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2002.06.25 12:51수정 2002.06.25 18:59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지난주 일요일 오후, 우리 가족이 한 달 뒤 입주할 남양주의 임대 아파트에 가서 이모저모 마지막 점검을 하고 돌아왔다. 나는 우리가 살 집이 어떻게 지어졌을까 하는 기대보다, 무언가 점검을 해야 한다고 하니 성가시고 부담스러웠다. 이사를 생각하면 나는 벌써부터 숨이 턱 막힌다.
다행히 나의 남편은 놀랍게도 접촉불량의 전구 하나, 주방 붙박이장
이마빡의 큰 생채기를 적발해 내어 빨간색 동그라미 테이프를 붙이는
쾌거를 이룩했다. 나는 마음속으로 조마조마했다. 단 하나의 흠도 발견하지 못하여 알뜰하고 야무진 주부의 반열에 오르지 못할까봐.
가구도 옷도 생활용품도 될 수 있으면 심플하게 심플하게…
마음 속으로는 심플하게를 항상 외치면서, 근래 홈쇼핑으로 사들인 것만 해도 정수기, 녹즙기, 법랑냄비 세트, 매직 그릴팬 등 한 보따리가 넘는다. 가자미 , 안동찜닭 , LA갈비 , 참치회 세트까지 홈쇼핑으로 주문해서 그동안 지지고볶고 쪄서 먹은 요리재료만 해도 한 트럭이 넘는다. 그리하여 오늘 나는 이사를 앞두고 앞으로 한 달 일체의 쇼핑을 삼가고, 냉장고에 있는 것들을 깨끗이 비우기로 굳은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다.
책도 마찬가지였다. 시립도서관과 동네 대여점을 자주 이용하는 편이기는 하나 책방에만 가면 눈이 뒤집혀서 지갑을 홀랑 터는 나쁜 버릇이 아직 고쳐지지 않고 있는 나로선, 구석방 한가득인 책정리만 해도 심히 부담스러운 것이다.
어제 오전 영화 <판타스틱 소녀백서>를 보면서 나는 무릎을 쳤다. 거기서 멋진 아이디어를 얻은 것이다. 옷이랑 책, 아이의 장난감, 인형, 테이프, CD 들을 가지고 나만의 벼룩시장을 여는 것이다. 그런데 아줌마의 구닥다리 옷이랑 책, 철지난 테이프, 나름대로의 엽기 콜렉션 장식품을 누가 사줄까?
그뿐만이 아니다. 너더댓 장 쓰고 그만인 일기장과 간헐적으로 메모한 수첩, 복사해둔 글들과 각종 팸플릿, 스크랩북들을 모아둔 상자가 무려 넷! 그동안 무작정 끌고 다녔는데 이젠 정말 정리를 해야 할 때가 오고 만 것이다.
어쩌면 나는 옷보따리보다 이 상자들이 더 난감하고 부담스러웠다.
내가 재미있게 읽은 기사나 각종 글들, 메모도 코팅하여 내놓으면 누가 좋다고 사가지고 갈까? 아니, 마음만 맞으면 그냥 줄 용의도 있는데…
문제는 내가 내 누추한 삶의 궤적들을 심히 부담스러워하면서도 과감하게 버리지 못한다는 데 있다. 어쩌면 이번에도 나는 그것들을 머리에 이고 등에 지고 끙끙거리면서 고스란히 새 집에 옮겨다놓을지 모른다.
어느 날, 그날이 언제일지는 모르나 내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어느 날을 생각해본다. 나의 바람은 나의 가족과 친구들이 내가 남겨놓고 간 것들로 하여 언감생심 나를 추억하며 애지중지하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처치곤란한 것이지 않기를 바라는 정도인데…
어떤 변명으로도 통하지 않을 만큼 많은 물건 속에 나는 지금 갇혀 있다. 더구나 어제 나는 곧 이사간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모 홈쇼핑에서
김치 10kg을 주문해 버렸다. 그 사실을 남편에게 고백했더니 이 남자, 당분간 저녁을 밖에서 해결하고 와야겠다고 그러는데…
마음을 가다듬고 심플하게, 심플하게를 주문처럼 다시 읊조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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