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작소설] 윤상씨, 안녕하세요 Part. 3

미국인이 되고 싶었던 소녀

등록 2002.06.25 11:21수정 2002.06.25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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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동'이라고 쓰여진 표지판이 보인다.

내가 어디 서 있는지를 확인하는 일은 이렇듯 간단하다. 주위를 둘러보고, 기억할 만한 장소나 풍경을 머리 속에 새겨보고, 표지판 같은 것을 한번만 보면 금새 알 수 있다. 내가 서 있는 곳은 인사동이다.


회색의 보도블럭이 촘촘히 깔린 길 위에 혼자 서 있다. 많은 사람이 내 옆으로 스쳐간다. 일본인으로 보이는 한 무리의 관광객들이 자기 나라 말로 떠들며 지나가고, 다갈색 머리에 파란 눈을 한 프랑스인이 두 명 지나갔다. 프랑스인들은 무언가 흥미로운 것이라도 봤는지 들뜬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다. 중절모를 쓴 노인 둘이 갤러리 앞의 돌 벤치에 앉아 쉬고 있다. 노란 머리에 군데군데 피어스를 한 젊은이가 지나간다. 귀에는 이어폰을 끼고, 뭔지 모를 노래를 혼자 흥얼거린다. 단정한 원피스를 입고, 검은머리를 목뒤로 늘어뜨린 젊은 여자가 검은 백을 꽉 움켜쥐고 내 뒤로 걸어간다. 엿과 호떡을 파는 부부의 리어카 주위에는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다. 한 미국인은 호떡을 한입 베어 물고는 인상을 찌푸린다. 익숙하지 않은 맛인 모양이다.

더 확인할 필요도 없이 이곳은 인사동이다. 인사동이 아니고서는 어디에서도 이런 풍경은 연출되지 않는다. 도시계획이 잘못되었는지 터무니없이 좁은 길 때문에 자동차와 사람들 간의 신경전이 벌어지고, 외국인과 첨단을 달리는 젊은이들이 한데 뒤섞여 있고, 전통의 냄새를 내려고 부단히 노력한 흔적이 보이는 찻집과 공예품점이 블록마다 두 세 군데씩 자리한, 그런 동네다.

하지만 그건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닌지도 모른다. 내가 서 있는 위치, 지리학적 명칭, 행정구획상의 분류, 사람들의 분위기, 그런 것은 아무것도 아닌지 모른다. 사실은 처음 이 거리에 발을 들이는 순간부터 계속, 대체 여기는 어디인가, 하고 생각하고 있다.

노란 머리에 피어스를 한 청년을 볼 때마다, 붉게 물들인 머리에 파란 아이섀도를 한 젊은 여자를 볼 때마다 정신이 혼미해진다. 프랑스 문화원에 들렀다 나온 관광객들과, 록커의 티셔츠를 입은 미국인과 다를 게 하나도 없다. 여기가 과연 내가 찾아온 나라가 맞는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이 거리를 만든 의도가 무엇인지 의문스럽다. 전통문화의 거리라고? 골목 안에 스파게티 전문점이 있고, 큰길가에 커피 전문점이 있다. 그 사이에 자리한 전통 찻집의 모습이 혐오스럽게만 보인다. 공예품점에서 나오는 노랗고 갈색인 머리의 젊은이들이 이질적으로만 보인다. 뭐가 전통 문화이고 뭐가 민족정신인가. 여기는 식민지 국가다. 미국이란 나라의 보잘 것 없는 식민지. 아마 미국인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한국인들도 겉으로만 부정할 뿐이지, 속으로는 다들 인정하고 있을 것이다. 식혜 대신 다들 콜라를 마시는 주제에 자주국가니 외치는 모습은 하나의 코미디다.

나는 어린 시절, 타의에 의해 미국으로 건너가야 했다.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 한 미국인 부부의 손에 의해 샌프란시스코에서 살게 되었다. 입양, 이라는 절차를 통해서 나는 그 미국인들을 대디, 마마라고 불러야 했다. 졸지에 내 대디가 되었던 머리가 벗겨진 미국인 남자는 주말마다 포드 승용차를 끌고 낚시를 다니는 평범한 회사원이었고, 마마로 불린 펑퍼짐한 미국여자는 스탠실이 유일한 취미인 가정적인 사람이었다.


나는 꼬부랑말을 쓰는 놈들 가운데서 심한 정신적 공황을 겪었다. 스무 살이 되던 해, 지미 헨드릭스와 레드 제플린에 빠져들어 히피 생활을 시작했다. 매일 캐서린이란 미국인 여자애의 집에 모여 마리화나를 태우고, 도어즈나 핑크 플로이드를 크게 틀어놓고, 대 여섯 명이 한데 뒤엉켜 그 짓을 했다. 우드스탁 페스티벌이 벌어질 때도 그 자리에 있었다. 페스티벌은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중국 군대만큼이나 많은 인간이 무대 앞에 모여 앉아 몇 날 며칠을 먹고 자고 배설까지도 해결해야 했다. 곳곳에서 마리화나 냄새와 뭔가가 썩는 냄새가 풍겨 왔다. 사람들이 보거나 말거나 아랑곳없이 더는 못 참겠다는 듯 그 짓을 하는 인간들도 있었다. 공연은 신출내기의 무명 밴드들이 대거 출연했다. 모두가 피스, 란 말을 입에 달고 다녔다. 이유도 없이 비명을 지르고, 열광하고, 분노에 떨며 폭력을 휘두르곤 했다. 나는 동양인이었지만 미국인 친구를 많이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에 안전할 수 있었다.

미국놈들에게 인정받는 일은 간단했다. 놈들은 내 피부가 노랗다는 이유로 나를 깔아뭉개기를 원했다. 나는 놈들이 보는 앞에서 쥐의 꼬리 두 개와 바퀴벌레 하나를 삼켰다.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말이다. 놈들은 처음에는 경악했지만, 이윽고 다른 겁쟁이 동양놈들과는 다르다며 나를 친구로 인정해 주었다. 캐서린, 잭, 프래드, 도나. 그렇게 네 명의 백인과 나는 머리를 길게 기르고 방구석에 모여 뒹구는 생활을 지칠 줄도 모르고 반복했다. 그 사이 캐서린은 아이를 세 번이나 지워야 했다. 지독한 여자였다. 수술을 하고 난 이틀 뒤에 바로 그 짓을 개시하는, 그런 여자였다. 만일 아이를 낳았더라도 색골에 마약 중독자인 아이가 나왔을 것이다. 세 번 중에 아마 적어도 한번은 내 아이가 끼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전혀 아무렇지 않았다. 사실 생각하는 기능이 마비되어 있었다. 글씨를 쓰려고 하면 손을 부들부들 떨려서 한 줄도 제대로 쓸 수 없었다. 펜을 쥘 수조차 없는 경우도 많았다. 잡지에 기고해서 생계를 유지하던 나로서는 치명적이었다. 노랗고 긴 머리의 히피 황인종 마약 중독자를 고용할 마음좋은 사람도 없었다. 결국 우리는 도둑질로 생활을 유지해 나가야 했다. 그리고 그런 위태로운 생활은 캐서린이 자살하고, 프래드가 살인을 저지르는 것으로 일단락 되었다. 모두가 뿔뿔이 흩어져야 했다. 나는 한달 정도 마약 중독자 치료센터에서 지내다가, 손이 떨리는 증세가 사라질 때쯤에 퇴원했다.

이미 대디와 마마는 죽은 지 오래였다. 나는 한 신문에 기고한 글이 좋은 평판을 받아, 지방 신문사에서 취재하는 일로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다. 프리랜서 개념이었기 때문에 보수는 그리 좋지 않았지만, 혼자 사는데는 지장이 없었다. 수잔이라는 한국인 여자를 만나 동거를 시작했다. 수잔도 나처럼 마약에 찌든 생활을 한 경험이 있었다. 우리는 서로를 잘 이해하고 있었고, 아이가 생기자 곧바로 혼인신고를 하고 정식으로 부부가 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LA로 이주했다.

아마도 인사동 거리에 있는 모든 외국인들은 다들 비웃고 있을 것이다. 분명 그들은 한국 전통이 살아있는 거리라고 해서 특별히 이곳을 찾았을 것이다. 그러나 인사동 거리에 전통 따위는 없다. 우리는 미국 식민지입니다, 라는 서글픈 감각만이 생생하게 거리 전체에 울려 퍼지고 있을 뿐이다. 외국인들은 거리의 분위기가 어딘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감지하고 있을 것이다. 부조화가 거리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 그리고 이 거리에 또다른 특징을 이루는 감각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수치이다.

식민지이지만 인정할 수 없다는, 법적으로는 식민지가 아니지 않느냐고 항변하고 있는 듯한 수치심이다. 거리를 걷는 젊은이들 얼굴 하나하나에, 찻집과 공예품점의 간판 하나하나에 빽빽이 쓰여 있다. 심지어 행인들이 앉아서 쉬는 돌 벤치 하나에도 새겨져 있다. 검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돌 벤치조차도 수치를 알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저 돌 벤치 속에서는 이름 모를 누군가가 심한 자괴감과 비애에 젖어 울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이것은, 주권국가에서 살다온 식민지 국민만이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이제 나이 60이 다 되었지만 나는 분명히 느낄 수 있다.

종로 3가 전철역까지 걸었다. 종로 전철역에는 인상이 나쁜 노인들이 우글우글거린다. 미국에 살다 와서 그렇게 느껴지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한국의 노인들은 굉장히 인상이 나쁘다. 모두가 얼굴을 찌푸리고 있거나 화난 표정을 짓고 있다. 또는 무언가가 억울해서 견딜 수 없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다. 외국인들은 그런 한국 노인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한국의 노인들은 뼈 속 깊숙이 고생의 감각이 배어 있어서 그런 것이다. 배고프고 힘든 시기를 죽어라고 헤쳐 왔고, 이제 좀 살만하니까 죽을 때가 다 되었다는, 그런 억울함의 감각이다. 그들은 단 한번도 여가생활이나 유유자적함, 고즈넉함의 감각을 맛보지 못했을 것이다. 눈앞에 보이는 밥과 돈에 급하다보니 자기 스스로가 누구인지를 파악할 틈도 없었을 것이다.

노력과 낭비의 차이가 무엇인지조차도 생각하지 못한 채, 하면 된다는 이념에 사로잡혀, 무수한 재능을 낭비하며 살아왔을 것이다. 그렇기에 결코 그들은 표정에서 여유를 드러낼 수 없는 것이다. 오히려 그들의 인상을 지배하는 것은 살만하니까 죽을 나이가 되었다는 데서 오는 분노와 억울함의 감정이다. 그리고 그들은, 결코 죽는 순간까지 젊은이들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별 것도 아닌 것에 집착하고 열광하는, 머리를 물들이고 피어스를 하는, 몸에 문신을 하는 젊은이들을 혐오하고 있을 것이다. 나로서도 피어스나 문신이 좋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젊은이들은 이미 돈이나 밥을 중요시하는 시기는 지난 시대에 살고 있다. 돈 따위는 지천에 널려 있고, 하다못해 공사판 일이라도 며칠만 하면 손에 쥐어지는 것이 돈이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노인들의 소망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무언가이다. 자아라던가, 개성이라던가, 쾌락이라던가, 떳떳함이라던가, 그런 개인만의 고유한 가치를 찾아 헤매는 것이 젊은애들이다.

보람·근면·성실·노력을 최고의 가치로 알던 노인들과는 완전히 100% 다르다. 그런데도 노인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애들은 자신들과 다르게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우린 그렇게 뼈빠지게 고생하며 살았는데, 이만큼 살게 된 게 누구 덕인데, 왜 우리가 세운 가치와 사회체계를 너희가 무너뜨리느냐, 아무 것도 한 일 없이 받아먹기만 한 너희 세대가…하고 주장한다면 더 이상 대화할 여지가 없는 셈이다. 그저 가만히, 죽을 날을 기다리는 수밖에. 고통스럽더라도 받아들여야 한다. 자신들의 가치가 이제 통하지 않는 시대라는 것을. 다른 목적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때라는 것을. 물론 고생만 죽어라 하던 노인네들이 죽을 때가 다 돼서 그런 사실을 깨닫는다는 것은 무리겠지만.

미국의 그 배타적인 분위기 속에서 온갖 나쁜 것은 다 경험하며 지낸 나 같은 사람만이 그 노인들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깨달을 수가 있다. 젊은애들도 결코 깨닫지 못한다. 왜 노인들 말을 들으면 안 되는지를. 단지 그들은 짜증나기 때문에 반항할 뿐이다. 노인들 몸에서 나는 냄새가 싫고, 주름이 싫고, 죽음과 고생의 이미지가 싫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반항할 뿐이다. 자신들의 반항 배후에 어떤 거대한 흐름이 놓여 있는지는 죽어도 모를 것이다. 나나, 저 프랑스인들 같은 제 3자의 눈에만 보이는 것이다.

지하철에 올라탔다. 서늘한 에어컨의 바람이 날씨에 비해 지나치게 강력하게 도전해온다. 등줄기가 서늘해 질 정도로 에어컨은 강력하다. 벗어 들고 있던 재킷을 입는 회사원의 모습이 보인다. 지하철 내에는 빈자리가 없다. 다른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내가 탄 문에서 가장 가까운 곳의 손잡이를 붙잡고 섰다. 내 앞에는 긴 생머리의 여자애가 앉아 있다. 여자애는 나를 슬쩍 올려보고는 짜증스런 표정을 짓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훈련이 되어 있는 것이다. 노인이 앞에 있으면 양보해야 한다는. 노약자 보호석에는 아무리 많이 봐주어도 서른을 넘었을까 말까한 남자 셋이 앉아 있다. 방금 탑승한 노인들은 엉뚱하게도 젊은 사람들 앞에 서 있다. 노약자 석은 그렇다면 왜 분류되어 있을까. 노인들부터가 노약자석 쪽으로 가 앉기를 거부하고 있는데. 여자애가 짜증스런 표정을 짓는 것도 이해가 갔다. 나는 괜찮다고 손사래를 쳤다. 여자애는 앉으세요, 괜찮아요, 하고는 다시 일어서는 동작을 취했다. 나는 괜찮으니까 앉아서 가라고 말했다. 한국어를 사용한지가 꽤나 오래 돼서 단어를 조심스레 골라가며 말했다. 여자애는 다시 내게 자리를 권했다. 훈련이 얼마나 사람을 지치게 만드는지 뚜렷이 보여주는 여자애였다. 눈이 커다랗고, 쌍꺼풀이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다는 듯 자연스럽게 형성되어 있다. 머리는 다갈색이고, MF라고 쓰여진 티셔츠와 통이 넓은 청바지를 입고 있다. 나는 다시 한번 거절했다. 괜찮으니까, 앉아서 가, 라고 말했다. 여자애는 고개를 갸우뚱하고는 자리에 앉으며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다른 사람이라면 못 알아들었겠지만, 나는 생의 전부를 미국에서 보냈기 때문에 그 애의 말을 똑똑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퍽, 스트릭, 애스홀, 그런 단어를 중얼거렸다. 좃까라, 내지는 엿이나 먹어라, 라는 의미의 극단적인 욕설이었다. 발음으로 봤을 때는 내이티브 스피커에게 배웠던지 잠시 미국에 살다 왔던지 한 모양이었지만, 그와는 관계없이 반사적으로 내 입에서도 험한 말이 튀어 나왔다. 나도 영어로 말했다. 개년, 지금 뭐라고 했어? 아가리를 찢어버릴테다, 라는 의미의 말이었다. 여자애는 내가 욕설을 퍼붓자 주춤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를 똑바로 쳐다보더니, 할아버지 어느 동네 사람? 하고 묻는 것이었다. 나는 하도 어이가 없어서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여자애 옆에 앉은 중년 여자는 놀란 눈으로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바지를 끌고 다니면 좋니?"

여자애의 이름은 제시카였다. 더 정확히 말하면, 제시카는 미국에서 쓰는 이름이고, 한국 이름은 수진이라고 했다. 방학 때마다 한국에 와서 놀다 가는데, 한국보다는 LA에 있는 편이 훨씬 마음이 편하다고 했다. 그녀와 나는 지하철에서 나와, 역 근처의 커피숍에 들어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가 다니는 대학의 교수와 내가 아는 사이였기 때문에 금새 얘기가 통했던 것이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이 바지였다. 바지의 통이 너무 커서, 신발 밑으로 바지가 끌렸던 것이다. 나는 막 생각났다는 듯이 그 애에게 바지에 관해 물었다.

"편하잖아요."

제시카의 대답은 간단했다. 그게 과연 편할까, 실수하면 벗겨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젊은애들에게는 항상 오픈된 마음으로 대한다는 것이 나의 신념이었기 때문에, 그렇구나, 라고 답해주었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뭐하는 사람?"

제시카도 미국에서 오래 살아서인지, 반말과 존대말을 잘 가려 쓰지 못한다. 나도 여기 와서 가장 고생했던 부분이 존대와 반말이었다. 또 어느 학교 출신이냐, 나이는 몇이냐와 같은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묻는 데 대한 거부감 때문에 고생하기도 했다. 나는 신문사에서 글을 쓰다가 그만두고 한국에 와 있는 중이야, 하고 대답했다. 그런데, 너는 언제나 그런 영어로 사람들한테 대하니? 하고 내가 묻자, 제시카는 순간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실수한 것 같아서, 아니, 노우, 노우, 하고는 손을 저으며, 그런 의미가 아니야, 내 말은, 한국에 있는 동안에도 무의식적으로 영어가 튀어나오고 하느냐는 얘기지. 그렇게 말하자, 제시카의 표정이 금새 부드러워졌다. 얼굴이 하얗고 잡티 하나 없어서 막 잡지 화보에서 오려낸 듯한 느낌을 주는 여자애다. 피어스도 하지 않았다.

"응, 거의 자주 그래요, 여기 한국애들 골탕먹인다고 해야 하나? 그러기도 좋구요."

어떻게?

"짜증나는 애들 많아요, 여기. 되지도 않는 영어 쓰는 애들, 맘에 안 드는 눈빛으로 나 쳐다보는 애들, 겉으로만 튀려고 하고 속, 마인드는 낡은 애들, 그런 애들 있으면 나 영어 써요, 아까같이 퍽 더 스트릭 애스홀, 머더 퍼커, 하면서 슬랭이랑 섞어 말하면 깜짝 놀래요. 그리고는, 음."

위축된다고?

"응. 맞아요. 그 다음부터는, 쪼그라들어서 제대로 말도 못해요. 큰 소리로 말하지도 못하고. 뭐랄까, 미국이나 그런 이미지에 대해, 음, 그걸 뭐라더라, 자격, 뭐라고 하던데."

자격지심.

"맞아요. 미국에 대해 그런 게 있는 것 같아요. 지하철에서 영어로 통화하면 다들 신기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영문판 잡지 읽어도 이상한 눈으로 쳐다봐요."

스물 넷 밖에 안 된 여자애가 보기에도 진실은 드러나는 법이다. 제시카는 아주 좋은 지적을 해 주었다. 이곳의 사람들은 어찌된 일인지, 미군부대 철수나 사격장 문제에 나서는 것은 잘도 하면서 막상 자신들을 향해 아메리카라는 이미지가 접근하면 당황한다. 단체 속에서만 강해지는 비겁한 습성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수시로 영어를 섞어 말하는 이 나라 애들이 영어 앞에 당황한다는 것은 어디지 석연치 않다. 영어 교육에만 들이는 돈이 나라 전체를 먹여 살릴 정도 비용인 나라에서, 누군가에게 외국인이 영어로 말하면 우물거리거나 피해 버린다는 사실은 어딘가 아귀가 맞지 않는다. 지하철 광고판도, 잡지 이름도, 그룹이나 노래 이름도 죄다 영어이면서, 미국에서 살다 온 랩가수의 앨범 전체가 영어로 도배되어 있으면서, 스스로가 식민지에서 산다고 드러내고 있으면서도 막상 미국이 가까이 개인에게 접근하면 몸을 사리는 것이다. 나는 그건 수치의 감각이라고 생각해, 라고 제시카에게 말했다.

"수치? 그게 뭐예요?"

부끄럽단 뜻이지. 난 사실 이 나라는 아메리카 식민지라고 생각해. 그전에 일본이 그랬듯이 말야. 미군이 버젓이 땅의 좋은 부분에 주둔하고 있는데 그게 식민지가 아니고 뭐겠어?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이 사람들은 자신들은 자주 독립 국가 국민이라고 여기고 있는 것 같아. 사실을 사실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는 얘기지. 그래서, 부끄러운 걸 거야. 온 나라가 미국의 축소판이 되어 있으면서도, 그걸 인정하지 않으니까 부끄러운거야. 그래서, 제시카가 영어로 말하거나 미국에서 살다온 티를 내면 사람들이 동경의 눈빛으로 쳐다보거나 대화를 거부하거나 쫄아들거나 하는 거라고 생각해.

"응, 할아버지 말이 맞는 것 같아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제시카와 나는 그녀가 다니는 대학의 교수 이야기를 조금 한 뒤 헤어졌다. 나는 나중에 다시 미국에 가거든 식사를 한번 대접하겠다고 약속했고, 제시카는 기뻐했다. 여기 애들과는 달리, 제시카는 자기 감정 표현에 솔직한 편이다. 스스로에게 충실한 것이다. 제시카는 헤어지기 전에, 이런 말을 했다.

"사실은, 이번에 한국 오는 게 거의 마지막일 것 같아요. 여기 재미없어. 나이트 같은데서 부킹하는 애들도 싫고, 다 똑같은 춤만 추는 애들도 싫어. 그리고, 어설프게 흑인 옷차림 흉내내고 다니는 애들도 싫어요. 애들이 다 똑같고 머리가 텅 빈 것 같아서 속이 느물거려. 나, 아마 이번에 가면 다신 안 올 것 같아요. 시민권도 얻었고 하니까 아예 거기서 살아 버릴래. 미국 사람 되는 게 나을 것 같아."

나는 그녀의 말에,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유학생 애들은 엄청나게 많다. 아마 매일 수없이 많은 젊은애들이 이놈의 나라는 재미없다고 고개를 저으며 밖으로 나가고 있을 것이다. 왜 재미가 없는 것일까. 선배 후배 따져가며 사람을 숨막히게 하는 게 싫어서일까. 딱 네 군데 대학만을 대학으로 인정하는 풍토가 역겨워서일까. 힙합 바지가 유행하면 개나 소나 다 같은 차림으로 돌아다니는 나라가 재수없어서일까. 그것도 아니면, 한국어도 못하는 녀석들이 미국에서 살다왔단 이유로 본토 랩가수인 척 하는, 그리고 어떤 애들은 거기에 열광하는 모습이 속이 느물거려서일까. 분명한 것은, 이 나라에는 재미가 없다는 것이다. 다른 요소들은 갖추어져 있는지도 모른다. 노력이란 이름의 낭비부터, 다른 사람에 대한 지나친 관심까지 모든 게 다 준비되어 있다. IMF니 뭐니 하지만 돈은 썩어 넘치도록 많다. 지하철역에 뒹구는 노숙자를 인력이 달리는 나라에 수출만 해도 꽤나 돈이 될 것이다. 단지, 이 나라에는 재미가 없을 뿐이다. 왜 재미가 없을까, 돈도 있고 잘난 체 하는 놈들도 많고 젊은애들도 많은데. 그런 생각을 하며 숙소로 돌아와, TV를 켰다. 아직 스픽에 비해 히어링이 원활하지 않기 때문에, 계속 TV를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위성 텔레비전에서 리모컨 버튼 누르는 것을 멈추었다. 뿔테 안경을 쓴 남자가 화면에 비쳤다. 분위기로 봐서는 소설가나 가수처럼 보이는 남자였다. 남자는 쿠바의 음악에 대해 소개하고 있었다.

"쿠바 음악의 큰 발전 계기가 된 것은 어쩌면 카스트로의 쿠테타였을지도 모릅니다. 환상의 도시로 이름을 날리던 하바나를 방문하던 시기는 옛일이 되고, 쿠바는 폐쇄 국가가 되었죠. 미국은 쿠바를 세계무대에서 철저히 배제하려고 했습니다. 음,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북한보다도 더한 고립 상태에 처한 쿠바였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폐쇄된 상황이 오히려 문화에 있어서는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부분이 아이러니컬하지요. 쿠바인들은 거친 노동과 강렬한 태양빛 아래서 그들만의 음악 양식을 더더욱 발전시켰습니다. 미국의 재즈나 서양 음악과의 교배가 줄어든 대신, 쿠바 음악은 그들만의 독자적인 음악적 언어를 확립하게 됩니다. 쿠바 전통의 음악을 되살리기 위한 운동이 일어나고, 누에바 뜨로바 운동 역시도 그에 일조합니다. 묻혀 있던 자국 뮤지션들이 다시 기지개를 펴기 시작했습니다. 카스트로가 싫어서 외국으로 도피한 뮤지션들 역시도 독자적이고 탁월한 음악 세계를 표출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이것은 비단 음악뿐만이 아니라, 댄스나 야구, 배구와 같은 다른 문화적 부분들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고립되고 폐쇄된 악조건 속에서도, 매일같이 거친 노동과 군사정권의 억압 가운데서도 문화가 활짝 피어날 수 있는 요인은 무엇일까요. 그건 아마도, 음, '긍지'라는 개념이 아닐까 하고 생각합니다. 쿠바인들은 미국으로부터 공격받는 상황 가운데서도 수치스럽다거나, 고통스럽다는 생각을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국에 대한 긍지를 발전시키는 계기로 삼았던 것이죠. 그렇기에, 최악의 조건 가운데서도 쿠바의 음악이 세계적인 수준으로 인정받을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오늘 고른 음악은, 쿠바의 대표적 뮤지션인 실비오 로드리게스의 곡들 가운데서, 실비오 로드리게스의 '칸시온 유겐트 파라 니카라과'를 들려 드릴까 합니다. 실비오 로드리게스는 누에바 뜨로바 운동의 대표적인 인물로서, 쿠바 전통의 음악에 기반을 두고 새로운 요소들을 적절히 차용한 세련된 음악을 들려주는 뮤지션이죠. 이곡도 편안한 멜로디 라인에 어쿠스틱 위주의 편곡이 돋보이는 곡입니다. 함께, 감상하시죠."

남자의 멘트가 끝나자, 머리를 뒤로 빗어 넘긴 중년 남자의 공연 모습이 화면 가득히 비쳤다. 실비오 로드리게스, 라고 소개된 남자는 한없이 부드럽고 편안한 목소리로 노래한다. 음악 가운데 귀에 거슬리거나 음감이 어긋나는 부분이라고는 조금도 없다. 하지만, 남자의 표정은 어딘가 우울해 보인다. 가사가 자막으로 나온다. 스페인어를 배우면서 쿠바쪽 언어도 조금 익혔기 때문에 가사 내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실비오 로드리게스라는 남자는 진정으로 아파하고 있었다. 고통스러워하는 민중들에 대해서, 진심에서 동정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멜로디는 부드럽고, 음악은 더없이 릴랙스한 분위기다. 그 두가지의 어울리지 않는 요소가 한데 어우러져 묘한 감동을 자아내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마음이 숙연해지는 것을 느꼈다. 저 가수는 재미라는 것을 알고 있을까. 분명 알고 있을 것이다. 카스트로 아래 생활이 힘겹고 고통스럽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즐거움이나 재미를 잃지는 않은 채 살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저런 음악이 나올 수가 없다. 예전에도 그랬다. 비록 마약에 찌들고 매일 여자와 놀아나던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은 아니지만, 생활이 피폐한 가운데서도 긍지만은 잃지 않았다. 즐거움도 끝까지 손에 쥐고 놓지 않았다. 그랬기에 여지껏 버텨올 수 있었던 것이다. 캐서린은 스스로가 싫어진다는 얘기를 자주 했다.

그녀는 긍지와 즐거움을 버렸기 때문에 자살한 것이다. 스스로를 가치있게 여기는 인간은, 하루하루를 즐겁게 여기는 인간은 결코 스스로를 버리지 않는다. 그 시절 흘러나오던 레드 제플린과 롤링 스톤즈의 노래는 그런 긍지와 재미에 관한 하나의 상징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이것들만 있으면, 어떻게든 버텨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지금껏 웃으며 살아온 것이다. 영어를 쓰는 제시카 앞에 위축되던 남녀는 그런 정신을 갖고 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미국을 부러워하고 동경하면서도, 겉으로는 애써 부정하고 있다. 그런 인간에게 즐거움이나 자부심이 있을 리가 없다. 쿠바인들은 어찌된 영문인지 독재자 아래서 고생을 하고, 미국이란 거대 세력의 적이 되어 버렸지만 가장 중요한 부분만은 잃지 않은 채 살고 있다. 아니, 오히려 그 강한 아메리카를 상대로 여지껏 잘 버텨오고 있다. 차이는 거기에 있다. 과연, 제시카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 나는 다음에 제시카를 만나면 실비오 로드리게스의 음악을 들려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실비오 로드리게스의 음악에는 가장 중요한 것이 녹아 있었던 것이다. 뿔테 안경을 낀 소설가인지 뮤지션인지 모를 남자가 말했듯이, 긍지가 살아 숨쉬고 있었던 것이다. 제시카가 앞으로 살아가는데 반드시 가져야 할 요소가 그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정말로 미국인이 되든, 아니면 이 나라에서 살게 되든 간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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