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2002.06.30 18:43수정 2002.06.30 19:19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그동안 축구의 변방국가에서 이제는 당당히 '세계 4강' 국가라는 실로 값진 위업을 이뤄내며 아울러 우리 국민 모두를 한마음의 애국자로 동화시킨 <2002 FIFA 한·일 월드컵>이 어제 우리나라와 터키 간의 4강 결승전과 오늘 브라질과 독일의 결승전을 끝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립니다.
월드컵 때 제가 보고 느낀 감격은 거개의 국민여러분들과 마찬가지로 이루 말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많은데 그중에서도 지금도 제 뇌리에 새록새록 남는 것은, 박지성 선수와 여타의 우리 축구선수들이 골을 넣고 곧바로 달려가서 히딩크 감독의 품에 안기는 모습과 우리의 젊은이들이 보여준 태극기에 대한 뜨거운 열정이었습니다.
히딩크 감독의 품에 안기는 우리 축구선수들의 모습은 마치 시험에서 백점을 받고 그걸 자랑하려고 집으로 정신없이(?) 달려와서 아빠 품에 안기는 아들의 모습과도 같은, 참으로 보기좋은 아름다운 정경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다음으로 저를 또 감격하게 한 것은, 우리 젊은이들의 태극기에 대한 열렬한 사랑이었습니다. 태극기 스티커를 얼굴과 의류 등에 붙이는 것은 기본에 속했고 태극기로 만든 패션까지도 등장하는, 가히 태극기가 물결을 이루는 감동의 도가니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러한 우리 젊은이들의 가히 파격적인 '태극기 사랑'을 보면서 40대 구세대인 저는 실로 격세지감을 느껴야 했습니다. 진부한 주장일지 몰라도 저와 같은 40대 이상의 세대에게 있어서 태극기는 지금 역시도 금방 '국가에 대한 충성'이라는 등식으로 다가옵니다. 저는 초등학교를 박정희 정권 때인 1970년대에 다녔는데 그 당시에 문교부(현 교육부의 전신)에서는 전국의 학교에 '국기에 대한 맹세'를 내려보내 암기하게 했습니다. 그 내용을 암기하지 못하면 손바닥에 내리꽂히는 무지막지한 회초리를 감수해야만 했지요.
또한 유신시절 때 한국인들은 누구가 오후 5시가 되면 확성기에서 흘러나오는 애국가와 "나는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라는 맹세 소리에 가던 걸음도 멈춰야 했습니다. 또한 드잡이하던 손도 놓고 장바닥에서의 흥정까지도 중단해야만 했지요.
어디 그뿐인가요. 극장에서 영화 한 편을 보려 해도 애국가와 태극기에 대한 맹세문을 관람객들은 먼저 접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당시에 태극기가 우리국민들에게 주는 이미지는 우선 '경직됨'과 일종의 '공포감'으로 다가오곤 했습니다.
지난 1980년대 초반에 군에 입대한 저는 방위병으로 보직을 받아 모 동사무소에서 근무를 했는데 쫄다구던 시절에 제가 매일 하던 일 중에 태극기를 게양해야 하는 실로 중차대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태극기는 제가 근무했던 그 지역의 사통팔달 관문이기도 한 역(驛)앞에 위치한 국기 게양대에 달아야 했는데 기실 그 일은 보통 까다롭고 힘든 게 아니었습니다.
비가 오는 날이면 몰라도 그렇지 않은 날에는 반드시(!) 아침해가 뜨기 전에 태극기를 달고 또한 해가 지기 전에 시간을 맞추어 게양된 태극기를 정성껏 수거, 보존하여야만 했는데 하루는 제가 몸이 아파서 그 일을 못한 적이 있었습니다.
몸이 아파서 그날 하루는 푹 쉬었으면 딱 좋았겠지만 당시 제 신분이 '군인'이었던지라 그럴 수는 없었기에 꿍꿍 앓다가 아침 열 시가 좀 넘어서야 억지로 출근을 하는데 역 앞을 지나노라니 그만 태극기가 안 걸려 있는 것이었습니다. 순간 저는 제 심장박동이 멎는 줄만 알았습니다. '어이구, 오늘 나는 죽었다!'
아니나 다를까. 동사무소에 출근한 저는 고참병으로부터 반은 죽도록 맞았지요. "너, 얼른 가서 태극기 달고 와!" 뒤늦게 달려가서 겨우 게양한 태극기를 보면서 저는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전두환 정권에서는 "국기에 경례할 때는 국기에 대한 맹세도 병행해 실시하라"는 지침을 강력하게 실천하던, 그야말로 '살벌한 시기'였거든요.
그래서 저는 지금도 태극기를 보면 경외감의 차원을 넘어 일종의 공포감까지도 느끼는 사람인데 하지만 세월이 흘러서 올해 월드컵 대회를 개최한 우리 국민들은 태극무늬를 얼굴이나 팔에 새기는 것도 모자라서 태극기로 두건과 바지, 그리고 치마까지도 만들어 입을 정도로 변했으니 참으로 격세지감을 느끼게 됩니다.
하지만 이처럼 우리의 국기인 태극기를 소재로 한 '즐거운 불경(不敬)'을 통해 우리 국민은 보다 자유롭고 자발적인 방식으로 국기와 나라에 대한 사랑을 표현할 줄 알게 됐다고 생각하니 기분은 즐겁습니다. 아울러 역시 젊음이란 좋은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