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의 입'을 비판하기 전에…

등록 2002.06.29 06:42수정 2002.06.29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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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율.1]

2000년 8월 25일, 조선일보는 <정치인의 입>이란 제하의 만물상 칼럼을 통해 민주당 최고위원 경선에 출마한 이인제 고문의 "충청도에서도 탁월한 지도자가 나온다면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발언을 강력 성토했다. 조선일보가 그에게 적용한 죄목은 "망국병으로 지탄받는「지역감정」을 부추겼다"는 것.

조선일보는 이 고문의 발언에 대해 "집권당의 당직 경선과정에서 나온 자화자찬"에 불과하며 "당내 행사라 선거법에 저촉되는 사안도 아닐 것"이라고 부연하면서도 "하지만 그냥 넘기기에는 너무나「지역감정적」이어서 불쌍한 생각이 들 정도"라고 이 고문을 몰아세웠다. 조선일보의 입바른 소리를 잠깐 감상해 보시라.

"논산 출신인 그가 텃밭에서 「충청 대통령론」을 편 것은 그 현장에서는 득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기로서니 그런 말이 금기인 줄을 그는 정말 몰랐단 말인가…"

"이야말로 망국병으로 지탄받는「지역감정」을 부추겼다고 비난받아도 할 말은 없을 것이다. 그것이 당내에서 일고 있는「이인제 불가론」에 대한 돌파수일지는 몰라도 적어도 새시대의 대권을 꿈꾼다는 정치인이 할 말은 아니다…"


조선일보는 "지난 총선 때 낙천운동에 앞장섰던 총선시민연대도 지역감정 타파를 내세웠으나 웬일인지 민주당 행사에는 별 말이 없다"며 총선시민연대를 싸잡아 비판하는 한편, 이 고문에 대해서는 "차기 대선에서야말로「지역감정」에 매달리는 정치인은 입후보 단계에서 후보조차 '팽'해야 한다"고 소리를 높였다.

[조율.2]

2002년 6월 24일, 한나라당 법률지원단장인 김용균 의원은 서울고법이 선거법 위반 혐의로 기소됐던 민주당 의원 4명에 대한 항소심 공판에서 곽치영 의원 1명만 당선무효형에 해당하는 판결을 내린 것과 관련, "1심에서는 호남 출신, 그리고 2심에서는 충청 출신 법관들이 재판을 진행했다"며 법관들의 출신지역을 문제삼아 판결내용에 불만을 토로했다.

김 의원의 발언은 만사를 지역연고에 기대어 판단하는 지역주의적 사고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으로 사법부는 물론 여러 곳으로부터 거센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한나라당에 우호적인 언론으로 분류되는 중앙일보조차 사설을 통해 <한나라당의 한심한 판결 시비>(2002.6.26)를 비판했을 정도. 사태가 심각해지자 한나라당은 27일 서청원 대표가 직접 나서 "김 의원의 발언은 매우 부적절했으며 온당치 못했음을 밝힌다"고 사과하며 서둘러 진화에 나섰다.


그러면 '망국병으로 지탄받는「지역감정」을 부추기는 것을 도무지 용납 못하는' 조선일보는 김 의원의 발언에 대해 어떻게 대응했을까?

조선일보 지면에 '김용균 의원'의 이름이 등장한 것은 28일, 그러니까 사건 발생 후 나흘이나 지나서였다. 그것도 서 대표의 사과발언과 한데 묶어 4면 하단에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극히 짤막하게. 전문을 소개한다.


"한나라당 김용균(金容鈞) 의원이 지난 24일 의원총회에서 "민주당 의원들에 대한 고등법원의 선거법위반 판결 결과 1명만 빼고 나머지는 문제가 없게 됐다"며 "1심 재판장은 호남, 2심은 충청출신이 맡았다"고 말한 것과 관련, 서청원(徐淸源) 대표가 27일 사과했다. 서 대표는 이날 주요당직자회의에서 "김 의원의 발언은 매우 부적절했으며 온당치 못했다"며 "앞으로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한나라] 徐대표, 김용균 발언 사과, 2002.6.28, 4면 하단)

그리고 29일에는 "이제 우리나라도 명문학교를 나온 좋은 가문 출신의, 훌륭한 경력을 가진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는 명언(?)을 남긴 하순봉 최고위원과 짝을 이뤄 <한나라당 두 議員의 몰상식>이라는 제하의 사설에서 다시 깜짝 출현한다. 이 가운데 김 의원과 관련된 대목만을 소개한다.

게다가 불과 며칠 전 같은 당의 김용균 의원이 선거법 위반 재판과 관련해 "1심은 호남출신, 2심은 충청출신 법관들이 재판을 진행해 민주당 편을 들었다"는 몰상식한 발언을 해서 서청원 대표가 사과까지 했다. 그런데 또 하순봉 최고위원의 그런 발언을 접하니 그들 정치인들의 양식과 고민의 깊이에 실망하지 않을 수 없다…([사설] 한나라당 두 議員의 몰상식, 2002.6.29)

서 대표가 직접 나서서 사과까지 해야 했을 만큼 한나라당 김 의원의 발언이 심각하게 잘못됐음에도 그러나 어인 일인지 그에 대한 비판은 조선일보 지면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다만 다른 기사와 한데 묶어 모듬으로 처리하면서 "김 의원이…말했다"는 식으로 사실관계만 간단히 기술했을 뿐.

"충청도에서도 탁월한 지도자가 나온다면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민주당 이인제 고문의 말에서 망국적인 지역감정의 냄새를 맡아내는 조선일보의 발달된 후각이 "1심 재판장은 호남, 2심은 충청출신이 맡았다"며 사법부를 멋대로 재단한 한나라당 김용균 의원의 말 앞에서는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속내가 못내 궁금하다.

일언이폐지하고, 글을 갈음하기 전에 조선일보의 말을 빗대 한나라당에 한 마디 하련다.

"차기 대선에서야말로 「지역감정」과 「학연」, 「혈연」에 매달리는 정치인과 정당은 철저하게 '팽'해야 한다".

덧붙이는 글 | 위 기사는 '하니리포터'에 송고한 기사입니다.

덧붙이는 글 위 기사는 '하니리포터'에 송고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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