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무대일가(2)

전라북도 남원, 한씨의 가족사

등록 2002.06.29 08:31수정 2002.07.01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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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장례가 끝난 후 계원들은 동섭네 작은방 옆에 기둥을 세우고 짚과 새끼를 둘러쳐서 궤연을 꾸몄다. 전주댁은, 그녀의 이름은 이옥자이다, 이곳에 마련된 영좌 위에 마치 산사람을 대하듯 조석으로 음식을 올려놓고 "아이고, 아이고!" 하는 곡을 한다.


교의 위에는 한상현의 흑백사진과 흰 고무신, 안경 등 생전에 쓰던 물건이 놓여졌다. 이것들을 대할 때마다 동섭이 느끼는 것은 알 수 없는 두려움이었다. 금방이라도 되살아난 아버지가 자신을 어둠의 세계로 끌고 갈 것처럼 생각되기도 하고 생전에 홀대한 죄를 묻기 위해 저주를 내릴 것도 같았다. 이런 느낌은 사진을 볼 때 더욱 뚜렷해졌다. 눈은 영혼을 파먹을 것처럼 노려보는 듯하고, 입가에는 이승이나 저승에 속하지 않는 심술궂은 미소를 띤 것처럼 보였다.

동섭을 본받은 아이들은 더욱 유난을 떨었다. 영좌에 올려졌던 수저나 그릇을 눈 여겨 봐두었다가 간혹 밥상에 그것들이 올라오면 기겁을 했다. 마치 그것들에 귀신의 혀가 붙어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렇다. 한 번 죽은 자가 다시 돌아와서는 안 된다! 그런 일이 절대 있어서는 안 된다. 동섭은 몇 차례 그런 생각을 했다.

며칠 뒤 동섭은 또 하나의 두려운 대상을 발견했다. 그것을 본 순간 그는 어두운 동굴에서 박쥐를 만났을 때처럼 소스라치게 놀라 감히 그것을 펴볼 용기를 갖지 못했다. 그것은 장남 영수의 책상에 놓여져 있던 한 권의 책이다. 검은 비닐 표지가 입혀지고, 죽은 자에게만 사용할 수 있다고 알고 있던 붉은 색 책갈피로 된 것이다. 정말 끔찍해. 악령이 붙어 있는 것 같아.

그 날 저녁 그는 잠자리에서 전주댁에게 이 사실을 말했다. 지금껏 그는 아내인 전주댁에게 자신의 생각을 거의 숨김없이 말해왔다. 그녀만이 자신을 이해해 주고 위로해 줄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전주댁도 마치 자식의 얘기를 들어주는 양 동섭의 말에 관심을 기울여 주었다.

"정말 이상한 책이야."
잠시 생각하는 눈치더니 전주댁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영수의 책상이 있는 도장방으로 달려간다.


"어디 있다고 그래?"
동섭도 자리에서 일어나 도장방으로 갔다. 정말 없었다. 그가 두려움 속에서 보았던 책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다.

"그것이 바로 성경책이요, 성경책!"
전주댁이 큰소리로 외친다. 그 책의 주인이 장남인 영수라는 것을 알게된 동섭은 당황했다. 동섭은 장자였고 아버지도 장자였으며 할아버지도 장자였다. 장자는 제사를 물려받아야 하고, 가문을 이어갈 막중한 책임이 있었다. 동섭은 누구에겐가 대부분의 장자들이 무능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어쩌면 이 녀석도 나처럼 무능하고 겁이 많은 것일까, 어디엔가 의지할 곳이 필요했던 것일까.


한 집안의 장자라는 것은 많은 것을 누릴 수는 있었다. 하지만 혼자서 미개척지를 탐험하는 외로운 존재였다. 이 때 부모는 그다지 많은 도움이 될 수 없었다. 과거의 예절이나 윤리가 절대불변의 진리라도 되는 양 들려주거나 인간 세상의 처세를 알려줄 뿐 정말 자라는 자식에게 필요한 지식을 갖고 있지 못했다. 게다가 그는 말만 장남이었지 다른 형제들에 비해 부모에게 천대를 받았다.

그렇게 자라 난 동섭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만 해도 벅차했다. 그도 한 때는 다른 사람과 다르게 살고자 했었지만 모두 실패했고 이젠 농부로 늙어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더구나 그는 대범하지 못하고 사소한 일에도 쩔쩔맸다. 주위에 허다한 일꾼들처럼 일을 잘 하거나 힘도 세지 못했다.

사실 그는 열심히 일을 해서 재산을 늘려갈 생각이 없었다. 도대체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전주댁로부터 늘 왜 이렇게 욕심이 없느냐고 타박을 듣지만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왜 사람이 마음먹은 대로 살지 못하냐고 해도 소용이 없었다.

덧붙이는 글 | 작가의 노트 : 도프토예프스키를 선망한다고? - 관료층의 상부와 밀접하게 유착한 골수 보수주의자 도스토예프스키를 ‘대표적인 지성인’으로 꼽는다는 것은, 미국·서구 보수층의 ‘가치 서열’을 그대로 따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 박노자<[ 박노자의 세계와 한국 ] 한겨레 21. 2002년05월22일 제410호> 의 글을 읽고 난 후 나는 충격을 받았고, 우상을 또 하나 잃어버렸다. 내가 아는 도스토예프스키는 영혼의 심층까지 내려가려고, 진실을 탐구하기 위해 노력했던 작가가 아니었던가.

진실이란 이렇게 부지불식간에 드러나는 것일까. 혹 우리가 알고 있는 한국의 작가나 인물 중에 그런 사람은 또 없을까.

덧붙이는 글 작가의 노트 : 도프토예프스키를 선망한다고? - 관료층의 상부와 밀접하게 유착한 골수 보수주의자 도스토예프스키를 ‘대표적인 지성인’으로 꼽는다는 것은, 미국·서구 보수층의 ‘가치 서열’을 그대로 따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 박노자<[ 박노자의 세계와 한국 ] 한겨레 21. 2002년05월22일 제410호> 의 글을 읽고 난 후 나는 충격을 받았고, 우상을 또 하나 잃어버렸다. 내가 아는 도스토예프스키는 영혼의 심층까지 내려가려고, 진실을 탐구하기 위해 노력했던 작가가 아니었던가.

진실이란 이렇게 부지불식간에 드러나는 것일까. 혹 우리가 알고 있는 한국의 작가나 인물 중에 그런 사람은 또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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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문학세계》에 「매직을 훔친 아이」가, 《문학과 창작》에 「리오그란데를 찾아서」가 당선되면서 문학 활동을 시작하였다. 소설집으로 「장례식에의 초대」, 「로터리에 앉아 있던 새」 해양문고 「우리 바다가 품은 온갖 이야기」, 에세이 <지금은 별을 보며 한걸음 내디딜 때>가 있다. 현재 소설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양산에 거주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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