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2002.06.28 09:16수정 2002.06.28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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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뺨에서 태극기 스티커를 지우려고 씨름하고 있는데 아침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우리 동동이의 동네 친구 아립이 엄마의 전화였다.
아립이 아빠가 만든 영화가 다음주에 개봉한다는 건 영화잡지와 각종 TV 연예 프로그램을 통해서 알고 있었는데, 나를 시사회에 초대한다는 것이다.
"30대가 보기엔 좀 그럴 텐데…"하는 것이 초대는 하면서도 어디까지나 겸손한 아립이 엄마의 얘기였다.
대한민국 만세! 나를 30대로 알고 있다니….
아이의 뺨에서 영 지워지지 않는 스티커 자욱처럼 요즘 내 입에는 대한민국이 아주 배어버렸다. 하얀 옷에 물든 김치국물 자욱처럼 그건 좀체 잘 지워지지 않는다.
영화 시사회와 관련하여 내겐 뼈아픈 추억이 있다. 몇 년 전 어느 잡지에 쓴 내 영화 에세이를 보고 모 영화사 기획실에서 전화까지 걸어 나를 시사회에 초대했는데, 그날 아침 허리를 삐끗하고 만 것이다.
아무 영화가 아니었고, 꼭 보고 싶은 영화였다. <해피엔드>. 전도연과 최민식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볼 절호의 기회였는데 아깝게 놓치고 만 것이다. 더구나 허리를 삐끗하다니! 아직 노인이 되려면 멀었는데…. 그날 나는 너무너무 우울하고 불행했다. 시사회에 초대받았다고 마치 내가 유명인사라도 된 듯한 기분에 우쭐했었는데 그게 사단이었던 것이다. 과잉의욕은 소망한 바를 불가능하게 한다!
어쨌든 어제 나는 생에 두 번째로 영화 시사회에 초대받았다. 장소는 남산 애니메이션센터. 남산이라면 돈가스로 유명한, 꼭 한번 가보고 싶었던 식당이 있는 곳이 아닌가!
나는 남편을 대동하기로 했다. 돈가스는 혼자 먹기에는 좀 어색한 메뉴라는 게 평소의 내 지론이었다. 그리고 밤의 남산을 혼자 오르락내리락하는 건 좀 그랬다.
"동동이 덕에 호강하네!"
돈가스 집 맞은편이 바로 시사회장이라는 믿을 수 없는 행운에 남편과 나의 입은 벌어졌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돈가스로 유명하다고 명찰을 달고 있는 식당이 두 곳이었던 것이다. 한 집은 두세 명의 장정이 적극적으로 손님을 끌고 있었고, 거기다 내가 몹시 싫어하는 신문이 추천한 맛집이었다. 택시들은 대부분 그 식당 앞에 섰다.
기자들 월급 많이 주기로 소문난 신문사에서 선정한 맛집이니(기사는 그따위라도 입맛은 고급일 것 아닌가!) 그 집이 원조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너무 적극적인 호객행위가 마음에 걸려 우리는 상대적으로 조촐해 보이는 식당을 선택했다. 돈가스는 맛있고 푸짐하고 값이 싸서 아주 만족스러웠다. 어느 집이 원조인지는 지금도 알 수 없다. 맛있게 먹었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한다.
시사회장 로비에는 아립이 아빠가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었는데 바쁜 와중에도 우리 부부를 보고 활짝 웃어주어 기분이 좋았다. 영화감독과 한 골목에 사는 영광과 기쁨이여! 영화는 꽤 재미있었다.
"내일 하루 나는 미칠 듯이 예뻐야 해!"
나는 왠지 이 대사가 마음에 쏙 들었는데 영화가 끝날 무렵 아립이 엄마가 시나리오를 썼다는 걸 알게 되었다.
영화의 제목은 <서프라이즈>. 신하균과 이요원의 담백한 매력을 잘 살린 영화였다. 그리고 제목처럼 마지막 반전이 깜찍하고 무리없는 영화였다. 영화 잘 봤다는 인사를 꼭 하고 싶었는데 부끄러워 숨은 것인지 아립이 아빠는 보이지 않았다.
남산의 유명한 돈가스 맛보기, 그리고 영화를 시사회장에서 한 번 보고 싶다는 나의 오랜 소원을 한꺼번에 해결한 멋진 하루였다.
덧붙이는 글 | 아립이는 여섯 살, 동동이는 다섯 살 여자아이이다.
언젠가 늦은 밤에 아립이가 예쁘게 포장한 엄지손가락만한 햄스터 인형을 사과의 선물이라며 들고 온 적이 있다. 울먹울먹하면서…. 낮에 동동이 발을 밟았다든가, 어쨌다든가!
다음달에 이사를 가는데, 가기 싫은 이유 중의 하나가 딸아이가 난생 처음 사귄 친구 아립이와 헤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둘은 어느 날 골목에서 저희들끼리 눈이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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