 받고 있다. ⓒ 연합뉴스 |
국민의례가 끝난 후 의원들이 자리에 앉았고, 그제서야 노 후보가 도착했다. 김 원기 고문과 함께 강당 출입문에 들어선 노 후보는 앞쪽 단상으로 걸어갔다. 그 사이 아무도,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어색한 침묵. 그 침묵을 깬 것은 우측 중간에 앉아 있던 이윤수 의원의 약간 비아냥 섞인 말이었다. "박수!" 의원들의 힘없는 박수가 울렸다.
문제는 리더십이다. 지방선거 후 민주당의 내분이 의외로 빠른 속도로 봉합됐지만 연석회의 자리에서 보여진 이 에피소드는 민주당 내부 문제의 핵심이 '리더십 문제'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이전 대통령 후보와 비교해보자. 김대중 대통령이 민주당의 전신인 국민회의의 대통령 후보였을 때는 위와 같은 장면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세상이 변하고, 정치 상황이 변하고, 인물이 변한 것이다. 문제는 '3김이 이후의 리더십'이다.
노무현과 민주당의 딜레마
'3김식 리더십'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강력한 카리스마와 권력의 1인 집중화, 굳건한 지역적 기반, 풍부한 정치자금, 군주처럼 따르는 계보 의원 등이다. DJ는 그야말로 민주당에서 아무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존재였다.
하지만 그런 DJ가 당을 떠났다. 혼란에 빠졌던 민주당은 오랜 진통 끝에 합의를 만들어내고 국민경선까지 치러 후보를 뽑았지만 노무현 후보가 가진 것은 계파와 조직·자금이 없는 국민적 지지뿐이다. 당권은 한화갑 대표에게 돌아갔지만 다른 정파의 비협조로 당권을 장악하지 못하고 있다. 강력한 DJ의 리더십이 떠났지만 아직 새로운 리더십이 구축되지 않은 것이다.
새로운 리더십에 대한 요구와 과거 리더십에 대한 향수 사이의 갈등에 노 후보의 딜레마가 있다. 현재 정치상황은 당정분리, 권력의 분권, 부정한 정치자금에 대한 국민적 심판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과거 3김과 같은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비판도 함께 일고 있다. 돈이 없어도 발휘되는 리더십, 공천권이 없어도 발휘되는 지도력, 지역적 기반이 없어도 나타나는 국민적 지지, 노 후보는 이런 것을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을 노 후보도 잘 알고 있다. 노 후보는 지방선거가 참패로 끝난 다음날인 14일 오전 기자간담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저의 정치력이나 지도력에 많은 비판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잭 웰치 같은 거장도 조직에 지도력이 침투하는 데 4∼5년이 걸렸습니다. 과거와 같은 권력을 가진 것도 아니고, 돈도 없고, 계보도 없고, 오직 정치적 신뢰성과 국민적 지지도로 출발했으므로…. 지금 노무현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한다고 하는 지적은 너무 성급한 지적입니다. 조직의 침투가 리더십의 시작인데 조금 시간을 주십쇼. 대선 전체 기간 동안 서서히 당에 침투해가는 방안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딜레마는 민주당도 마찬가지다. 오랜 논의 끝에 보다 민주적이라고 할 수 있는 집단지도체제를 채택했지만 6·13 지방선거의 참패는 이를 뿌리채 흔들고 있다. 대다수 의원들이 집단지도체제의 실효성에 의문을 표시하고 있고, 대선을 앞둔 비상시국이라는 논리는 집단지도체제의 실험 시간을 더욱 줄이고 있다. 권력의 분점, 후보와 대표의 분리라는 시대적 요구에 따라 집단지도체제를 채택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시 '일사분란'의 요구가 분출하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리더십의 실험, 청산 프로그램과 노무현 프로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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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주당 대선후보 노무현 ⓒ 오마이뉴스 |
이런 딜레마 속에서 지난 19일 노 후보가 제기한 '노무현 프로그램'은 주목할 만하다. 노 후보는 자신에 대한 재신임이 당무위원회를 통과하자 즉시 두 가지 프로그램을 밝혔다.
하나는 '청산 프로그램'이고 다른 하나가 '노무현 프로그램'이다. 청산 프로그램은 DJ와의 차별화 요구에 대한 노 후보의 응답이다. 과거와 같이 인위적으로 차별화하지는 않겠지만 부패문제에 대해 단호히 대처하고 더 나아가 재발방지 시스템까지 제시하겠다는 것이다.
노무현 프로그램은 청산 프로그램보다 좀더 거시적이며 리더십에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노 후보는 지난 20일 MBC 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에 출연해 노무현 프로그램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민주당이라는 조직을 이끌고 가면서 앞으로 국가경영을 해낼 수 있는 지휘자 내지 장수, 대통령 감이냐 하는 점에 대해서, 나는 아직까지 국민들에게 안정감있게 증명을 못했습니다. 이 부분을 하나하나 증명해나가는 과정, 나로서는 실험이 되기도 하고 증명이 되기도 합니다. 그 과정을 '노무현 프로그램'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이는 과거의 노무현과도 달라야 하고 김대중 대통령과도 달라야 하고 이회창 후보와는 아주 달라야 합니다."
노 후보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20일 김수환 추기경을 단독 예방한 노 후보는 22일 부산을 방문했고 24일에는 부패방지위원회를 방문해 강철규 의원장 등 관계자들에게 근원적인 부패방지대책 마련을 약속했다.
이날 오전 노 후보는 신기남 정치부패근절대책위원장, 이미경 부패근절대책위원, 정세균 대선기획단 정책기획실장, 천정배 후보정무특보, 함승희 후보법률특보 등과 '부패청산대책 간담회'를 가졌고, 26일에는 시민단체 대표 등과도 간담회를 계획하고 있다.
노 후보는 또한 개혁적인 칼라를 가지고 있는 김근태 의원을 8·8 재보선 특별대책위원회 위원장에, 임채정 의원을 신임 정책위원장에 선임하는 등 '개혁적인 라인업' 구축에 들어갔다. 8·8 재보선을 '노무현식 칼라'로 치르는 사전 작업을 시작한 것이다.
노 후보는 과연 어떻게 DJ 이후의 리더십을 구축할까. 노 후보측 관계자는 "노 후보의 리더십은 큰 원칙을 세우고 다른 권한은 위임하는 '위임형 리더십'"이라며 "이런 리더십이 당에 뿌리내리기까지는 수개월은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앞으로도 몇 번 우여곡절이 있을 것으로 본다"며 8·8 재보선과 이후의 재경선 논란이 리더십 구축의 또 한번의 시험대임을 시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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